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6대사령관 공정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19) - 통영상륙작전과 나

머린코341(mc341) 2014. 11. 16. 16:33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19) - 통영상륙작전과 나


진동리 지구 전투에서 해병대의 진면목을 보여준 김성은 부대는 잠시 숨을 돌릴 겨를도 없이 통영상륙작전에 투입됐다. 진해와 부산을 지키기 위한 다급한 작전이었다.


두 번째로 미국에 가서 1950년 7월 25일 PC 704를 인수해 막 돌아온 나는 여장을 풀 겨를도 없이 이 작전에 동원됐다. 한국 해군과 해병대가 합동으로 펼친 최초의 본격 상륙작전이었다.


인민군 6사단이 김성은 부대를 만나 부산으로 가는 길을 저지당하자, 인민군 수뇌부는 7사단으로 하여금 거제도를 거쳐 바로 부산을 공격하는 작전계획을 짰다.


거제도와 육지는 견내량 해협을 사이에 둔 지척의 거리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전승지 견내량 바다는 폭이 300m에 불과한 좁은 물길이다. 거제도를 적에게 내주면 대안인 마산과 진해는 발이 묶이는 신세가 되고 만다.


이것을 노린 인민군의 진로를 막기 위해 미군과 한국 해군은 김성은 부대에 명령을 내렸다.


해군·해병대 합동 첫 상륙작전


김부대장은 즉각 비상소집 명령을 내려 출동준비를 했다.

 
전 장병이 해군 함정 512정과 FS 평택호에 승선을 끝내고 목적지로 출항한 시간은 8월 16일 밤 10시였다. 명령을 받은 지 5시간 만이었다. 미군과의 연합작전이 아니고, 한국군 단독작전이라는 사실이 대원들의 사기를 돋우었다.


그날 오후 1시에는 해군 901정과 302정이 막 통영에 진입한 인민군 27사단 선발대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교전하고 있었다. 전날 경찰군이 통영 길목인 원문고개를 방어하다가 중과부적으로 포기하고 통영을 내주고 말았다. 그냥 버려두면 거제도는 물론이고, 진해와 부산이 어떻게 될지 모를 위기 상황이었다.


8월 17일 아침 7시 통영반도 동북쪽에 있는 지도 섬에 도착한 김부대장은 수색대를 통영반도에 침투시켜 적정을 살피게 했다. 통영 시내에 있는 적 병력은 약 700명, 박격포와 기타 중화기로 무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김부대장은 작전회의를 열어 통영탈환 방법을 의논했다.

 
통영을 직접 공격하는 것보다 통영의 관문인 원문고개를 장악해 후속 부대의 진입을 막아놓고, 공격작전을 펴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이 작전계획을 보고하고 하회를 기다리는 사이, 합동작전을 벌일 해군 함정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적정을 살폈다. 703 함장 이성호 중령은 적이 통영 동북쪽 고지 매일봉에 완강한 방어진지를 구축해 놓았다는 정보를 보내 왔다.


그 사이 해군본부에서는 김 부대장에게 해병대는 물론이고, 합동작전에 동원된 해군 함정 8척까지 통괄 지휘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진동리 전투 전공으로 전 부대원 특진 혜택을 입어 김 부대장이 대령으로 진급했기 때문이다.

 

양동작전 따라 해안으로 적 유인

 
17일 아침 김성은 부대장은 징발한 민간 선박 편으로 부대원들을 통영 외곽 장평리 해안에 상륙시켰다.


김 부대장과 이성호 중령 간에 합의된 양동작전 계획에 따라 해군은 바다에서 통영 남쪽 해안에 함포사격을 퍼부었다. 통영에 상륙하는 양 속여 적을 해안으로 끌어들이면, 해병대는 통영 뒷산 매일봉을 탈환한다는 계획이었다.

 

통영 내항에 접근한 해군 함정들이 해안지대에 함포사격을 퍼붓자 인민군은 시내에 병력을 집중시켰다. 양동작전 계획이 척척 맞아떨어진 것이다.

 

해군이 통영시내에 함포사격을 집중시키는 사이 해병대는 통영 관문인 원문고개를 점령해 버렸다. 허를 찔린 적이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본 김성은 부대는 오리 떼를 몰듯이 적을 몰아붙이면서 소총과 수류탄, 그리고 BAR까지 동원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적은 원문고개를 포기하고 매일봉으로 퇴각했지만 18일 아침 햇살을 등지고 쳐들어온 해병대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도망치는 지프에 집중공격을 가하자 당황한 차가 길섶 고랑에 처박혔다. 차에 탔던 대대장과 작전참모 등 고위 지휘관들의 시신은 벌집 같은 몰골이었다.


해병대 원문고개 점령

 
지휘관들이 사살당하자 전의를 상실한 적군은 후퇴와 도주에 바빴다.

 
정오 무렵부터는 통영 시가전이 시작됐지만 이미 승부는 결정돼 있었다. 오후 4시 무렵 통영시내의 적은 전멸상태였다. 쫓기던 적군들은 작은 어선 3척을 빼앗아 탈출을 시도했으나 해군 504, 312정의 포격을 받고 수장되고 말았다. 6·25전쟁 해병대 5대 전첩 가운데 첫 전첩이 성립된 순간이었다.

 
여기저기 숨어 있던 잔당까지 소탕한 19일 부대장과 해군 함장들, 그리고 경찰서장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이 서로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감격적인 악수를 나눈 이벤트를 마지막으로, 한국 해병대 단독작전인 통영상륙작전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통영작전의 대성공은 밀리기만 하던 아군의 사기를 높여 준 계기가 되었다.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는 계기가 된 것도 이 승리였다는 점에서 통영작전은 전사에 길이 남게 됬다.

 
국민들에게도 청량제 같은 뉴스가 됬다. 연일 계속되는 폭염 아래 아군이 쫒기고 밀린다는 소식만 접해 오던 터에 날아든 이 소식은 무더위를 깨끗이 씻어 주었다.


이제 당분간 마산과 진해를 안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현지 주민들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무엇보다 임시수도 부산의 안전이 담보됐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잇었다.

 
통영상륙작전은 개인적으로 나에게 해병대의 형님이라 할 김성은 장군을 다시 만나는 행운을 제공해 주었다.

 
PC 704함 부장으로 통영작전 지원임무에 동원된 나는 그가 상부의 뜻과 달리 통영의 관문인 원문고개를 장악해 놓고, 이미 통영에 들어갔던 적군을 마치 ‘독 안에 든 쥐‘처럼 몰아붙여 섬멸시키는 신묘한 전술을 보면서 앞으로 큰 일을 할 인문리구나 싶었다.


그 인상은 들어맞아 훗날 해병대사령관과 국방부장관이 돼서도 그는 큰 일을 많이 했다.

 


한국전쟁 최초 2계급 특진, 고종석 2조

 
2계급 특진한 고종석 하사, 군번 8112267, 김성은 부대 소속(해병대 제5대대),


전몰당사 계급은 상병, 전몰일자 1950. 8. 25,  통영 장평리

 
이 작전에서 한국전쟁 최초로 2계급 특진한 전쟁영웅이 탄생했다. 바로 고종석(高鐘碩) 2등병조(하사)다.

 
전투가 끝난 뒤 원문고개를 둘러보던 김 부대장은 가슴을 저미는 광경 앞에 한동안 걸음을 멈추었다. 적군 병사들이 아무렇게나 쓰러져 숨을 거둔 격전의 현장에서 고종석 2등병조의 시신이 발견된 것이다. 목덜미에 자상을 입고 숨을 거둔 그의 시신 옆에는 대검이 꽂힌 M1 소총이 놓여 있었다.


소총 개머리판과 대검에는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선혈이 묻어 있었다. 그 옆에는 두개골이 부서지거나 총검에 가슴을 찔려 죽은 인민군 병사 시신 5구가 널브러져 있었다. 혼자서 다섯 명의 적을 해치우고 장렬한 최후를 맞은 것이었다.

 
김부대장은 수복지 질서 확립이 제일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네 가지 원칙을 하달했다.


부역자는 경찰에 넘기고, 포로는 죽이지 말고, 행정 처리는 통영읍장에게 일임하고, 해병대는 전투에만 전념하라는 것이었다.


20일에는 통영시내 충렬사를 찾아 이순신 장군에게 전승을 보고하는 공식 참배행사를 가졌다. 해병용사들은 충무공 영정 앞에 일제히 거수경례를 올리면서 직속 상관에게 보고하듯이 목청을 높였다.

 
“충무공께 신고합니다. 한국 해군과 해병대가 단독작전으로 통영을 수복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의 영정 속 온화한 웃음이 장병들의 마음을 쓰다듬어 주는 것 같았다.그날 통영 기관장들의 초청을 받은 해군 측 간부들, 이성호 함장을 비롯해 나와 김영관·이맹기·신영철·현시학 소령 등은 모처럼 느긋한 점심식사를 즐겼다. 오랜만에 사관학교 동기생들과 모여 앉은 자리여서 더 유쾌했다.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