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의 후방개척자 제2대사령관 김석범 장군
- 2대 사령관 중장 김석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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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임기간 1953.10.15 ∼ 1957.9.4
- 생년월일 1914년 11월 12일
- 출 생 지 평남 강서
- 학 력
- 1934 만주 신경사범학교 졸업
- 1937 만주군관학교 졸업
- 1953 육군대학교 수료
- 1958 국방대학원 수료
- 1937 만주군관학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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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 력
- 1946 해군중위 임관
- 1949 해군통제부 작전부장
- 1952 해병대 제1전투단장
- 1952 해병대 부사령관
- 1953 제2대 해병대 사령관
- 1958 국방장관 특별보자관
- 1960 해병중장 예편
- 1949 해군통제부 작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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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 훈
- 1950 미 동성훈장(′52)
- 1952 금성을지 무공훈장(3회)
- 1952 금성충무 무공훈장
- 1953 무성태극 무공훈장
- 1952 금성을지 무공훈장(3회)
51년 10월 준장의 계급으로 해군에서 해병대로 전입했던 제2대 사령관 김석범 장군은 6.25전쟁기간 중 전선에서 근무한 기간은 약 7개월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후방에서 근무하며 전투부대에 대한 행정적인 지원을 했고, 특히 휴전 후인 53년 10월 15일 제2대 사령관으로 취임한 후에는 휴전 후의 부대 증편과 그에 따르는 부지 및 시설물 확충을 위해 비상한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해병대의 후방 개척자’라는 평을 듣고 있는 인물이다.
1915년 평남 강서에서 출생하여 일제 때 신경군관학교의 전신인 봉천육군훈련처(5기)와 일본 육사를 차례로 거쳐 8.15 해방 때까지 만군(滿軍) 군관으로 복무(최종계급 중위)타가 월남, 46년 1월 해안경비대에 입대하여 6.25전쟁 기간 중 통제부방어사령관을 거쳐 51년 10월 준장의 계급으로 해병대에 전입했다.
그리하여 중동부전선에서 작전 중에 있던 해병제1연대가 서부전선(장단지구)으로 이동한 직후(52.4) 김동하 대령과 임무를 교대하여 강등(降等)을 한 것처럼 대령 계급장을 달고 연대(그 해 10월 1일 부로 제1전투단으로 승격)를 지휘했는데 그렇게 된 까닭은 연대장(또는 전투단장)의 편제상의 TO가 대령이었기 때문이며, 준장의 계급을 유지할 경우 배속부대인 미 해병사단측에서 지휘권을 행사하는 데 그만큼 부담이 따를 수가 있어 강력히 반대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남달리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는 작전계획서를 세심하게 검토하고 점검하는 노력과는 달리 포로 획득을 위한 예하부대의 기습전이 번번이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그해 10월 2일 밤에 강행된 중공군의 1차 추기공세 때는 우일선 대대(1대대)의 최전방 전초진지인 36고지와 67고지, 그리고 좌일선 대대의 87고지를 피탈당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어 67고지에 대한 6차에 걸친 역습전이 실패한 후(10.16) 전투단장 자리에서 물러나는 불운을 겪었다.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된 요인은 해병제1연대가 중동부전선으로부터 장단지구 전선으로 이동한 직후 중공군의 탐색전이 빈발하자 전초진지와 주저항선 부대에서 걸핏하면 적 기습부대의 규모를 과장하며 해포대(해병제1연대의 포병대대.105밀리포)에 지원사격을 요청하는 바람에 포탄이 동이나 포탄을 절약하라는 지원부대(미 해병사단)의 요청에 따라 앞으로는 전투단장의 승인이 없는 한 “보병대대의 화력만으로 적을 격퇴시키라”는 지시를 내리게 되었는데 그것이 화근이 되어 추석 전날 밤 8시 15분부터 15분 간 중공군 포대에서 대대적인 공격 지원사격을 가하고 있었는데도 문제의 그 지시 때문에 해포대에서 적군의 예상 접근로에 적시에 탄막사격을 가하지 않음으로해서 집중 포격에 이은 중공군의 돌격부대에 의해 조그마한 무덤과 같은 그 3개의 전초진지가 점령당하게 된 것이 없다.
당시의 1대대장 함덕창 소령은 “대부대의 적이 투입이 되었는데 어떻게 보병대대의 화력만으로 대처할 수 있겠는가!” 하며 탁자를 치며 울분을 토로했었다.(3개의 최전방 전초진지를 잃게 되자 전투단 본부에선 부대교대를 단행, 전투단의 외곽전초선을 후퇴시켜 적의 재공격에 대비했는데 그 뒷 이야기는 김성은 장군 편에서 언급이 된다.
53년 10월 부사령관을 거쳐 제2대 사령관으로 취임했던 김석범 장군은 용산고등학교 뒷편 언덕 위에 마련된 부지에 해병대사령부의 신청사를 건립할 때 ‘김 해병’이란 별명을 얻게 되는 다음과 같은 화제를 남겼다. 즉 부산에서 상경하여 잠시 서울에서 머물고 있던 어느 날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정지작업을 하고 있는 불도저 근처에 서서 말없이 작업의 진척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뒤늦게 현장에 나타난 현장감독관(공병장교)가 그를 작업장의 사병으로 착각하고 “어-이, 거기 서 있는 해병, 이리 와!”하고 소리를 쳤던 것이 화제가 되어 그런 별명이 붙게 된 것이었다.
57년 9월 14일 제3대사령관 김대식 장군에게 지휘권을 이양하고 14년 간의 군대생활을 하직했던 김석범 장군은 예편과 동시 창군 원로의 일원으로 재향군인회 회관 건립을 하는데 있어 토지의 확보 및 법안의 초안과 심의는 물론 그 법안이 국회를 통과할 때까지 산파(産婆)적인 역할을 했고, 또 5.16 후의 재향군인회 재건을 위해서도 발기인의 일원으로 활약, 8년 간을 계속 상임부회장으로 재임하면서 향군의 조직강화와 발전을 위해 기여했다.
또한 70년부터 2년 간 중앙청 행정개혁조직위원회의 부회장을 맡으면서 일선 행정기관의 사무 간소화와 민원서류의 간소화를 위해 이바지했던 그는, 생계가 어려운 장성들을 돕기 위해 설립한 상무재단(尙武財團)의 설립(67년)을 위해서도 적극적인 기여를 한 분으로 기억되고 있다. 90년 노환으로 타계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 1 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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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해군 중위, 진해통제부 참모장, 해병으로 전속 해병1여단장, 해병대 부사령관·사령관, 국방대학원수료, 국방장관 특별보좌관, 해병대 중장예편, 향군회 부회장, 한국기계 사장, 세계향군연총회 한국대표, 상무재단 이사, 성우구 부회장, 해병장학회 회장, 행개위 부위장
상:태극·을지무공훈장, 미동성훈장, 대통령표창
● 한문 : 金錫範
● 생몰연대 : 1914.11.12-1998.2.18
● 출신지역 : 평남 강서
● 최종계급 : 해병 중장
● 상훈내용 : 태극무공훈장
● 참고문헌 :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상 세 설 명
※약력
*1914. 11 평남 강서 출생
*1946. 5 해군 참위(소위) 임관
*1949. 2 진해통제부 참모장
*1950. 8 진해통제부 방위사령관
*1951. 7 해병대 전입
*1952. 9 해병 제 1연대장
*1952. 10 해병대 부사령관
*1953. 10 해병대사령관
*1960. 6 예편(해병 중장)
*1998. 2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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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1914-1998)
1914년 11월 12일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에서 출생한 김석범(金錫範) 해병 중장은 만주로 건너가 1934년 신경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조국의 광복과 함께 만주로부터 귀국하여 1946년 해군에 입대하였다. 그 해 5월 특임으로 해군 참위(소위, 군번 80089)로 임관하였으며, 1949년 2월 1일 해병대 창설임무를 띠고 이임한 신현준 중령의 후임으로 해군 진해통제부 작전부장 및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서울을 탈환한 뒤 그의 출신을 고려하여 손원일 제독이 해병대로 전과할 것을 권유하자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1951년 7월 해병대로 전입, 해병대의 일원으로 본격적인 전투임무에 참여하게 되었다. 1952년 9월 5일 해병 준장의 계급으로 제1전투단장에 임명된 그는 수도권 방어를 위한 장단, 사천강지구전투에서 수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파상공격을 저지.격멸하였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어 전쟁이 일단 막을 내리자 그는 초대사령관 신현준 장군에 이어 해병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57년 9월 4일 해병대사령관직을 김대식 장군에게 인계하고 1960년 6월 25일 현역에서 물러난 김석범 해병 중장은 재향군인회의 창설에 참여하여 부회장으로 창설의 산파역을 담당하였다. 1962년 한국기계 사장과 성우구락부 부회장을 지낸 그는 1969년부터 2년간 중앙청 행정개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봉직하면서 일선 행정기관의 사무간소화와 민원서류의 간소화 등 행정 전반에 걸친 개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98년 2월 18일 향년 83세를 일기로 타계한 그의 유해는 대전국립현충원 장군묘역 [1-71]에 안장되었다. 장군은 생전의 활동으로 태극무공훈장을 비롯한 을지무공훈장, 미국 동성훈장 등 수많은 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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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적
해병대사령관 김석범 해병 소장은 1951년 10월 4일부터 1954년 3월 31일까지의 기간 중 적의 공세를 여지없이 분쇄하고 전 전선을 제압함으로써 수도방어의 위기를 해소하는 한편 1953년 7월 연천지구전투에서 대승리를 획득하고 강제송환을 원하지 않는 포로의 석방임무를 성공리에 완수하는 전공을 수립함으로써 1954년 4월 15일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159호)을 수여받았다.
해병 제1연대장으로 부임한 김석범 준장은 1952년 9월 5일부터 20일까지 서부전선 사천강(泗川江) 부근의 전진진지인 일명 혼비(魂飛)고지에서 전투를 전개하여 임진강선으로 진출하려는 적의 기도를 분쇄하였다. 인해전술과 포격으로 사천강의 교두보적 역할을 하는 전진진지를 점령하여 주저항선을 위협하려던 적의 기도는 해병 제1연대가 36전진진지를 다시 확보함으로써 끝내 좌절되고 많은 병력의 손실만 입게 되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임진강 북안에서 개성-서울 1번 국도의 방어요지이자 수도권 방어의 전초인 장단지역을 고수하게 되었고, 임진강 이남으로 진출하려던 적의 기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해병 제1연대는 미 해병 제1사단에 배속되어 월산령전투를 마치고 다음해 3월 수도방어의 새로운 임무를 맡아 서부전선으로 이동하였다. 국군 제1사단 15연대로부터 임진강 하류에 있는 전초진지를 인수, 미 제8군의 최좌단 부대로서 미 해병 제1사단에 배속되었다.
제1연대는 미 해병 제5연대와 병행하여 서쪽으로는 임진강 하류까지 10㎞ 지역을 방어하였다. 연대장 김석범 준장은 전방지휘소를 파주군 임진면의 벌판말에 두고 2개 대대를 전방에, 1개 대대를 예비로 하여 연대본부와 ‘자유의 다리’ 일대를 정찰하여 측후방을 경계하였다.
반면 사천강을 사이에 두고 해병 제1연대와 대치한 적은 중공군 제65군으로서 천덕산(203)을 경계로 삼아 제194사단(제582연대)을 아군 우전방대대 정면에, 제195사단 584연대를 아군 좌전방대대 정면에 배치하고 제193사단은 개성 서북쪽에 예비로 확보하고 있었다.
적이 점령하고 있는 지형은 사천강 대안쪽에 있는 비교적 높은 산들이 남북으로 연하여 횡격실을 이루고 있어 사천강 일대의 저지대를 감제하므로 방어에 유리하였다. 반면에 해병 제1연대가 점령하고 있는 전진진지 일대는 155고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표고 50m 미만의 구릉과 전답으로 된 개활지이며, 임진강을 배후로 하여 적의 감제하에 있는 불리한 지형이었다.
8월말로 접어들어 임진강의 수위가 낮아져 도섭이 가능해지자 해병 제1연대장 김석범 준장은 주저항선 부대로 하여금 전초진지를 강화시켰다. 9월 6일 18시 중공군 제582연대 2대대의 증강된 1개 중대가 기습적으로 사천강을 도하하여 적진으로부터 1㎞, 연대 주저항선에서 2.5㎞ 떨어져 있는 제10중대 전초진지를 포위하였다.
도하한 적이 36진지를 포위하자 중대장은 도섭지점에 배치된 잠복정찰조를 철수시켜 사주방어로 진지를 고수하는 한편 연대에 포병지원을 요청하였다. 곧이어 적의 일부가 교통호까지 진입, 피아간에 수류탄 투척에 이어 육박전이 전개되었고, 수적으로 우세한 적이 진지 일각으로 진입하자 중대장은 진내사격을 요청하였다. 잠시 후 전초진지상에 VT탄의 탄우가 집중되자 진내를 장악하려던 적은 순식간에 많은 사상자를 내고 산개하기 시작하였고, 이 때 지하호 속에 대기하고 있던 해병들이 일제히 돌격을 감행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적은 여러 차례에 걸친 파상공격에도 36진지를 점령하지 못하자 공격목표를 제1소대의 37진지로 수정하였으나, 제1소대는 적이 진전에 나타날 때마다 최후저지사격과 포지원사격으로 적의 집결지와 진입로를 차단하였다. 결국 37고지를 공격하던 적은 그간의 전투에서 많은 전력을 소비한 관계로 분산되기 시작하였다.
적이 양개 전초진지를 점령하지 못한 채 철수하려하자 연대장 김석범 준장은 36진지와의 연결과 포위중에 있는 잔적을 격멸하기 위해 제9중대로 하여금 37고지 역습명령을 하달하였다. 이는 진지가 실함될 경우 주저항선이 위협을 받아 연대가 임진강까지 철수해야 하고 인접부대 작전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다. 제9중대장은 7일 03시 전차 1개 소대의 지원하에 1개 소대를 역습부대로 편성하여 36진지로 투입시켜 잔류부대와 함께 잔적을 소탕하였다.
9월 19일 18시 대대 규모의 병력으로 재침한 적은 15시에 36진지 전방에서 소부대를 도하시켜 양동작전을 전개한 후 18시 30분 주저항선 일대에 포격을 가하고 전초진지에 전차 포격을 집중하면서 2개 중대 규모로 파상공격을 전개하였다.
이에 연대장은 미리 계획된 야간기습작전을 중지하고 제9중대와 제10중대에 측후방을 엄호하도록 하고 제11중대에 접근중인 적에게 일제사격을 실시토록 하였다. 19시 30분 적은 증원부대와 합세하여 포격을 틈타 필사적으로 36진지내로 육박, 처참한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계속해서 증원된 적은 36진지를 포위하고 수 차례의 파상공격으로 진지를 점령하였다. 결국 36진지에는 VT탄 진내사격이 실시되어 진지를 점령했던 적은 많은 손실을 입고 분산되었으나 병력을 증원하여 진지 일각에 압력을 가하였다. 20일 01시 36진지로 출동한 역습부대는 진지 외곽을 포위한 적과 백병전을 전개하여 격퇴하였다.
그러나 패퇴했던 적은 부대를 재편하여 36진지를 다시 공격해왔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역습부대는 8시간 이상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으나 결국 진지를 적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10시 연대장으로부터 진지탈환명령을 받은 제3대대 9중대는 전차 2개 소대의 엄호하에 반격에 나섰다. 중대가 보전협동 돌격을 개시하여 진전까지 진격하는 동안 아군 전폭기는 네이팜탄과 VT탄을 작렬하여 적의 증원부대를 차단하였다.
14시 공격부대는 마침내 36진지를 재탈환함으로써 그 동안 인해전술과 포격으로 사천강의 전초진지를 점령하여 사단 주저항선을 위협하려던 적의 기도를 끝내 좌절시켰다.
이후 연대는 10월초부터 추계공세를 개시한 중공군을 맞아 2차에 걸친 대공세를 물리치면서 전초진지전을 반복하였다. 연대는 진지 일부가 피탈되는 위기를 맞았으나 역습을 전개하여 끝내 진지를 고수하였으며, 그 동안의 전투에서 약 1,550여 명의 적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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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2003
국방부, 자유민에게 전해다오 제1집, 1955
육군본부, 한국의 전쟁영웅들, 1992
이원복, 호국용사100선, 명성출판사, 1976
국방부, 호국의 별 제3집, 1979
포병학교, 포병의 발자취, 1963
병학사, 내 젊음 조국에, 1987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38도선 초기전투: 중동부전선 편, 1982
국방일보,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2002. 11. 9
국방부, 한국전쟁사 제8집, 1975
공군본부, 공군사 제1집
육탄 10용사 현충회, 육탄 10용사, 도서출판 法政, 1986
국방부, 호국의 별, 제6집, 국방부 정훈국, 1982
국방일보, 한국의 전쟁영웅들 (1) 육탄 10용사, 1992. 6. 4
국방부, 호국전몰용사공훈록 제3집,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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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 김석범사령관 생애>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이다. 1934년 중국에서 신경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지금의 선양 지역에 일본이 만주국을 수립하면서 세운 장교 양성 기관인 봉천군관학교에 진학했다. 김석범은 봉천군관학교를 제5기로 졸업하면서 성적이 우수하여 일본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해 수학했다. 일본육사를 1940년 졸업하고 만주군 장교로 임관했다. 만주군으로 복무하는 동안 악랄하게 항일 운동을 탄압했다는 설이 있다.
만주군 상위로 복무하던 중 태평양 전쟁이 종전되어 미군정 지역으로 내려왔다. 1946년 대한민국 해군 중위로 임관하여 해군통제부 참모장과 방위사령관 등을 지냈다. 김석범은 박정희와 정일권, 백선엽, 이한림, 신현준, 원용덕, 김창룡 등이 형성한 국군 내의 대표적인 만주군 인맥이었다.[2] 한국 전쟁 발발 후 손원일의 권유에 따라 해병대로 전과했고, 해병 제1연대장, 해병대 부사령관을 거친 뒤 1953년부터 신현준에 뒤를 이어 약 4년 동안 대한민국 해병대 제2대 사령관을 맡았다.
1953년 육군대학, 1958년 국방대학원을 졸업했고, 김정렬 국방부장관 특별보좌관을 거쳐 1960년에 해병대 중장으로 예편했다. 이후 재향군인회를 창설하여 부회장에 올랐고, 1960년대에 한국기계 사장과 성우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묘지는 대전의 국립현충원에 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장교 부문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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