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의 비망록 해병사관 1기생 김연상 장군편(14회)
13편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저기 뒤지고 있으니 구해지는대로 올리겠습니다.
“ 최근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기지의 철수문제가 미.일간 새로운 쟁점으로 부상했다.
미군병사가 저지른 일본인 여고생 성폭행사건때문이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물론 일본의 모든 언론들은 연일 미군측을 비난하면서 "오키나와에서 당장 물러가라”고 한결같이 외치고 있다.
오키나와현 정부도 오키나와를 세계적인 관광지로 만들 계획을 발표하면서 미군이 이제 그만 주둔해야 한다는 논리를 강하게 펴고 있다.
아직까지 미군측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미군측의처지가 매우 곤란한 것만은 사실이다.
이번에는 납득할 만한 대안을 제시해야 할 형편에 놓여 있다.
2차대전후 미군은 일본 곳곳에 기지를 만들어 주둔해 왔다.
그러나 현재는대부분 철수하고 오키나와기지 정도만 남아 있는 셈이다.
미군측이 곤혹스러워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오키나와기지를 철수한다는것은 일본영토내 미군의 완전철수를 의미한다.
만약 이렇게 되면 한반도 안보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 군사전문가들의 우려다.
金然翔장군은 “오키나와에는 미해병 제3상륙군사단이 주둔해 있다”면서 “이 부대는 한반도에 위험상황이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상륙하는 주력부대”라고 말했다.
金장군은 또 “오키나와의 미해병은 유사시 한국해병과 합류, 적의 허리를 기습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고 있다”면서 오키나와 미해병의 필요성은 절대적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최근 대만과 중국간에 일고 있는 위기감 등 신냉전 국제분위기를 지적하면서 한반도의 불안은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한국군은 지상군뿐만 아니라 해군과 공군 등 미군의 전술전략 개념 아래서 이루어진 절름발이 군대나 마찬가지라는 현실을 엄연히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金장군이 해병대의 존재가치와 필요성을 새삼 역설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해병 1개 사단의 전투력과 화력은 한마디로 일반 육군 1개 사단의 2.5배가량 뛰어나다고 한다.
육군 1개 군단조직과 맞먹는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는 것이다.
해병대의 특수성은 상륙전을 벌이는데 있으며 1개 사단이 출전할 때 구축함 8척, 순양함 4척, 공격용 전함 2척 그리고 1개 비행단 등이 출동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해병대는 사단규모로는 유일하게 독립작전을 감행할 수 있으며 이때 전차대대 수륙양용대대 공병대대 수송대대 해안공병대대 수색대대 항공대대 그리고 근무지원단 등이 일시에 출동, 전투력을 3~4배 발휘하게 된다는 것이다.
金장군의 해병대 자랑은 계속된다.
동해안 00지역에 주둔해 있는 해병1사단은 언제 어디서든지 신속히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는 최강의 기동력을 갖추고 있으며 해병1사단이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적 10만~15만병력을 동서해안에 묶어놓는 견제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金장군은 강조했다.
金장군이 해병1사단장으로 근무한 것은 71년 7월부터 73년 7월까지였다.
金장군은 해병사단장시절을 회고하면서
“7년간의 전투경험과 각급 학교에서 쌓은 이론을 종합하여 분대 소대 중대를 재정비하는 것과 해병들의 기초체력을 최대로 기르는 두가지에 몰두했다”면서 “그러나 급식문제가 어려워 뒷받침이 잘 안됐다”고 말했다.
70년대초만 하더라도 군의 급양문제는 넉넉한 편이 못됐다.
고된 훈련을 지속하려면 ‘먹을 것’을 충분히 밀어줘야 한다.
게다가 장교 하사관 등 영외거주자는 쌀을 팔아먹는 일이 생겼고 휘발유를 외부에 유출하는 사례가 많았다.
金장군은 사단장 취임후 약 1개월동안 이같은 실태를 정밀조사했다.
그 결과 원래 1인당 1일 급식쌀이 6홉이었지만 실제 급식되는 양은 4홉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유류는 50%정도가 외부로 유출되고 있었다.
金장군은 큰 고민에 봉착했다.
병사들이야 3년 의무기간을 마치면 제대하지만 장교들은 그렇지 않다.
유류와 급식 등을 착복하는 계급층은 주로 장교였기 때문에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몰랐다.
만약 이 일을 완전 차단하면 틀림없이 부하장교들의 원성을 들을 것이 뻔했다.
당시만 해도 지휘관의 인기관리는 어느 정도 중요했다.
고심끝에 金장군은 여론을 슬쩍 떠보기로 했다.
쌀유출은 절대 불가하며 대신 기름유출은 어느 정도 눈감아 줄 수 있다는 것이 지휘관의 방침이라는 말을 퍼뜨렸다.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비난여론이 많았다.
친근한 고급장교들은 왜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러느냐고 직접 대놓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金장군 스스로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모든 면에서 청렴결백한가,
또 장교사회에서 질타받는 일을 굳이 할 필요가 있느냐는 두가지 지적이 강하게 대두됐다.
그리고 “사단장은 모래 파먹고 사느냐”는 말도 들려왔다.
金장군의 결심에 동조하는 장교는 한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일이 이쯤되면 지휘관의 외로움은 커지기 마련.
갈등끝에 金장군은 혼자 며칠을 술마시다가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선공후사. 공적인 일이 우선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金장군은 한달동안 쌀의 유출실태를 은밀히 내사했고 자료를 군수사기관에 이첩했다.
군수사기관에서는 착복혐의가 있는 장교들을 조용히 불러다가 반납하도록 개인적으로 통고했다.
또한 농협의 부식납품을 철저히 감독토록 하고 농협관계자를 불러다가 부정방지를 위해 엄중히 선서케 하고 각서까지 쓰게 했다.
지휘관이 정한 이상 불만이 있어도 일은 착착 진행됐다.
金장군은 또 사병들에게 자유배식을 하게 했다.
그러자 며칠후부터 오히려 식사량이 남아도는 일이 생겼다.
이제는 훈련이었다.
金장군은 하사관을 통해 사병들의 체력단련을 주도하라고 했다.
음식이 많아지자 사병들도 솔선수범 앞장섰다.
고된 훈련도 기쁘게 감내했다.
황량하게만 느껴졌던 연병장이 생동하는 젊음으로 가득 찼다.
金장군은 집무실에서 이러한 광경을 지켜보면서
“그래 해병이야. 해병이 강하지 않으면 안돼”하고 중얼거렸다.
金장군이 이때 마음에 새겨둔 말이 있다.
'삼상례’였다.
중국천하를 거머쥔 진시황이 하루는 황후와 함께 노정승 등과 궁궐 뒤뜰에서 햇빛을 쪼이고 있었다.
문득 황후가 말했다.
”황제폐하께서는 만백성과 모든 신하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원이 하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이 말을 들은 황제는
“나는 매일 독상을 받고 있소. 신하와 함께 겸상해서 식사를 해 보는 것이 소원이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뒤뜰의 뽕나무 이파리가 이 말을 듣고는 ‘끄덕끄덕’하고 예를 표했다.
이번에는 황제가 말했다.”
”그렇다면 황후의 소원은 무엇이오”
황후가 말했다.
”저는 평생 황제 옆에 서 있기만 했습니다. 건장한 장군하고 동품 한 번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뽕나무 이파리가 또 ‘끄덕끄덕’하며 인사를 했다.
황후가 다시 옆에 있던 노정승에게
“그렇다면 정승의 소원은 무엇이오”하고 물었다.
노정승은
“황공하오나 저는 늘 옥좌 앞에 엎드려 있습니다.
임금 안 시켜도 좋으니 한번 옥좌에 앉아 봤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뽕나무 이파리가 또 다시 끄덕끄덕 거렸다.
뽕나무가 옆에서 엿듣고 있다가 이들의 주고받는 말에 감동,
세번씩 예를 표했다고 해서 ‘삼상예’라는 말로 전해져 온다고 金장군은 말했다.
金장군은
“이 말의 의미는 지휘관은 항상 부하들의 욕망, 즉 멀리도 아니고 가까운 욕망을 항상 해결해 줄 수 있어야 통솔이 잘된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金장군은 또 지휘관의 ‘고독’에 대해 장황하게 언급했다.
金장군의 회고.
“...사단장이 예하부대를 방문할 때 대대본부까지만 가는 것을 불문율로 여긴다.
아무데서나 용변을 봐서도 안된다.
훈련출동 시에는 화장실차를 특별히 만든다.
이것이 서구군대식이다.
지휘관의 존엄성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고독하기 짝이 없다.
주책없이 나가기도 무엇하고 그저 집무실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무슨 결재가 많은 것도 아니고 부하들을 불러다가 농담을 할 수도 없다.
그래서 택한것이 산보식 순시였다.
부관한테는 좀 더 거리를 두고 따라오라고 했다.
가끔 고된 훈련이 끝난 뒤 사병숙소에 들러보기도 했다.
내가 나타날 때마다 ‘올빼미 출현’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사단장쯤 되면 사병들에게는 인자한 어른으로 보여야 하고
영관급 장교들에게는 매우 강한 느낌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金장군은 전해병에게 자유급식을 실시하고 석달 뒤쯤 각자의 건강상태를 면밀히 조사했더니 얼굴색이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교육훈련 역시 괄목할 만하게 향상되었다.
말많던 장교들의 불만도 사그라졌다.
훈련의 강도를 더 높였다.
중대단위의 150명씩이 하나가 되어 12km를 35kg의 완전군장으로 1시간15분대에 주파하기 위한 훈련에 들어갔다.
보통사람도 90분내에 뛰는 것이 힘든 일이다.
그러나 반복된 훈련을 통해 150명 전원이 낙오자 없이 합격했다.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일년간 이러한 과정을 거친 끝에 어느 정도 사단전투력을 재정비했다고 판단한 金장군은 한단계 높여 대부대 단위의 교육훈련으로 승화시켰다.
특히 이때에는 군사력뿐만 아니라 경제와 정치 등 모든 분야에서 북한의 우위단계에 접어드는 시기여서 훈련에 임하는 장병들의 정신력도 매우 고무돼 있었다.
金장군의 회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3선개헌 이후 국민불만이 여기저기서 표출됐다.
게다가 유신체제 또한 많은 의구심을 갖게 했다.
물론 갈등도 있었지만 군지휘관은 이럴 때 일수록 강도높은 애국심을 장병들에게 주입시켜야 했다.
해병대는 결속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5.16이후부터는 서서히 분열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요직에 있던 해병장성들 4명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물러났다.
권력투쟁에서 오는 불가피한 현상인지는 모르지만 물러난 사람이야 늘 꽁한 마음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나 역시 3선개헌과 유신 등 정치적 소용돌이를 지켜보면서 자리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생각해 보았으나 소신껏 근무하기로 했다.
특히 소장진급때 최고위직 권력자에게 사령관직책까지 보장을 받은 터라 아첨같은 것은 아무런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73년 4월경부터 서울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해병대 존폐문제가 심각하게 고려되고 있다는 것이다.
걱정이 태산이었다.
누구한테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고. 해병대사령관한테 전화를 걸어 별일 없느냐고만 물었다.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아무일 없다고...”
金장군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해병대 장성끼리의 자리다툼이었다.
물론 표나게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누가 어떤 직책에 갈 것”이라는 등 진급과 보직을 놓고 모략중상이 담긴 소문이 나돌았다.
해병대의 존폐가 기로에 놓여 있을 때 아무 것도 모르는 일부 장성들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눈앞의 욕심만 부리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었다.(계속) 金文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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