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10대사령관 김연상

장군의 비망록 해병사관 1기생 김연상 장군편(11회)

머린코341(mc341) 2015. 1. 13. 21:43

장군의 비망록 해병사관 1기생 김연상 장군편(11회)

 

“金然翔장군은 이번 설연휴 동안 동료 예비역장성들과 현역 후배장성들한테서 많은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물론 새해인사를 나누기 위해서였지만 ‘장군의 비망록’을 의식해서인지 대부분 한마디씩 하더라는 것이다.

 

金장군은 전화통화의 내용을 몇 가지로 요약했다.

 

현역 군인의 기풍이 예전과 많이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다.

 

군장교는 모름지기 사대부의 기풍이 있어야 하는데 오늘날 그것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마치 과학이나 수학을 가르치는 선생님 같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무사안일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지휘관들은 사고방지에만 전념할 뿐 사실상 군의 전투력 배양에는 소홀히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군인들이 이같은 분위기에 빠져든 것은 비자금사건 등 최근 일련의 군과 관련된 사건이 마치 군의 전부인 것처럼 인식되는 일반사회의 시선 때문이라고 金장군은 피력했다.

 

金장군은 "군의 사기가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군과 관련된 사건이 나오면 나올수록 결국 金正日만 좋아할 뿐”이라면서 “군은 물론이고 우리 국민 모두가 金正日이 좋아할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金장군은 또 군인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백이 있어야 전쟁에 이길수 있으며, 사고발생을 우려하여 이러한 기백 육성을 소홀히 해서는 결코 안된다고 덧붙였다.

 

결국 임전무퇴의 기백을 키워주는 것이 지휘관의 진정한 자세라고 金장군은 강조했다.

 

金장군은 “과거 종로일대를 주름잡던 한 깡패 두목은 돈이 생기는 대로 몽땅 부하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은 정작 무일푼으로 지냈다”면서

 

“그 보스는 제사지낼 때 돈이 없어 종이쪽지에 과일이름과 생선이름 등을 적어 제사상에 올려 놓고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그의 부하들은 죽음으로 보스를 섬겼다”고 말했다.

 

金然翔장군은 1968년말 정글의 월남전장을 뒤로 하고 청룡부대장 재임 2년만에 귀국했다.

 

金장군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마키아벨리 ‘군주론’에 나오는 말을 인용했다.

 

“개선장군은 돌아오는 대로 왕의 발을 씻어주든지 아니면 왕을 들이쳐라”

 

마치 자신이 무슨 영웅인양 우쭐하지 말아야 하며, 전쟁의 공훈을 깨끗이 잊고 겸손하게 신하된 도리를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金장군은 부연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개선장군에 대한 모함과 냉대는 필연적으로 따르며 이를 잘 극복하는 것 또한 전쟁에서 이기는 것만큼이나 힘든 것이라고 金장군은 덧붙였다.

 

金장군 역시 개선장군이 되어 귀국했다.

 

그러나 金장군은 귀국후 한동안 견디기 힘든 시기와 견제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평생동안 가장 많은 술을 마셨던 것도 이때였다고 한다.

 

金장군은 당시 丁一權국무총리한테 귀국신고를 한 적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丁총리는 金장군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金장군,내가 청룡부대를 방문하고 돌아와서 朴대통령께 다음과 같이 보고한 적이 있소.

’청룡부대에 가보니 부대장이하 말단사병에 이르기까지 눈동자가 펄펄 살아 있었습니다.

그런 부대를 가진 지휘관이 정말로 부러웠습니다’하고 말이오.

그랬더니 각하께서 즉시 각군 책임자들을 불러 저녁 연회를 베풀었소.

이자리에서 朴대통령은 金장군의 공훈을 치하하면서

‘金장군을 별 하나 더 달아주면 어떠냐’고 말씀하셨지요”

 

잠자코 듣고 있던 金장군은 ‘어이쿠 이젠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만약 金장군이 별을 하나 더 달면 선배장군들이 중도에 그만두어야 하는데 선배장군들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金장군은 귀국하기 얼마전 자신이 포탄 탄피 밀수혐의로 궁지에 몰렸던 일이 朴대통령의 칭찬이 있은 뒤 생겨났다는 점을 떠올리며 곧 견제와 방해가 뒤따르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귀국후 金장군은 선배장군들의 보이지 않은 ‘압력’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金장군은 매일같이 축하파티에 초대되어 술독에 빠져 지내야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환대였지만 내막은 그렇지 않았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만취된 채 잠자리에 들면 또 다른 선배장군한테서 아침 일찍 신고하러 오라는 전화를 받아야 했다.

 

이는 매우 고달픈 일이었다.

 

그러나 상관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일.

 

할 수 없이 金장군은 술이 덜 깬상태에서 선배장군댁에 찾아가야 했다.

 

그러면 金장군은 또 후한 대접을 받았다.

 

똑같은 일이 며칠씩 반복됐다.

 

金장군은 더 끌려다니다간 엉뚱한 누명을 쓰고 코너에 몰릴 수 있다는 판단아래 묘책을 강구하기로 했다.

 

결국 미국행을 결정했다.

 

미해병대의 상륙전술학을 연구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미국을 다녀오겠다고 상부에 건의, 도미하게 됐다.

 

피비린내나는 월남전장의 악몽도 잊고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金장군 스스로도 미국행이 잘된 일이라고 마음먹었다.

 

金장군은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 청와대 술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일부 장성들이 朴대통령한테 아부성 발언과 행동을 경쟁적으로 하는 바람에 꼴불견 자리가 돼 버렸다”면서 “이는 월남전에서 목숨을 걸고 묵묵히 싸우고 있는 장병들의 모습과 비교해 볼 때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金장군의 미국생활은 오히려 자신의 군생활에 많은 도움을 줬다.

 

도미한 지 얼마 안 된 68년말 金장군은 소장으로 진급했다.

 

미국 텍사스 샌안토니오의 어느 동포집에서 저녁식사 대접을 받고 서울안부를 물으려고 집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부인이 “진급심사위원회에서 진급했다는 연락이 왔다”고 매우 기뻐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金장군은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다만 ‘진급이 되나보다’ 하는 정도였다.

 

金장군은 미국 샌디에이고에 머무를 적에 푸에블로호 함장인 부커중장과 같은 숙소에 있은 적이 있다.

 

부커중장은 북한에 억류됐다가 풀려나서 그런지 아침 저녁으로 식당에서 金장군과 상면할 때마다 표정이 매우 굳어 있었다.

 

金장군이 뭔가 궁금한 점을 물어보려고 하면 부커중장은 북한에서 지냈을때의 일은 생각조차 하기 싫다면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것이었다.

 

하루는 이런 경험도 했다.

 

金장군이 샌디에이고시내에서 자동차를 몰고 지나던 중 우회전을 막 하려는데 방향등이 켜지질 않았다.

 

할 수 없이 金장군은 그냥 우회전했다.

 

그랬더니 경찰 순찰차가 금방 뒤쫓아왔다.

 

경찰이 순찰차에서 내려 천천히 다가오더니 ”방향등을 안켜고 운전한 관계로 감사장을 드리겠습니다”하면서 면허증을 요구했다.

 

난감한 金장군은 영어를 못한다면서 무조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엄살을 부렸다.

 

金장군의 태도에 감복(?)했음인지 경찰은 좀더 부드러운 태도로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고 金장군은 한국에서 왔노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경찰은 대뜸 ”그러면 청룡부대장을 지낸 金然翔장군을 아느냐”고 물었다.

 

깜짝 놀랐다.

 

어떻게 자신을 안단 말인가.

 

金장군은 본인이라고 말하기는 겸연쩍어 급한 김에 ”그분은 바로 나의 친형이오”하고 말했다.

 

경찰의 태도는 돌변했다.

 

金장군과 자신은 월남전에서 무척 친하게 지냈다면서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신은 자랑스러운 미해병대 출신이며 월남전에서 명성을 떨친 존장군의 부대에서 무선병으로 지냈다고 설명했다.

 

경찰은 또 金장군에게

“한국의 청룡부대장은 매우 용감했다. 그런 장군의 동생을 여기에서 보니 매우 반갑다”고 몇 번이고 말했다.

 

결국 金장군은 교통법규 위반 덕분에 미해병대출신 경찰을 만나 안전하게 숙소까지 경찰 순찰차의 에스코트를 받았다.

 

金장군은 이보다 4년 앞선 64년에는 부대시찰겸 OJT(On The Job Training)의 목적으로 미국과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金장군의 회고.

 

“...이때 우리 일행은 나(당시 대령)를 비롯,孔正植소장 姜起千준장 등 3명이었다.

 

방문지는 미국 서해안에 위치한 해병1사단 주둔지 캠프 펜델턴이었다.

 

우리 일행이 도착하자 마중나온 안내장교의 계급은 대위였다.

 

최소한 대령 정도는 안내를 맡아야 하는데 대위라 좀 실망했다.

 

우리는 그 대위에게 안내장교로 선발된 이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대위는 우리 일행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한국해병 방문단에는 거구의 킹콩(당시 孔장군의 별명이 킹콩이었다)과 말술의 주당들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언급한 뒤 미해병 1사단에서 덩치 크고 술 잘 마시는 장교중에서 자신이 특별히 선발됐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대위는 미해병 포병연대 중대장이었으며 덩치가 매우 컸다.

 

대위의 설명을 들은 우리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계속되는 金장군의 회고.

 

”...대위는 덩치에 걸맞게 술도 아주 잘 마셨다.

 

하루는 우리가 숙소 열쇠를 놓고 나온 채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그러자 대위는 걱정하지 말라면서 숙소 현관문 앞 30m 떨어진 곳에서 힘껏 달려 몸으로 현관문을 밀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정말 가관이었다.

 

덩치와 술힘이 합해져서 그런지 대위가 두어번 그렇게 하니 현관문이 부숴져 우리는 숙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金장군은 또 당시 일행이 라스베이가스에 갔다가 돈을 다 털리고 미해병차량의 도움으로 겨우 숙소까지 갔던 일을 기억하면서 “그때 洪性澈주미공사한테서 돈을 빌리지 못했다면 한국에 오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웃었다.

 

다음은 일본에서 있었던 일화. 64년의 일이었다.

 

일행은 미국 방문때처럼 孔正植장군 姜起千장군 등 3명.

 

하루는 동경시내 신바시 요정에서 술을 마시게 됐다.

 

신바시 요정은 일본내에서 가장 유명한 요정이었다.

 

일행이 방으로 안내되고 곧 주안상이 차려졌다.

 

상위에는 작은 주전자와 조그마한 정종잔이 있었다.

 

일본 특유의 그릇이었다.

 

’큰 것’에 익숙한 일행의구미에 맞을 리가 없었다.

 

孔장군은 마담을 불러 잔을 큰 것으로 바꿔달라고 했다.

 

마담은 조금 더 큰잔으로 바꿨다.

 

그러나 孔장군은 또 맥주컵만한 잔으로 바꾸라고 했다.

 

마담은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잔을 바꿨다.

 

그제서야 만족한 孔장군은 먼저 金장군에게 권했다.

 

그런데 한잔 따르고 나니 주전자에 있던 술이 바닥나 버렸다.

 

이번에는 주전자를 바꾸라고 했다.

 

더 큰 주전자는 없었다.

 

할 수 없이 일행은 한잔 마실 때마다 큰소리로 술주전자를 가져오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진풍경이 벌어졌다.

 

기생들이 술주전자를 들고 복도를 분주히 왔다갔다 하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아예 요정의 모든 기생(30명)이 동원되어 주방으로 이어지는 복도에 일렬로 서서 술주전자를 운반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40~50개의 술주전자가 방안으로 들락거렸다.

 

어느 정도 술기운이 오른 孔장군은 주인마담을 부르더니

“이 집에는 큰 주전자도 없나”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마담은 ”단나상(성주)은 사람이 아니라 꼭 소 같아요”라고 말했다.

 

孔장군은 약간 불쾌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이봐,그렇게 말하는 마담은 처음봤다. 어디 술마시는 소도 있다더냐”고 큰소리로 말했다.

 

방안은 한참동안 웃음소리가 떠날줄 몰랐다.

 

金장군은 이 일이 한동안 국내에서도 회자됐다고 말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