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편 후 문학박사 된 제5대사령관 김두찬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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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대 사령관 중장 김두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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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임기간 1962.7.1 ∼ 1964.7.11
- 생년월일 1919년 3월 8일
- 출 생 지 평남 강동
- 학 력
- 1952 육군대학 수료
- 1966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수료
- 1988 단국대학교 국문학 박사
- 1966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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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 력
- 1946 해군소위 임관
- 1954 해병대 제1연대장
- 1960 해병대 제1사단장
- 1961 해병대 부사령관
- 1962 제5대 해병대 사령관
- 1964 해병중장 예편
- 1954 해병대 제1연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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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 훈
- 1952 금성을지 무공훈장
- 1952 은성을지 무공훈장
- 1953 금성충무 무공훈장(2회)
- 1954 금성화랑 무공훈장(2회)
- 1956 미 동성훈장
- 1959 국방부장관 표창
- 1952 은성을지 무공훈장
6‧25전쟁기간 중 일선부대의 지휘관으로서 작전을 지휘한 경력을 갖지 못한 제5대사령관 김두찬 장군은 휴전 후 교육단장과 사단장 및 사령관 재임기간 중 특히 행정쇄신을 통한 업무의 능률화와 출동준비태세의 확립을 위해 큰 업적을 남겼으며, 항일투쟁(겸이포제련소 폭파모의사건의 주범)을 한 독립운동가로서 국가로부터 예우를 받고 있는 그는, 예편 후 10년 간의 공직에서 물러난 뒤 8년간의 만학 끝에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무와 문을 겸무한 존경스러운 인물이다.
1919년 평양에서 출생하여 숭실중학교를 거쳐 일본 명치대학 법학부에 진학했던 그는 2학년 때 겸이포(황해도에 있는 일본인 제련소) 폭파 모의 사건에 연루되어 해주형무소에서 2년 간 옥고를 치렀으며,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 시절에 통위부(統衛部) 참위(소위)로 임관했으나 보직받은 경리직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 관직을 반납하고 육사1기로 입교하여 소정의 과정을 이수하는 도중 해군에 전입, 6‧25전쟁 발발 시 묵호기지사령관(소령)으로 있다가 철수하는 과정에서 해병대로 전입, 사령부 정보참모, 1연대 부연대장을 거쳐 휴전 전 도서부대장을 역임했다.
휴전 후 교육단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김 장군은 특히 하사관학교에 타자교육대를 신설하여 기술요원 양성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다량의 타자기를 확보하여 위관급 이하의 행정 실무장병들로 하여금 타자기술을 습득케 했고, 일정 수준의 타자기술 보유자에게는 근무평가에 영향을 주는 고과점수를 부여하는 제도를 시행함으로써 행정업무의 처리능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그는 우수한 지원병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당시 상남(上南)에 영화제작소를 두고 있던 미국공보원에 요청하여 해병대의 신병훈련소 생활을 소개하는 ‘해병의 하루’라는 제목의 문화영화(상영시간 30분)를 제작, 그 필름을 공급받아 모병선전공작용으로 활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사단장 재임 시에는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대처할 수 있는 만반의 태세 확립을 위해 해병대에선 처음으로 밀림지 작전에 유용한 산악훈련장을 개설하여 전 장병이 이 훈련에 정진하도록 했고, 특히 사령관 임기 중에는 처음으로 행정백서를 편찬한 것을 비롯해서 하명(下命)이 유할 시 언제 어떠한 해안에도 상륙할 수 있도록 북한지역 해안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연구를 실시했다.
9‧28수복 13주년 기념일인 63년 9월 28일 사령부 광장에서는 김두찬 사령관 이하 사령부에 근무하는 전 장병이 참석한 가운데 전시와 전후에 해병대의 발전을 위해 기여한 7명의 유공 인사에게 명예해병증을 교부하고 기념메달을 증정하는 기념식이 거행되었는데, 그것이 효시가 되어 그 명예해병증은 그 후에도 2~3명의 특별한 유공 인사에게 수여되었으나 73년 10월 10일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된 뒤로는 단절되고 말았다.
64년 7월 1일 제5대사령관의 임기를 마치고 예편했던 김 장군은 그로부터 약 10년 간 충주비료(주)의 고문, 대한조선공사 사장, (주)한성 사장 등을 역임했는데, 특히 4년 간의 대한조선공사 사장 재임 시에는 조선기술을 향상시켜 유사이래 처음으로 국제입찰에 응한 끝에 20척의 선박을 수주국인 대만에 수출하는 실적을 기록했고, 또한 3년 간에 걸친 방대한 자료수집 끝에 조선공사 창설이래 처음으로 ’한국 조선공사 30년사‘를 발간했다.
한편 중학교 때부터 자학(字學)과 국어학의 고전(古典) 연구에 뜻을 품어왔던 그는 ‘70년도에 이르러 한국어문학회(당시 이사장 이희승 박사)에 입회하면서부터 결심을 굳혀 일제 때 명치대학 법학부 2년을 수료한 학력을 가지고 국제대학(현 경기대) 3년에 편입하여 학사과정을 이수한 다음 단국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자신이 연구과제로 삼은 고려판 남명집(南明集)의 구결(口訣) 연구에 몰두한 끝에 마침내 학문세계에 길이 빛날 금자탑(金字塔)을 세웠다. 그 고려판 남명집은 고려시대에 간행된 불경이며 구결이란 한자(漢字)로 된 그 불경 경문 사이에 적혀 있는 약호(부호)로 된 토를 말함인데, 한글 창제 이전의 우리말의 실상을 추출하는데 기여한 그 구결 연구과정에서 김 장군은 87개나 되는 새로운 형태의 구결을 찾아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 장군이 독립유공자로 확정되어 국가로부터 영예로운 예우를 받게 된 것은 ‘75년 원호처에서 공고한 마지막 심사라는 신문공고문을 보고 치안국으로 가서 협조를 의뢰한 끝에 천만뜻밖에도 총독부 문서보관 창고에서 그 문제의 재판 기록문건을 찾아내어 지문조회를 거쳐 사본을 떼어 신청을 함으로써 심사에 통과되었기 때문이며 그 사건(겸이포 제련소 폭파 모의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사람은 8명의 주모자 가운데 오직 김 장군 한사람 뿐이었다.(그 사건은 1920년에 발생한 겸이포 제철소 폭파사건과는 다른 사건이다.)
김두찬 장군의 모교인 숭실중학교(평양) 교지(校誌) 崇實活泉(숭실활천) 제15호(발행연월일 소화10년=서기 1935년 10월 30일) 132쪽에 보면 기미년(1919년)에 태어난 김 장군이 중학교 5학년 때 지은 ‘古城의 폐허’라는 제목의 시가 게재되어 있고, 133쪽에는 동창동급생인 시인 윤동주(尹東柱)의 시 한 수(제목-空想)가 실려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1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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