최장수 국방장관 역임한 제4대사령관 김성은 장군
- 4대 사령관 중장 김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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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임기간 1960.6.25 ∼ 1962.7.1
- 생년월일 1924년 12월 20일
- 출 생 지 경남 창원
- 학 력
- 1943 만주 하얼빈 농대 수료
- 1956 육군대학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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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 력
- 1946 해군소위 임관
- 1952 해병대 전투단장
- 1953 해병학교장
- 1956 해병대 제1사단장
- 1959 해병대 부사령관 겸 참모장
- 1960 제4대 해병대 사령관
- 1962 해병중장 예편
- 1952 해병대 전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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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 훈
- 1951 미 은성무공훈장(2회)
- 1951 미 공로훈장(2회)
- 1951 태극 무공훈장(2회)
- 1952 금성충무 무공훈장(2회)
- 1952 금성을지 무공훈장(′53‚ ′54)
- 1951 미 공로훈장(2회)
제4대 사령관을 역임한 김성은 장군은 6.25전쟁기간 중 전쟁터를 가장 많이 누빈 지휘관인 동시에 해병대 장교로서 가장 먼저 태극무공훈장을 탄 수훈의 지휘관이며 또한 최장수 국방장관직을 역임한 지략과 무운과 관운을 함께 타고난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24년 마산시 가음정동에서 태어나 소시 적에 만주로 건너가 대도관중학교를 거쳐 하얼빈 농대에 진학, 3학년 때 8.15 해방을 맞이했던 그는 동지들과 뜻을 모아 ‘고려자위단’이란 단체를 조직하여 하얼빈으로 모여 든 귀국 교포들을 철도편으로 신의주까지 호송하는 일을 추진했는데, 그러한 인연으로 만주에서 귀국한 만군대위 출신의 정일권(丁一權)씨의 권유로 그가 태능에서 편성 중인 제2중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었다가 때마침 해방병단(海防兵団)을 창단 중에 있던 손원일(孫元一) 단장에게 스카웃되어 진해로 내려가 해방병단(해안경비대의 전신)에 입대하게 되었고, 소위로 임관되어 승진을 거듭했던 그는, 해병대가 창설될 때 준․하사관교육대에서 함께 근무원 적이 있었던 신현준 사령관의 간곡한 요청으로 참모장으로 영입되어 창설기의 초석을 닦았다.
해병대가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을 때 6.25전쟁이 일어나자 열성적인 모병강연으로 수많은 학도병과 청년들을 해병대에 입대시켰던 그는, 그 해 7월 중순 군산으로 출동했던 고길훈 부대가 여수항으로 철수했을 때 고길훈 소령과 임무를 교대하여 남원 운봉 함양 진주지구 전투를 거쳐 8월3일 새벽 마산 서측방의 관문인 진동리지구에서 인민군 6사단의 기동정찰대를 요격하여 전장병 1계급 특진의 영예를 누렸다.
그 해 8월 중순 무방비 상태에서 놓여 있던 통영 시가지에 거제도를 노린 1개 대대의 적이 침투하자 해군본부에서는 때마침 진해에 집결해 있던 김성은 부대장에게 작명을 하달하여 병력을 거제도 서해안에 상륙시켜 그 적이 서해안으로 건너올 경우 격퇴시키라고 했으나 그는 독안에 든 쥐를 때려잡듯 일거에 섬멸할 비책을 타전을 통해 끈질기게 해본에 건의한 끝에 통영반도를 초계 중인 해군함정의 지원 하에 전광석화와도 같은 기습상륙전을 성공시킴으로써 귀신잡는 해병의 신화를 창조했다. 51년 8월 미국정부로부터 ‘리젼오브메리트’ 훈장을 받았던 그는 그 해 10월에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태극무공훈장을 받는 영예를 누렸으며 그 훈장들은 해병대 장교로선 처음 받는 훈장이었다.
수도탈환작전과 북진 시에 참모장으로 재임했던 그는 그 후(50.12) 제1연대장으로 임명되어 영덕지구 전투와 영월지구 및 화천지구 전투를 지휘했고, 교육단장 재임 시 제1전투단장으로 임명되어 김석범 단장과 임무를 교대했던 그는 52년 10월 31일 밤에 감행된 중공군의 제2차 추기공세를 격파하여 1차 공세 때 당한 수모를 설욕하고 남음이 있는 대첩을 거두어 이승만 대통령의 부대표창과 신익희 민의원 의장의 감사장을 받았다.
그러한 일들을 기억하고 있는 노병들 중에는 김성은 부대장은 자신이 엽총으로 잡아 특별히 도려내어 말린 암여우의 그것(생식기)을 실로 매어 CP에서 빙빙 돌리고 앉아 있기만 해도 무운이 따르지만 작전명령서를 지나치리만큼 꼼꼼하게 검토하고 수정하는 김석범 장군에겐 왠지 모르게 무운이 따르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휴전 10주년이 되던 날(60.6.25) 한국군측 수석대표로 120차 정전회담에 참석했던 김성은 장군은 회담 도중 부사령관직에서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는 기별을 받고 어떻게나 기뻤던지 테이블 맞은편쪽에 앉아 있는 북한군 장성들에게 “전쟁을 일으킨 네놈들 때문에 우리 해병대가 이만큼 커졌고 사령관의 계급이 중장까지 되었다”며 인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감군계획이 추진되고 있던 장면 정권(제2공화국) 때 위트 있는 화술과 유머러스한 외설담에도 능한 인물로 알려져 있던 김성은 사령관은 특별히 공을 들여 마련한 장 총리와 그 측근인사들을 영접하는 자리에서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는 장 총리의 표정이 근엄하여 말을 꺼낼 분위기가 못되었기에 부득불 분위기 조성을 위해 자신의 18번 외설담(와이당)을 꺼내어 장 총리를 웃지 않을 수 없게 한 다음 “각하, 고기 한 근을 떼내려면 황소(육군을 뜻함) 다리에서 떼야지 참새(해병대) 다리에서 떼낼 수야 있겠습니까?”하며 해병대를 감군 대상에서 제외시켜 주십사고 간청을 하자 장 총리께서 “참새 다리라...”하며 의미있는 웃을을 지었다는 그 이야기는 김 장군이 ‘와이당’의 명수(名手)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화제로 전해지고 있다.
관운을 타고났던 김 장군은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그 다음날 선뜻 혁명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육군본부로 불려 갔다가 나올 때 그를 노리고 있던 누군가에 의해 기관총으로 사살될 뻔했으나(이 이야기는 반혁명 음모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원충연씨의 회고록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62년 사령관 임기를 마친 후에 취임했던 인천중공업사장 재임기간 중 (63.3) 박정희 의장의 입각 요청을 받고 15대 국방장관에 취임하여 68년 1.21 사태(무장간첩 청와대 습격사건)의 발생으로 장관직을 사퇴할 때까지(5년간) 최장수 장관의 기록을 세웠다. 만약에 1.21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그 기록은 더 연장될 수 있었을 것이다.
국방장관 재임기간 중 가장 큰 이벤트는 해국군의 월남 파병이었다. 1.21사태가 발생했을 때 격분을 했던 나머지 김 장관에게 “포항에 주둔하고 있는 해병사단을 즉각 해주에 상륙시킬 준비를 갖추라!” 는 명령을 내렸던 박 대통령은 김 장관이 1.21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장관직에서 물러나자 청와대에 안보담당 특별보좌관 자리를 신설하여 김 장관을 그 자리에 앉혔었다.
68년 마지막 공직(인보담당특별보좌관)에서 물러난 김 전 장관은 그 후 해군․해병대의 예비역 친목단체인 서해구락부 중앙회 총재, 해병전우회 총재 등의 명예직을 역임했으며, 가까운 시일 내에 출판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는 ‘국방의 멍에’라는 표제의 김 장관 회고록에는 많은 비화가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 1 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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