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솔산 탈환작전을 지휘한 제3대사령관 김대식 장군
- 3대 사령관 중장 김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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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임기간 1957.9.4 ∼ 1960.6.25
- 생년월일 1918년 8월 21일
- 출 생 지 강원 화천
- 학 력
- 1936 춘천고보 졸업
- 1956 육군대학교 수료
- 경 력
- 1946 해군소위 임관
- 1950 해병 제5대대장
- 1953 해병 교육단장
- 1954 해병대 제1여단장
- 1955 초대 해병대 1사단장
- 1957 제3대 해병대 사령관
- 1960 해병중장 예편
- 1950 해병 제5대대장
- 상 훈
- 1951 미 은성무공훈장
- 1952 금성을지 무공훈장(2회)
- 1952 금성충무 무공훈장
- 1956 금성충무 무공훈장
- 1956 은성을지 무공훈장
- 1952 금성을지 무공훈장(2회)
온화하고 인자한 성품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는 제3대사경관 김대식 장군은 해병제1연대 장병들이 전승의 금자탑(金字塔)을 세운 도솔산 탈환작전을 지휘하여 용명을 떨친 덕장이다.
1918년 강원도 평강에서 출생하여 소시적에 만주로 건너가 만군에 입대, 8.15 해방 때까지 한국인만으로 편성된 간도성 특설대(훈련소)의 간부요원(준사관)으로 복무했던 그는 46년 귀국과 동시에 해안경비대에 입대하여 해군본부 인사국장을 거쳐 50년 9월 해병대로 전입, 수도탈환작전 때 수색에서 독립5대대를 편성할 때(50.9.26) 독립5대대장으로 임명되어 수도탈환작전과 북한강지역 차단작전에 참가한 데 이어 북진시 고성 간성지구 전투와 검산령(劍山嶺)에서의 우군 철수엄호작전 및 유엔군의 흥남철수작전 기간 중 함흥방어전을 수행한 연후에 12월5일 미군 수송기 편으로 연포비행장에서 수영비행장으로 철수했다.
51년 5월 제1연대장으로 임명되었던 그는 1연대를 지휘하여 난공불락의 천연요새인 도솔산지구를 탈환하여 전승의 금자탑(金字塔)을 세웠다. “우리가 해내지 못하면 누가 이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이 말은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첫 공격에 실패한 미 해병5연대와 임무를 교대할 때 예하부대 지휘관들에게 비장한 어조로 한 훈시의 첫마디였다.
자애로운 성품을 지니고 있던 그는 17일 간의 전투기간 중 연일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연대본부 인사참모 조중차 중위에게 “오늘은 사상자가 몇 명이나 되지?”하며 안타까워했고, 전투가 끝난 후 연대의 전초진지가 설치된 도솔산(22목표)을 시찰했던 그는 9중대장 강복구 중위가 대원들이 고지 아래에서 길러온 생수를 야전컵에 담와 권하자 “괜찮아, 나는 내려가서 마시면 될테니...”하며 사양을 했다는 얘기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도솔산지구 탈환작전에서 발생한 1연대의 사상자 수는 약 7백 명에 달하였다.)
도솔산 탈환작전 40여일 후에 수행된 924고지 탈환 때 김대식 대령은, 작전 초일 3대대 고문관 멕가웨이 중위와 11중대 지역에서 전황을 살피고 있던 중 때마침 들것에 부상병을 싣고 가리마 같은 산길을 내려오는 KSC(민간인 노무자)에게 길을 비켜주는 순간 풀밭에 매설해 놓은 지뢰를 터뜨린 M중위와 함께 쓰러져 후송을 당했는데 그때 헬기로 후송된 연대장은 중상은 아니었지만 들것에 실려 하산했던 M중위는 출혈이 심해 야전병원에 후송되기 전에 절명하고 말았다.
휴전 후 교육단장 참모장 겸 부사령관을 거쳐 57년 9월 4일 제3대 사령관에 취임했던 김대식 사령관은 2년 중임(重任)을 하게 되었으나 중임하는 과정에서 4.19혁명이 일어나는 바람에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로 망명한 직후 중임 임기를 못다 마친 상태에서 도의적인 책을을 지고 사령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는데, 고별방문차 내려갔던 포항에서 사단장 김동하 소장이 자신의 인격을 모독하는 바람에 항의성 발언을 하자 그것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이종찬 국방장관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게 됨으로써 김동하 장군이 국방부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해임을 당해 군복을 벗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얘기는 김동하 장군편(제2권에 수록)에서 언급이 된다.
한편 민주당 정부가 출범시킨 제2공화국 때 춘천에서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이 되었던 김대식 장군은 불과 8개월 후 김동하 장군이 거사에 가담했던 5.16군사쿠데타로 인해 정치인의 뜻을 제대로 펴 보지를 못했다.
그 후(74년)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미국에 본부를 둔 세계적인 반공(反共)단체인 십자군(十字軍)연맹 한국본부장으로 취임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한 마지막 봉사하는 각오 하에 휴전선 근처나 도서지방 등의 취약지에 산재하고 있는 250여 개소의 빈약한 교회에 그 당시의 금액으로 월 1만원씩의 보조금을 보내어 그 교회들로 하여금 반공십자군으로서의 분발을 하게 했고, 그 후 한동안 홀트 아동복지회의 재단이사장으로 재임한 적도 있었던 그는 99년 노환으로 타계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 1 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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