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역대 해병대사령관

해병대의 명인 제1호 초대사령관 신현준 장군

머린코341(mc341) 2010. 11. 22. 17:08

해병대의 명인 제1호 초대사령관 신현준 장군

 
초대 사령관 중장 신현준
  • 역임기간  1949.4.15 ∼ 1953.10.15
  • 생년월일  1915년 10월 23일
  • 출 생 지  경북 금릉
학 력
1937  만주 군관학교 졸업
         육군대학 수료
1958  미 육군 참모대학 수료
경 력
1946  해군중위 임관
1946  인천기지 사령관
1948  진해 특설기지 참모장
1949  초대 해병대 사령관
1950  인천상륙작전 지휘
1953  해병대 제1여단장
1959  해병 진해기지 사령관
1960  국방장관 특별보좌관
1961  해병중장 예편
상 훈
1950  미 은성훈장
1952  금성을지 무공훈장(′54)
1952  금성충무 무공훈장
1953  은성태극 무공훈장(2회)
1953  은성충무 무공훈장
1953  무성충무 무공훈장

 

만약 공론에 의해 해병대의 명인 제1호를 선정한다면 초대사령관 신현준 장군을 그 대상 인물로 손꼽는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에서 시작된 해병대의 역사가 제일 먼저 해병이 된 그에게서 비롯되고, 또 창설기를 거쳐 6.25전쟁이 끝날 때까지 초대사령관으로서 남긴 공적이 너무나 큰 분이기 때문이다.

 

1915년 경북 금릉군에서 태어나 소시 적에 부모를 따라 만주(滿州)로 이주, 그 곳에서 신경군관학교의 전신인 봉천육군훈련처를 수료(1937년)한 뒤 8.15해방 때까지 만군(滿軍)군관으로 복무(최종계급 대위)했던 그는 46년 5월에 귀국, 그 이듬해 조선해안경비대에 입대하여 준․하사관교육대의 교육주임, 인천기지사령관 및 부산기지사령관을 거쳐 진해 특설기지참모장(통제부의 전신)으로 임명되었는데 통제부참모장(중령) 재임 시인 48년 10월 19일 여순(여수 순천)지구에서 육군14연대에 의한 반란사건이 발생하자 명에 의해 임시함대로 편성된 4척의 함정을 이끌고 출동, 해상으로 도주하는 반란군을 소탕했는데, 임무를 수행한 뒤 결과보고서를 제출할 때 해군 내에 육전을 수행할 수 있는 특수부대의 창설을 건의했던 것이 해군수뇌부의 마음을 움직여 마침내 수륙양면작전을 수행할 특수부대(해병대)의 창설을 추진하게 되었고, 그러는 과정에서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은 49년 2월 1일 부로 신현준 중령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리하여 명령을 받은 신 사령관은 준하사관교육대에서 교관으로 근무한 통제부교육부장 김성은 중령을 참모장으로 영입하여 해군 내의 여러 부대에서 약 100명의 기간장병을 모집하는 한편 가입대 상태에 있는 해군13기 신병 중에서 300명의 1기 신병을 모집하여 그 해 4월 15일 한랭하고 누추한 덕산비행장 격납고에서 창설식을 거행했다. 창설식 때 신 사령관은 훈시를 통해 장차 국방의 최강부대가 되기 위해서는 일치단결하여 인내심을 가지고 어떠한 난관도 극복해야 하며, 피땀나는 훈련으로 유사시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신 사령관의 그 훈시는 해병대의 전통정신이 된 가족적인 단결심과 인내의 정신, 애민(愛民)정신과 임전무퇴의 정신을 뿌리내리게 함으로써 6.25전쟁과 월남전에서 불패상승의 전통을 수립했다.

 

53년 10월 14일 제2대사령관 김석범 장군에게 지휘권을 이양했던 신현준장군은 부대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예편을 하지 않고 이승만 대통령의 승인 하에 제1전투단을 여단으로 증편하기 위한 편성작업을 추진하여 54년 2월 1일 제1여단장으로 취임하여 1년 간 여단장으로 근무했던 그는 59년 1월 초대 진해기지사령관을 역임할 때까지 육군대학과 3년 간의 합참근무에 이어 미육군대학 과정을 이수했고, 4.19혁명이 일어난 60년 6월 1일 중장의 계급으로 승진하여 허정(許政) 과도정부의 국방장관으로 입각한 이종찬 장군의 특별보좌관직을 거쳐 국방차관으로 임명되었으나 그 이듬해(61) 5.16 군사쿠테타로 인해 7월 4일 부로 예편되어 1년 간 타의(他意)에 의한 미국 유학의 길을 떠났다.

 

 63년부터 7년 간 초대 주 모로코왕국 대사를 역임한 데 이어 세계반공연맹 사무총장을 거쳐 74년 2월 바티칸 교황청 특별전권대사로 임명되어 주 바티칸 한국대사관을 창설했던 신현준 장군은 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한국정부에 사임서를 제출하고 퇴임함으로써 12년 간에 걸친 외교관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곧은 심성(心性)과 청렴결백, 그리고 욕망에 대한 자제력과 정의감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그는 현역시절과 외교관 시절에 다음과 같은 화제를 남겼다.

 

즉 자유당 정부에 의해 3.15부정선거가 획책되고 있던 60년 3월 1일 진해 해병교육기지사령부 광장에서는 전장병이 도열한 가운데 3.1절 기념식이 거행되었는데. 그 때 기념사를 하는 자리에서 신 사령관은 그 당시의 시국 하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다음과 같은 발언, 즉 “나라의 정권이라는 것은 필요에 따라서 교체될 수도 있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하여 요 감시 인물이 된 적이 있었으며, 제2공화국이 출범한 직후 장 면 총리가 허 정 과도정부의 국방차관직을 맡았던 신 장군에게 해군참모총장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자 신 장군은 겸손하고 정중하게 거절을 했고, 거절을 당한 장 총리는 ”벼슬을 주려고 하는데 마다하는 사람은 세상에 처음 보았다“고 하면서 유감스럽기는 하나 이 또한 아름답고 좋은 일이라며 칭찬해 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장 면 박사는 52년 신 장군이 천주교에 귀이할 때 대부<代父>를 서 준 대부와 대자<代子>관계였다. 또한 유신체제가 지속되고 있던 74년 8월 하순 구미(歐美)공관장 회의에 참석했던 신현준 교황청 주재대사는 회의가 끝난 후 청와대 별실에서 대통령과 공관장들이 담소를 나누는 자리에서 5.16군사혁명 후 특히 천주교에 대한 사찰과 성직자의 불법 연행과 감금 및 고문행위가 자행되어 성직자들의 반발과 비판이 거세게 일고 있고 바티칸 왕국에서도 매우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시정해 달라고 진언함으로써 실내의 분위기를 얼어붙게 한 일도 있었다.(8.15후 북평에서 광복군을 편성할 때 신현준 대위는 평진대대의 대대장이었고 만군 후배인 박정희중위는 제2중대장이었다)

 

영욕(榮辱)과 관련된 일이지만 5.16 미명, 그 동안 충성스럽게 육성해 왔던 해병대 병력 중의 일부가 혁명 거사(擧事)에 가담했을 때 신현준 장군은 남다른 충격과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고, 73년 10월 10일 그로 인해 토사구팽(免死狗烹)을 다하듯이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되었을 때는 그 아픔이 더욱 크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99년에 발간된 졸저(拙著)해병대 창설50주년 기념도서 ‘빨간명찰’ 축사에서 신현준 장군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의 그 지난(至難)했던 시기에 해군의 미래와 조국의 국방을 위해 해병대를 창설한 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蓀元一)제독의 공덕은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것“이란 말을 남겼다.

 

일찍이 두 영식으로 하여금 해병대의 혈통을 잇게 했던 신 장군은 몇해 전 상배를 하는 슬픔을 겪었으며, 현재 자녀들이 거주하고 있는 미국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誓山誓海都有限(서산서해도유한) ”산을 두고 맹서하고 바다를 두고 맹서해도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이 글귀는 89년에 발간된 신현준 장군의 저서 ‘老海兵의 回顧錄’의 말미에 적혀 있는 글귀이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 1 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