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6대사령관 공정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18) - 진동리 지구 전투

머린코341(mc341) 2014. 11. 16. 16:27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18) - 진동리 지구 전투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해병대는 그동안 갈고 닦은 체력과 정신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다. 연일 패주하는 육군과 유엔군과는 달리, 나가는 전투마다 대승을 거뒀다. 전쟁 초기부터 ‘귀신 잡는 해병’의 신화를 만들어 나갔다.

 

첫 번째 승리는 8월 1일부터 12일 사이 경남 창원군 진동리에서 거뒀다. 지금은 마산시 합포구로 행정구역이 바뀐 이 지역 전투에서 김성은 부대는 부대원 전원 1계급 특진이라는 진기한 기록을 세웠다.

 

파죽지세처럼 호남지방을 유린하고 경남 진주를 거쳐 고성까지 쳐들어 온 인민군 6사단은 8월을 앞두고 부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낙동강 주 전선보다 상대적으로 허술해 보이는 남해안으로 우회해 통영과 진해를 위협해 왔다.

 

남해안 전선은 미 육군25사단 작전지역이었다. 제주도에서 급거 출동해 마산에 상륙한 김성은 부대는 미 25사단에 작전 배속돼 미군의 지휘를 받게 됐다. 처음 부여된 작전명령은 함안∼진동리 간 도로를 확보하라는 것이었다.

 

국군 최초 전 부대원 1계급 특진

 

8월 1일부터 진주∼마산 국도 진동리 분기점 요소마다 병력을 배치하고 이틀을 잠복 중이던 3일 새벽 3시쯤 도로변 주막에서 여인의 비명소리가 나더니, 곧 차량의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인민군 6사단 정찰대였다.

 

전 대원을 깨워 비상경계에 들어간 해병대는 기척을 죽여 적을 코앞에까지 유인해 일제히 요격을 가했다. 별다른 저항을 받아본 일이 없었던 적은 크게 당황했는지, 어둠 속에서 우왕좌왕 갈팡질팡하다가 궤멸됐다.

 

뒤 이어 본대가 달려왔을 때 해병대는 신속히 철수해 또 다른 매복지에 몸을 숨겼다. 적이 출현하면 또 기습을 가하고 철수하는 기동성이 유감없이 발휘됐다.

 

이 전공은 아군 실종자들에 의해 해군 수뇌부에 즉각 보고됐다. 실종됐던 본부중대장 염태복 상사는 우여곡절 끝에 마산 해군헌병대를 찾아갔는데, 마침 그곳에 나와 있던 통제부사령장관 김성삼 대령에게 상황보고를 하게 됐다.

 

입담이 좋은 염상사의 보고를 받고 흥분한 김 대령은 손원일 참모총장에게 보고했다. 신생 해병대의 첫 전과에 크게 고무된 손 제독은 국방부장관에게 건의해 전 부대원에게 1계급 특진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사기가 오른 김성은 부대는 5일에는 적이 장악한 진동리 전방의 야반산 고지를 육박전으로 공격했다. 구식 소총과 수류탄만으로 전차를 가진 주력부대를 궤멸시켰고, 7일부터는 진동리 북쪽 4km까지 진출한 적을 격퇴하고 마산으로 통하는 도로의 요충지를 완전히 장악했다.

 

통역관 에피소드

 

이 작전에서 미군과의 통역문제에 얽힌 에피소드가 있다.

 

미 25사단에 배속된 김성은 부대에는 통역관이 없어 불편했는데, 민간인 한 사람이 찾아와 통역관 자원봉사를 청했다. 손 제독 처남 홍성은 씨였다. 미국 아메리칸 대학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미 군정청장관 비서실장을 지낸 경력의 소유자였다.

 

미군 참모들과 김성은 부대장 사이에서 통역 서비스를 하던 그는 며칠 후 슬그머니 행방을 감추었다. 격전지를 수행하면서 통역하는 일이 무섭기도 했을 것이다.

 

그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사이 다른 통역관이 나타났다. 미 25사단장 통역관으로 부임하던 현봉학(아주대 명예교수) 씨가 백남표 소령에게 붙잡혀 온 것이다.

 

통역이 없어 갑갑해하던 부대장을 본 백소령은 현씨가 영어를 잘한다는 걸 알고 반강제로 끌고 왔다.해군본부가 제공한 지프를 타고 마산으로 가는 현씨 차를 세우고 검문을 한 것이었다.

 

“수고 많으십니다. 저는 미 25사단장 통역관으로 가는 현봉학이라는 사람입니다.”

 

어디로 가는 누구냐는 물음에 그는 국방부장관 추천서를 내보였다.


현씨는 미국 리치몬드 대학 의학부에서 임상병리학을 전공한 의사였다. 1950년 3월 귀국해 모교 세브란스의대에 국내 최초로 임상병리실을 개설한 그는, 전쟁이 일어나자 통역요원으로 전쟁을 돕자고 결심했다.

 

평소 친분이 있던 황성수 국회부의장 소개로 신성모 국방장관을 찾아갔다. 신장관은 자원봉사를 청하는 기특한 청년을 미 25사단장에게 보내기로 결정, 추천서를 써주어 현지에 부임하도록 편의를 봐주었다.

 

“거기는 안 됩니다. 더 급한 데가 있습니다.”

 

검문을 하던 백남표 소령은 통역관이라는 현봉학 씨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대로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난처한 표정을 짓는 현씨에게 권총을 들이대며 차에 올랐다. 그리고 운전병에게 명령했다.

 

“진동리로 차를 돌려!”

 

그렇게 해서 김성은 부대로 붙잡혀 온 현씨는 해병대 장비 현대화에 큰 공을 세웠다. 그 덕분에 해병대는 통영상륙작전을 잘 수행할 수 있었다.

 

BAR 자동기관총 구입 '일등공신'

 

김성은 부대장은 새로 온 통역관이 내 해사 동기생인 현시학 해군소령의 친형이라는 사실을 알고 더욱 친밀감을 느꼈다. 해병대를 위해 좀 무리한 부탁을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비가 너무 열악하다는 것을 미군 측에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하려고 해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답답했는데, 이제 미군에 사정을 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김부대장은 현학봉 씨에게 오랜 숙원을 설명했다. 미 25사단에 가서 BAR(Browning Automatic Rifle) 자동기관총을 구해 오라는 부탁도 했다.

 

다음 날 아침 현씨는 장교 한 사람과 부대를 나섰다. 장교는 현금이 가득 든 돈 가방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BAR을 구해 오는 ‘사업자금’이라고 했다.

 

“돈은 얼마든지 써요. 그 대신 BAR은 꼭 구해 와야 합니다.”

 

잘 안 될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부대장의 당부가 마음에 걸렸다. 25사단 군수참모를 찾아간 그는 한국 해병대의 사정을 설명하고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재고량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부대장이 돈 가방을 챙겨 준 이유를 그때야 알았다. 군수참모와 그 보좌관을 마산 시내 근사한 요정으로 초대해 밤새도록 ‘주지육림’ 공세를 퍼부었다. 어디서나 그것은 묘약이었다.

 

다음 날 아침 현 씨는 BAR을 원하는 수만큼 얻을 수 있었다. 덤으로 각종 실탄까지 수십 상자를 얻어 트럭에 가득 싣고 돌아왔다.

 

현씨는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미 25사단과 김성은 부대의 협동작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미군 측에서도 그가 사단장 통역관으로 오던 사람이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작전 임무를 척척 수행해 내는 김성은 부대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문제를 삼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의 모세" 현학봉

 

그는 1950년 11월 해병대가 강원도 고성지구에 주둔하고 있을 때, 또 한 차례 종군을 했다. 그 뒤에는 미 10군단 민사부 고문이라는 직함으로 고향인 함흥까지 종군하였다.

 

당시 중공군의 참전으로 중공군 포위망에 갖힌 한·미군 10만 명의 흥남철수작전이 시작되었다. 한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 미 해병1사단과 한국 해병대, 미 육군3사단과 7사단 등 모두 10만여 명이었다. 또한 각종 무기 장비와 보급품을 가지고 나오려면 엄청난 선박이 필요했는데 형편없이 부족했다.

 

거기에 수십만 피난민들이 부두로 몰려들어 온통 흰옷 입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 공산당 색출에 도움을 준 이들은 적치(敵治)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보복을 당할 사람들이었다.

 

찾아와 애타게 매달리는 고향 사람들을 돕고 싶었던 미10군단 민정고문관 현봉학 씨도 애끓는 심정으로 알몬드 미10군단장을 찾았다.

 

“저들은 중공군이 닥치면 바로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함께 철수시켜 주십시오.”

 

“선박이 너무 부족합니다. 미스터 현 못지않게 나도 가슴이 아픕니다.”

 

그런데 문제가 해결되었다. 해결사는 10군단 탑재참모였던 미 해병대 포니(E. Forney) 대령이었다. 그는 현 씨의 간절한 부탁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몬드 장군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장비를 실을 때 빈 공간을 활용하여 탱크나 트럭 밑바닥 그리고 포탑 위에도 실으면 됩니다.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포니 대령이 끈질기게 설득하자 알몬드 장군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이라도 더 찾아 싣고 떠나려는 현 씨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떠날 시간이 임박하자 그는 빠진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려고 시내로 들어갔다. 미국 신부와 경찰서 유치장에 달려가니 피란민 30여 명이 엎드려 기도하고 있었다. 현 씨는 그들을 트럭에 태우고 부두로 달려 아슬아슬하게 배를 탔다.

 

이렇게 구출된 피란민들은 현 씨를 ‘한국의 모세’라고 불렀다.

 

피란민 철수작전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포니 대령은 한국 해병대사령부 수석고문으로 만 2년간 많은 일을 하고 귀국해 장군으로 진급했다.

 

2005년 5월 거제도에서 있었던 흥남철수작전 기념비 제막식 때 포니와 알몬드 장군의 손자들이 참석하여 더욱 의미 있는 행사가 되었다.

 

흥남철수 때 나는 해군 704함 부장으로서 작전의 일익을 담당했다. 해군본부에 타전해 가용한 모든 함정의 급파를 요청했다.

 

“수송선을 전부 보내 달라. 급하다. 빨리 보내달라. 함흥의 피란민들을 실어야 한다. 대부분 기독교인이어서 그냥 두면 모두 적에게 사살된다.”

 

이러한 내용의 전보를 얼마나 쳐 댔는지 모른다. 당시 해군이 보유하던 수송선은 주로 해운공사에서 징발한 LST 단양호 등이 있었는데 수차례의 다급한 전보에 놀랐는지 4~5척의 수송선을 보내 주었다.

 

그래서 보통 400~500여 명이 타는 LST함에 수천 명을 포개듯 실을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실어 가까운 묵호, 삼척, 포항 같은 곳에 내려 주었다.

 

흥남 대탈출작전을 미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저서 『한국전쟁』에서 이렇게 썼다.

 

“10만여 명의 군 병력과, 9만 8천여 명의 피란민, 1만 7천여 대의 차량과 수십만 톤의 화물을 철수시킨 것은 그 자체로 위대한 군사적 승리였다.”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