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6대사령관 공정식

공정식 사령관 회고록 (41) - 제주 사투리 통신 보안

머린코341(mc341) 2015. 1. 22. 04:01

공정식 사령관 회고록 (41) - 제주 사투리 통신 보안

 

전투 중 장비와 통신기를 적에게 빼앗겨 우리의 작전비밀 유지가 어려웠던 일이 있었다. 당시 해병1연대는 SCR-300 무전기를 쓰고 있었다. 혼전 상황에서 어쩌다가 무전기가 적의 수중에 넘어가 버렸다.

 

우리의 통신 내용을 적이 훤히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당장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연대 전체의 통신기를 다 바꿀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느 날 내 머리에 태평양전쟁 때 우리와 같은 처지에 처한 미군이 인디안 나바호(Navajo) 언어를 이용한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즉시 연대장에게 사투리 통신을 건의했다.

 

태평양전쟁사를 즐겨 읽은 덕분에 사투리 통신에 착안한 셈이었다. 나바호 암호병 이야기는 몇 해 전 ‘윈드 토커’(Wind Talkers)라는 영화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일이 있다.

 

1942년 나바호 암호병 29명이 6개의 미 해병사단에 배치된 것을 시작으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모두 540명의 나바호 인디언이 미 해병대에 근무했다. 이 가운데 400여 명이 암호병이었다.

해병1연대에는 제주도 출신이 많아 통신병들끼리 자기 고장 사투리로 교신하게 하자는 것이 내 건의의 요지였다. 그들의 사투리는 우리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러니 적이 들어보았자 뜻을 모를 터이니 안심이었다. 당시 해병대에 제주도 출신이 많았던 것은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제주도에서 해병 3, 4기생 3천여 명을 모집한 때문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제주농고·오현고·한림고 등 고등학교 재학생들이어서 두뇌도 우수하고 애국심도 남달라 충성심과 협동심이 강했다.

 

나는 전령을 여러 사람 거느리고 있었는데, 모두가 제주도 출신이었다. 자기들끼리 사사로운 말을 할 때는 나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사투리 통신에 착안하게 된 데는 이런 사정도 있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다. 신라의 화랑도 청소년들은 나라를 위해 용감하게 싸움터로 달려갔다. 그들이 통일신라의 주역이었다.”

 

해병3기 출신인 수필가 김영환(金瑛煥) 씨는 「 나의 신병훈련기」라는 글에서 오승진 한림중학교 교장의 이 훈시에 감명을 받고 학생들이 집단으로 지원했다고 밝혔다. 학교마다 선생님들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지원한다고 다 받아주는 것이 아니었다. 경쟁률이 높아 김녕 같은 곳은 200여 명이 지원해 17명만 합격했다. 12대1의 경쟁률이었다. 이렇게 우수한 자원을 확보한 것이 해병대가 빠른 기간에 강병이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당시 육군에는 무학자도 많았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해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을 통솔하기가 어려워 갖가지 에피소드가 생겨났다.

 

그러나 해병대는 달랐다. 강한 훈련과 엄정한 군율을 강조하면 모두가 눈빛부터 달라졌다. 체력의 한계를 경험케 하는 훈련과 심한 얼차려에도 토를 다는 사람이 없었다.

 

모슬포에서 그런 신병훈련을 받은 그들은 1950년 9월 1일 제주시 산지 부두에서 출정식을 갖고 해병대의 첫걸음을 떼어놓았다.

 

제주 해병들은 천인침 천을 생명의 수호신으로 생각해 늘 복대(腹帶)로 사용했다. 모두 1950년 8월 30일 제주 산지부두 출항 시 받은 손수 뜨개이다. 사진은 위로부터 화랑도 정신을 새긴 천인침(김성원 씨 소장), 필승(必勝)을 새긴 천인침(양동익 씨 소장), 무운장구(武運長久)를 새긴 천인침(고병남 씨 소장)


가족·친지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잘 가오” “부디 몸조심 하오” 작별의 인사가 떠들썩했다. 장가 든 사람들은 아내가, 미혼자는 부모·친척이 정성스레 수놓은 천인침(千人針) 천을 가슴에 간직하고 출정했다.

 

천인침이란 일본인들이 출정 장병들의 행운을 빌기 위해 여러 사람이 한 뜸씩 수를 놓아 만든 ‘武運長久(무운장구)’ 같은 글귀를 새긴 천을 준 것에 기인한다.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