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6대사령관 공정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39) - 위령제(9목표)

머린코341(mc341) 2015. 1. 15. 05:31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39) - 위령제(9목표)

 

도솔산 일대의 24개의 고지 가운데 2개를 제외한 22개의 봉우리를 우리 해병1연대 1·2·3대대 장병들 손으로 빼앗았다. 남은 2개는 미 해병대가 점령했다. 그 많은 봉우리를 빼앗는 데 소요된 기간은 매우 짧았다.

1951년 6월 4일부터 19일까지 초여름 2주일 하고도 사흘 동안 펀치볼 골짜기들은 온통 붉은 피로 물들었다. 하도 포탄을 많이 맞아 산 높이가 2~3m 낮아진 봉우리도 있고 ‘피의 능선’이니 ‘단장의 능선’이니 하는 슬픈 이름을 갖게 된 봉우리도 생겨났다.

“만세, 만세, 만세, 해병대 만세!”

 

봉우리 하나를 빼앗을 때마다 산 위에서는 이런 환호가 계속됐다. 그러나 환희 뒤에 반드시 따르는 슬픔은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어떤 승리에도 피해는 따르는 법, 완전무결한 승리는 있을 수 없다.

 

봉우리 주변의 경사면에는 피를 흘리며 고통을 호소하는 부상자와 이미 숨이 끊어진 전사자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게 마련이다. 전사자가 많을 때는 그 모습이 마치 벌목장에 널려 있는 나무토막 같았다.

 

서로 부둥켜안고 격한 기쁨을 나누고 난 뒤에는 슬픈 울음소리가 들리곤 했다. 친한 전우의 주검을 앞에 둔 사나이들은 엉엉 소리내 울었다.

 

적이 난공불락의 철옹성이라고 자랑했던 제9 목표를 탈취했을 때였다.

전투가 끝난 뒤 2대대 7중대는 소대별로 인원점검을 서둘렀다. 사상자가 100명이 넘었다. 아무리 다음 목표 점령이 시급하다지만 그런 피해를 입고 그냥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중대 지휘관들은 위령제라도 올려 고혼을 달래기로 결정했다. 대대와 연대에까지 이 결정을 통보하자 곧 김대식 연대장이 달려왔다.

 

행사를 위해 준비된 것이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는 즉석 위령제였다. 급하게 마련된 위령비와 추도문, 그리고 지천으로 피어 있는 야생화를 꺾어다 만든 조화가 준비의 모두였다.

 

전사한 전우를 위해 충령비를 쓰고 있는 해병대


위령비는 무수한 포탄과 총탄을 맞아 벌거숭이로 변한 아름드리 거목의 줄기를 잘라다가 대검으로 ‘忠靈碑(충령비)’라 새긴 것이었다.

 

글씨를 쓴 사람은 경북 안동 출신의 소대장 김문한(金文煥) 소위였다. 서예에 조예가 있는 그는 진중에서 붓을 구해 먹을 갈아 한 글자 한 글자를 정성스레 썼다. 그것을 대검으로 양각하고 거기에 먹을 칠했다.

위령제는 비목을 가려 놓은 태극기를 벗기는 위령비 제막·헌화·조총 발사·추도문 순으로 진행됐다. 김대식 연대장과 대대장·중대장이 제막을 하고 난 뒤에 지휘관들의 헌화가 있었다. 그리고는 중대원 전원이 각자 마련한 야생화를 전우들 영전에 바쳤다.

한 줌의 풀꽃을 전우의 시체 앞에 놓으면서 오열을 참지 못하는 병사가 늘어나면서부터 행사장 분위기는 숙연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진혼을 위한 조총이 발사되기 시작하자 울음이 폭발했다. 거기에 중대장 박정모(朴正模) 중위의 추도사가 낭독되자 행사장은 울음바다로 변하고 말았다.

“먼저 가신 전우들이여! 야속한 전우들이여! 어찌하여 그대들은 오늘의 이 승리를 맛보기도 전에 영영 세상을 하직하셨단 말입니까?”

 

중대장의 추도사를 들으면서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누구 한 사람 그만 울라고 말하는 이도 없었다. 실컷 그렇게 울었다.

 

전우애란 그런 것이다. 살아서 같이 고향에 돌아가자고 약속한 전우들의 고혼(孤魂)을 험산준령에 두고 떠나는 발걸음은 천 근만큼 무거웠다.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