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회의 법사위원장 역임한 제7대사령관 해병대장 강기천 장군
7대 사령관 대장 강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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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임기간 1966.7.1 ∼ 1969.7.1
- 생년월일 1927년 11월 11일
- 출 생 지 전남 영암
- 학 력
- 1957 육군대학 수료
- 1960 국방대학원 수료
- 1967 마산대학교 법정학사
- 1967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수료
- 1960 국방대학원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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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 력
- 1946 해군소위 임관
- 1949 해군 신병규욱대장
- 1952 해병대 제1연대 5대대장
- 1955 해병대 제1사단 2연대장
- 1966 제7대 해병대 사령관
- 1969 해병대장 예편
- 1949 해군 신병규욱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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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 훈
- 1952 무성을지 무공훈장
- 1952 은성충무 무공훈장
- 1952 금성충무 무공훈장(2회)
- 1953 은성충무 무공훈장
- 1952 은성충무 무공훈장
제7대 사령관 강기천 장군은 5‧16혁명주체세력이 아니면서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최고위원겸 법제사법위원장을 역임하며 혁명과입 완수를 위해 소신껏 기여했으며, 특히 최고회의 법사위원장 재임 시인 63년 5월에는 기존의 국군조직법을 개정하여 해병대사령관을 합동참모회의의 정식구성원이 되게 함으로써 해병대 사령관이 국방부에서 개최하는 군무회의에 참석하여 해병대와 관련된 사항에 대한 발언권과 표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를 마련하는 등 해병대사령관의 위상 격상을 위해 큰 역할을 했다.
1926년 전남 영암에서 출생하여 일제 때 일본 해군에서 복무했던 강기천 장군은 해방 후 해군의 전선인 해방병단(海防兵團) 간부요원으로 입대하여 그 해(46년) 10월 소위로 임관한 후 소해정 302호 부장, 310호 정장을 거쳐 신병교육대장으로 근무하던 중 6‧25전쟁이 일어나자 명령에 따라 신병교육대를 전투부대로 개편, 부산으로 출동하여 항만경비임무를 수행하다가 7월 중순경 포항경비부에서 해군육전대로 개편되어 8월 20일 육전대의 해체 시까지 육전대를 지휘한 다음 훈련소로 복귀했다. 그 후 약 6개월 간의 백령도주둔부대장을 거쳐 해병대로 전입(52.2)했던 그는 휴전이 될 때까지 해병제1전투단 작전참모 5대대장 사령부 인사국장을 역임했다.
강 장군이 최고회의의 최고위원 겸 법제사법위원장으로 임명된 것은 그가 사령부 행정참모부장으로 있을 때였으며, 정치분야까지 관장하고 있던 그는, 특히 군정(軍政) 연장과 관련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3‧16성명으로 촉발된 정국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재야 정치인들과의 접촉과정에서 원만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러한 파동 끝에 63년 10월 15일 민정 이양을 위한 대통령 선거가 시행되어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었다.
한편 최고회의 법사위원장 재임기간 중 강기천 장군은 가정법원의 설치와 서울지방법원을 서울민사지방법원과 형사지방법원으로 분리시킨 일 외에 ‘54년 10월에 편찬한 대한민국의 구법제(舊法制)를 비롯, 일제시대와 미 군정 때의 법령들이 그대로 수록되어 있는 법령집을 12권으로 된 ’대한민국현행법령집‘으로 편찬하는 데 기여를 했고, 그 때까지 62세로 돼 있던 교육공무원의 정년을 65세로 연장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고회의가 해산된(63.12) 그 이듬해 5월 1일부로 소장으로 승진했던 강 장군은 박 대통령의 특명으로 약 4주 간에 걸쳐 이스라엘파 자유월남공화국을 극비리에 방문했는데, 이스라엘을 방문한 목적은 이스라엘 대사관의 서울 개설문제와 그와 관련된 중동지역에 대한 객관적인 정세분석을 하기 위함이었고, 월남을 방문한 목적은 한국군의 파병요청과 관련된 문제를 타진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그와 같은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왔던 그는 곧 해병제1사단장으로 임명되어 월남방문 기간 중 확보한 특수전과 관련된 사진과 자신이 직접 견문했던 지식을 활용하여 특수교육을 위한 교육장을 만들어 파월에 대비한 철저한 교육에 임했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두주(斗酒)를 불사한 적도 있었던 그는 관련 주류회사에서 부대 인근 도로변에 세워 놓은 ‘神仙燒酒(신선소주)’의 대형 입간판을 장병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제거하고 그 자리에 ‘出戰準備(출전준비)’라고 쓴 입간판을 세워 주목을 끌었었다.
그 해(65년) 9월 20일에 결단하여 10월 3일에 출국했던 청룡부대가 투이호지구에서 청룡1호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66년 3월 하순경 강기천 사단장은 영일군으로부터 무상으로 임대받은 임야를 개간하여 월남전에서 중상을 입은 1‧2급 중상자와 그들의 가족이 함께 입주할 ‘새마을’로 이름한 자활복지촌의 건립을 추진한 끝에 66년에서 68년까지 단계적으로 30동을 건립했다.
그리고 그 새마을의 건립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현판과 탑에 새길 글씨를 휘호해 주고 금일봉도 하사했는데, 필자는 그 후(70년대 초) 박 대통령에 의해 점화된 그 요원의 불길 같은 새마을운동이 그 새마을(전상자자활촌)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 보게 된다.
또한 사령관 재임기간 중 강기천 장군은 서울지구의 무주택 장교들과 가족을 서울에 두고 전후방 부대에서 근무하는 장교들을 위해 사당동에 소재하는 개인 소유의 임야를 대지로 조성해 주는 조건으로 필요한 만큼의 대지를 확보하는 한편 주택금고로부터 대부받은 기금으로 총 100동의 주택(대지45평, 건평25평)을 건립함으로써 무주택 장교들과 가족들에게 큰 덕을 베풀었다. 지금은 그 주택단지가 고층건물로 변해있다.
‘69년 3월 하순경 인천에서 진해만에 이르는 해상에서는 한‧영 양국 해병대에 의한 사상 초유의 수직상륙훈련이 실시되었는데, 2개 대대의 혼성상륙군 병력과 1척의 헬리콥터 항공모함(영국 극동함대소속) 및 2척의 한‧영 구축함이 동원된 그 훈련은 강 장군이 박 대통령의 특명으로 이스라엘을 방문할 때 잠시 기착했던 홍콩에서 우연히 회동하게 된 극동군사령관에게 개인적인 희망사항으로 언급했던 것을 사령관 시절에 성사시켰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69년 1월 중순경 정부에서는 해군총장 김영관 중장과 공군총장 김성룡 중장, 해병대사령관 강기천 중장을 대장으로 승진시키는 인사조치를 공표했는데 그러한 보도가 있자 군 내부의 일각에서는 강기천 사령관 때문에 해‧공군 총장이 대장이 되었다는 말을 한 사람이 있었을 정도로 강 장군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임이 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69년 7월 1일 7대 사령관의 임기를 마치고 예편했던 강 장군은 그 후 대한석탄공사 총재, 한국레크리에이션협회 총재, 한국유스호스텔협회 회장, 제9대 국회의원, 영남화학주식회사 사장, 한국‧이스라엘 친선협회 회장, 진주강치 중앙총회장, 민족중흥회 고문, 재향군인회 고문, 한일협력위원회 상임위원, 한일협회 고문, 성우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는 가운데 많은 경륜을 쌓았으며, 9대국회 임기 중(77.10.5) 대정부 질의를 통해 우리의 생존 유지를 위해 북한이 핵무기를 선제독점 하기 전에 전쟁억지수단으로서의 전술핵무기 개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주목을 끌었던 그 놀라운 발언은 선견지명이 있는 용기있는 발언으로 기억되고 있다. ’95년 강기천 장군은 ‘나의 인생여로’라는 표제의 회고록을 발간하여(계몽사 간) 화제를 모았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 1 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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