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40) - 삶과 죽음의 고비(대전차지뢰 부상)
인명은 재천(在天)이라 한다. 사람 목숨은 하늘에 달렸다는 이 말이 아니면, 그 험한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일을 설명하기 어렵다.
적진에서 날아오는 총탄이나 포탄으로 옆 사람은 쓰러져도 나는 비껴갔으니, 운명이라는 말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열 사람의 병사보다 한 사람의 지휘관 목숨을 노리는 것이 전투의 상식이다. 소대 병력이 포진한 최일선까지 넘나들며 독전을 한 내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은 하늘의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가 탄 차가 대전차 지뢰에 접촉됐어도 나는 살고 다른 사람은 죽었다. 인명이 재천이라는 말밖에는 다른 말이 있을 수 없다.
야간공격으로 목표들을 하나 둘 점령해 나가던 1951년 6월 17일의 일이다. 도솔산 주봉 점령이 19일이었으니 아마 제20목표 전투 때일 것이다. 나는 도솔산 주봉 산기슭에 있는 후방 CP에 들러 보급품 지급과 확보 현황을 체크하고 전방 CP를 향해 바쁜 길을 재촉했다. 늘 하던 대로 나는 앞자리에 타고 뒷자리에 전령이 탔다.
지프는 길도 없는 험한 산길을 힘겹게 올라가고 있었다. 어서 목적지에 도착해 전방 상황을 살피고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할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그런 순간 갑자기 “콰광”소리가 들리면서, 몸이 허공으로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계곡 바위틈 서너 뼘 넓이의 흙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엉덩이 근처가 못 견디게 아팠다. 손을 들어 머리부터 만져보았다. 팔 다리도 더듬어 보았다. 괜찮은 것 같았다. 그러나 엉덩이 통증은 너무 심했다.
가까스로 몸을 추슬러 엉금엉금 기다시피 계곡을 빠져나와 보니, 내 차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앞부분이 완전히 해체된 듯, 엔진이 날아가 버리고 없었다. 아픔을 참고 주변을 찾아보았다.
대전차 지뢰에 의한 부상으로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고 있다.
30m 쯤 떨어진 곳에 전령이 쓰러져 있었다.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내 차가 대전차 지뢰를 밟은 것이다. 나는 대퇴부에 파편을 맞았다. 전령은 치명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내 뒤를 따르던 3대대 트럭도 대전차 지뢰에 접촉됐다. 그 차에는 10여 명의 병력이 타고 있어 인명피해가 많았다.
연대 의무실에서 응급수술을 받고 파편은 제거했지만, 고막 파열은 불치병이 됐다. 야전침대에 누워 있는데 전령이 들어와 후송차가 왔다고 보고했다.
“누가 후송간다고 했나? 난 여기 있을 테니 차는 돌려보내도록 .”
나는 후송을 거부했다. 도솔산 주봉을 눈앞에 두고 있는 때에 대대장이 없으면 작전의 속도는 그만큼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전투 일선 지휘관들과 장병들의 긴장도 느슨해질 것이고 통신과 보급에도 지장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미 해병대와의 작전 협조에 공백이 생길 것이 걱정이었다.
그리고 부상을 입고도 후송되기를 거부한 많은 부하 지휘관들에게도 면목이 없는 일이다. 당시 해병 1연대에는 전투 중 부상하고도 후송을 거부하고 작전을 계속 수행한 사람이 많았다. 강복구 중대장, 이근식 소대장 같은 유능한 지휘관들이 부상을 무릅쓰고 전장을 누벼 도솔산 전투는 사상 유례없는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파편상이 깊지 않아 하룻밤 자고 난 뒤로는 움직일 만했다. 나는 즉시 전선으로 달려갔다. 그 사이 도솔산 주봉이 점령되고 남은 목표는 단 하나 도솔산 서북능선의 23목표뿐이었다.
캔자스 라인을 돌파한 것은 오래전이고 이제 배저(Badger) 라인이 코앞이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22개의 공격목표 가운데 최후의 고지인 23목표는 우리 1대대에 의해 6월 19일 점령됐다.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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