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10대사령관 김연상

장군의 비망록 해병사관 1기생 김연상 장군편(12회)

머린코341(mc341) 2015. 1. 15. 04:56

장군의 비망록 해병사관 1기생 김연상 장군편(12회)

 

한 예비역 장성은 金然翔장군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金然翔장군 하면 크게 세가지가 생각납니다.

첫째는 월남전 등 7년동안 겪은 전쟁 무용담이고,

두번째는 한국해병을 무적해병으로 만든 초창기 해병교육훈련의 뒷얘기,

그리고 세번째는 해병대사령부 해체비화지요””

 

이 가운데 ‘해병대사령부 해체비화’는 아직껏 자세히 공개된 바 없어

현역이든 예비역이든 가장 궁금해 하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해병대 해체는

金장군이 해병대사령관으로 있던 시절에 이루어졌으며

당시 金장군은 사령관 공관에 감금된 채였기 때문에 꼼짝없이 당했다는 정도다.

 

해체작업이 누구의 주도로 왜 이루어졌는지 가장 잘 아는 이가 金장군인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동안 金장군은 해병대 해체작업의 진실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

 

굳이 묻혀진 얘기를 새삼 끄집어내어 봤자 부질없는 짓이고

또한 얘기를 하다 보면 몇 몇 특정인의 잘못을 부득불 꼬집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金장군은 최근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

 

인터뷰과정에서 기자의 끈질긴 설득과 주위사람들의 요청,

그리고 ‘역사 바로세우기’이라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다.

 

무덤까지 가져가려 했던 얘기를 공개하겠다고 그는 최근 언약했다.

 

金장군은 또

“”만약 그 내용이 보도되면 金泳三대통령이 해병대체제를 원래대로 복원시켜 줄 수 있을까””하고 웃으면서 반문했다.

 

74년 해병대사령부 전격 해체는 당시 군내부에 최대의 파문을 일으켰다.

 

지금도 그 ‘진실’을 놓고 여전히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어렵게 다짐한 金장군은 먼저 육군과 함께 근무했던 일,

그리고 해병대 교육에 관한 회고를 하고 난 뒤 해병대 해체에 대해서 밝히겠다고 단서를 달았다.

 

金장군은 영관장교시절 매우 감명 깊었던 한 노인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자신이 지휘관시절 부하들을 다스리는데 중요한 지휘지침으로 활용됐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53년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던 대대장시절(중령)이었다.

 

경기도 수원에서 지프를 직접 운전하고 서울로 향하던 저녁무렵이었다.

 

당시 수원에서 서울까지는 대부분 비포장도로였기 때문에 편도 3시간 넘어 걸렸다.

 

수원을 막 빠져나와 서울길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金중령은 길을 걷는 60대후반의 한 노인을 발견하고 차를 멈췄다.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더니 서울간다고 노인은 대답했다.

 

밤새 걸어서 갈 작정이라는 것이었다.

 

金중령은 정중하게 동승할 것을 제의했다.

 

노인은 긴 수염과 백발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

 

난리통에 서울은 왜 가시냐고 물었더니 삼선교에 볼일이 있다고만 했다.

 

노인은 말이 거의 없었다. 金중령이 몇 마디 물으면 간혹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런 노인이 문득 “젊은이 앞으로 계속 군에 몸담을 작정인가”하고 물었다.

 

金중령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노인은 또 ‘민심은 곧 천심’이라는 말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옛날에 팔자가 사나운 임금님이 있었네.

변방에는 도적떼가 극성이고 민심은 흉흉하기 이를 데 없었지.

이웃은 물론 형제간의 우애도 없었어. 말 그대로 세상 말세였지.

그때 한 형제가 있었네. 동생은 말죽거리에 살았고 형은 남대문에 살았지.

형은 부자였고 동생은 식솔도 많은데다 가난해서 조석끼니를 늘 걱정해야 했어.

그래서 동생은 가끔 형집으로 갔지만 갈 때마다 형은 물론이고 형수의 얼굴을 전혀 볼 수 없었네.

겨우 부엌에 가서 밥 한끼를 훔쳐먹고 돌아오기 일쑤였지.

그러던 어느 날 참다 못한 동생은 형을 죽일 생각으로 칼을 가슴에 품고 형집으로 갔어.

대문앞에 도착한 동생은 “이리 오너라”하고 큰소리로 외쳤네.

그러자 형과 형수가 마중나오더니 “왜 이제 오느냐”면서 부둥켜안고 반갑게 맞이했지.
형은 또 “저기 당나귀등에 먹을 것, 입을 것 잔뜩 실어놨으니 어서 끌고 가라”고 하질 않겠나.

동생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동생은 당나귀를 끌고 나와 집으로 가면서도 형이 이제는 마음을 고쳐먹었구나 하고 생각했지.

그런데 가는 한 길모퉁이에 사람이 많이 몰려 있는 것을 보고 그곳으로 가봤지.

거기에는 임금님이 승하하셨다는 내용의 방이 붙어 있었네.

사람들의 모습이 즐거운 표정이었어...)

 

金장군은 노인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옛날 연산군이 죽었을 때 백성들은 즐거워했고 민심이 되살아났다는 말을 기억했다.

 

金중령은 또 ‘하늘은 입이 있으되 단지 백성의 입을 빌려 말 할 뿐이다’하는 말을 떠올렸다.

 

金중령은 노인의 말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다.

 

임금뿐만 아니라 지휘관을 잘 만나야 부하들은 탄탄한 전우애로 뭉쳐지고

이는 곧 어떤 전투에서도 승리할 수 있게 하는 초석이라는 것을.

 

이후 金장군은 한번도 노인의 말을 잊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부대를 지휘하는 중요한 모토가 됐다고 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金장군은 69년 5월 ‘군특명검열단’핵심요원으로 차출됐다.

 

특검단은 1.21사태 등 북한의 위협이 고조되자 朴正熙대통령이 ‘특별명령’을 국방부에 하달해 이때 새로이 창단된 것이었다.

 

특검단의 목적은 외견상으로는 말 그대로

각군에 대한 ‘특명검열’형식이었으나 사실상 군기구 개편을 대대적으로 단행한다는 비밀임무를 띠고 있었다.

 

따라서 특검단 요원들은 朴대통령의 비밀임무를 수행하는 암행어사 격이었다.

 

특검단장은 당시 육군사관학교장으로 있던 金熙德중장이 맡았다

(이와 관련된 비화는 이번호에 함께 싣는 金熙德장군 인터뷰기사 참조).

 

또한 특검단 핵심요원은 육.해.공군및 해병대 고위장성 중에서 한 명씩 발탁됐다.

 

이때 金然翔장군은 해병대 대표자격으로 참가했던 것이다.

 

金장군의 회고.

 

”...특명검열단은 69년 5월 신설된 기구였다.

각군에 대해 대통령의 특명사항을 점검 확인하고 수시로 보고하는 대통령의 임시 직속기구였다.

과거 일본에서도 방대한 군을 검열하기 위해 천황의 이름으로 원로급 장성들이 중심이 돼 각 군에 출동검열하는 이른바 ‘특명검열사’를 둔 적이 있었다.

특검단장 金熙德장군은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수학한 보기드문 인재였다.

특히 그는 朴대통령과 육사동기(육사 2기)로 朴대통령에게 가장 직언을 많이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이밖에 각군에서 장성 한 명씩 차출되었고 그밑에 유능한 몇 명의 장교가 따라붙었다.

군기구개편작업이 어느 정도 무르익자 각 군의 반발과 저항에 부딪쳤다.

군 창설이래 처음 있는 개편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협박전화가 걸려오기 일쑤였다.

아예 사무실(국방부 3층 특별회의실)에서 자는 날이 허다했다.

당시 특검단의 주된 목적은 통합군체제라는 개념아래 군기구개편과 군관리제도 등을 혁신적으로 손질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담당했던 부분은 후자인 군관리제도였다.

이 작업에는 자문위원형식으로 외부인사도 참여했다.

兪焄(서울대교수) 任翊淳(연세대교수) 등 10여 명의 대학교수가 보충됐다. 이들 모두 많은 고생을 했다.

군기구개편의 주요 골자는 각 군을 하나로 통합한다는 것이었다.

각 군 본부를 없애고 국군참모총장휘하에 전략군사령부 야전군사령부 등을 두고 육.해.공군 3군사관학교도 통합운영하는 방안이 나왔다.

개편은 여러가지 요인으로 실현되지 못했지만 합참 등 일부 통합기구가 탄생하게 됐다...

 

金장군은 개편이 무산된 요인중 하나가

특수부대 및 야전군에서 끈질긴 방해공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계속되는 金장군의 회고.

 

”...우리 검열단 일행이 일선 부대를 방문하면 보초병이 상부의 연락을 받지 못했다면서 출입을 한동안 저지하는 일도 있었다.

하루는 별판을 떼고 지프에 위장번호를 달아 모 해안부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가는 도중 한 온천장에 들러 낮잠을 잠깐 자기로 하고 누워 있었는데 여관주인이 슬그머니 들어와서 이곳 경찰서장이 멀리서 감시하는 것 같다면서 빨리 피하라고 귀띔해 주는 것이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현지 부대장의 요청으로 경찰병력이 관할구역 입구에 대기해 있다가

우리 일행을 보자 서로 무선연락을 취하며 미행한 것이었다.

이때 우리는 암행검열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아예 하루전 통고해 주는 일도 있었다...

 

이처럼 당시 특명검열은 군에서 최대의 관심사였다고 金장군은 말했다.

 

金장군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각국의 군기구 및 관리체계를 접할 수 있었던것이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일본 대만 캐나다 그리고 유럽 등지를 돌아보았는데,

미국은 세계의 모든 군사적 여건에 부응할 수 있도록 다변적인 것을 종합화했고

캐나다는 경제적 운용 그리고 일본은 일반 사회제도처럼 운용하는 것이 특징이었다고 말했다.

 

스위스는 예비군의 조직과 관리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잘 돼 있었다고 한다.

 

모든 예비군들은 자신의 집에 캐비넷을 두어 전투복 무기 탄약 등을 비치하고

유사시 즉각 출동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는 것이다.

 

金장군은 이를 보면서 “만약 우리나라가 저렇게 해 놓으면 살인사건이 많아지겠지”하고 일행과 농담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金장군은 “”특히 이스라엘은 육.해.공군 분리형태가 아닌 통합군체제로 잘 조직 돼 있고

남녀노소할 것 없이 전의에 찬 얼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金장군은 현역시절 육군에 근무한 적도 더러 있다.

 

임관당시 육사 7기~9기생들과 같이 교육받은 것이 첫 인연이었다.

 

金장군은 “육군은 역시 대군다운 면모가 있었다”면서 일년이상 같이 근무했던 ‘별’들과의 추억을 떠올렸다.

 

엄격한 육사 교육생시절에는 孫熙善장군(육사 2기)이 생도중대장이었다.

 

대령시절에는 崔澤元장군(육사 5기)과 국방부에서 정책조정실에 국장과 과장으로 각각 근무한 경험이 있다.

 

이때 金장군은 한.미행정협정(SOFA)에도 참여한 적이 있다.

 

당시 崔장군은 일처리가 매우 꼼꼼하기로 유명했는데 아무리 추울 때에도 공문서 결재할 때면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일일이 검토할 정도였다고 金장군은 말했다.

 

金장군은 특히 金熙德장군과 특검단에 같이 근무했을 때 가장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당시 金熙德장군은 핵시대의 전략개념과 군전산화를 주장할 정도로

모든 면에서 앞선 생각을 가진 유능한 장군이었다고 추켜 세웠다.

 

소장진급과 관련된 흥미있는 일화.

 

金장군은 68년말 소장 진급심사에서 통과됐으나 정작 소장계급장을 단 것은 1년7개월 뒤였다.

 

장성진급 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70년 7월 어느 날 점심식사뒤 의자에서 한숨 자고 있는데 보좌관이 들어와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고 말했다.

 

표정으로 봐서 상당히 고위층에서 걸려온 전화인 것 같았다.

 

金장군은 수화기를 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최고위층이었다.

 

”오늘 계급장을 수여할 계획이오. 근무지는 진해요.

앞으로 별다른 일만 없으면 최고직까지 올라갈 것이니 그리 아시오.

그리고 오랫동안 진급을 시켜주지 않아서 미안합니다”

 

金장군의 진급이 지체된 까닭은 한 선배장성 때문이었다.

 

지휘직책을 못받은 선배장성이 전역서를 낼 처지였으나

고위층과 접촉하면서 ‘자리’를 부탁하는 바람에 늦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뒤 아이로니컬한 일이 벌어졌다.

 

金장군이 그 해 장성진급 심사에 간사로 참여했는데 이때 선배장성의 전역서를 직접 받았던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