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10대사령관 김연상

장군의 비망록 해병사관 1기생 김연상 장군편(9회)

머린코341(mc341) 2015. 1. 12. 18:34

장군의 비망록 해병사관 1기생 김연상 장군편(9회)

 

“ 金然翔장군은 ‘명심보감’을 자주 들여다본다.

 

주옥같은 글귀들이 새삼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특히 金장군은 ‘명심보감’중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좋아한다.

 

세상의 법칙은 ‘근면하면 부귀가 오고 그 다음엔 영화가 있다.

영화뒤에는 태만이 따른다.

곧이어 빈곤해지며 그런 다음 다시 사람은 근면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세상일은 ‘근면-부귀-영화-태만-빈곤-근면’의 순환고리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金장군은 자신이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우리나라는 현재 ‘태만’단계에 와 있음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金장군은 또 과거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국가들의 면면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면서 이들 나라의 공통점은 모두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민정부 들어 여러가지 면에서 민주화가 됐지만 최근 사회분위기 등 모든것이 ‘태만’해 있으며 우리나라의 군사력에 대해 새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金장군의 주장이다.

 

전쟁에서의 패배는 모든 것을 잃는다는 단순한 논리에서 이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金장군은 덧붙였다.

 

金장군은 월남전 참전당시 수많은 ‘승리’도 있었지만 패배도 있었다고 말했다.

 

패배한 이유는 ‘태만’때문이었다고 풀이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그 유명한 월맹군의 ‘구정공세’때였다고 회고했다.

 

67년말 북위 17도선 이북의 월맹군은 수세를 만회하기 위해 병력과 화력등을 집중 증강시키기 시작했다.

 

이같은 정보를 입수한 주월미군사령부는 미국본토의 1개 사단을 지원받아 실전배치를 서두르게 됐다.

 

이때 증파된 미육군부대는 ‘아메리칼사단’으로 최전방 월남군 1군단지역에 배치됐다.

 

따라서 북위 17도선 지역을 지키고 있던 한국의 청룡부대

그리고 미해병제3상륙군사령부 등은 불가피하게 부대이동을 하게 됐다.

 

이때 광나이성 추라이인근에 주둔해 있던 청룡부대는 북위 17도선을 마주하는 호이안지역으로 옮겼다.

 

그러나 부대이동과정에서 청룡부대와 주월 미해병사령부간에 몇가지 문제가 생겼다.

 

당시 청룡부대는 미해병제3상륙군사령부의 작전지도를 받는 형태로 주둔해 있었기 때문에 미해병측은 애초 호이안지역(해안가)이 아닌 최전방 중부내륙지역으로 옮길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청룡부대장 金然翔장군은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이유는 딱 한가지였다.

 

최전방 중부내륙지역은 교통시설 등 생활하기에 모든 여건이 안좋은데다가 전술.전략적으로 취약지구여서 부하를 잃을 확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었다.

 

위험지역은 한국군이 그리고 편한 지역은 미군이 맡으려는 속셈을 金장군이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金장군은 지휘관 체면에 드러내놓고 반발할 수가 없어 모종의 ‘작전’을 구사하기로 했다.

 

우선 본국에 긴급전문을 보내 이같은 처지를 전하면서 참모 한 사람을 요청했다.

 

金장군의 의지를 미해병측에 전달할 참모였다.

 

며칠뒤 본국에서 吳允晋중령이 도착했다.

 

吳중령은 金장군밑에서 작전참모로 있다가 임무를 마치고 귀국해 있는 상태였다.

 

吳중령이 도착하자 金장군은 일반 참모들을 소집,긴급 대책회의를 마련했다.

 

중부내륙지역으로의 이동은 절대 용납될 수 없으니 미군측을 잘 설득시키라는 것이었다.

 

金장군은 또 자신의 요구조건 즉

* 청룡부대 이동지역은 해안선과 가까운 곳이어야 할 것

* 일번도로를 끼고 있을 것 등 몇 가지 조건을 반드시 관철시키라고 특명을 내렸다.

 

그러나 참모들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해병측은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金장군은 고심끝에 한가지 묘안을 생각해냈다.

 

한국 국회를 들먹거리기로 했다.

 

만약 청룡부대가 예정대로 중부내륙지역으로 이동할 경우 큰 희생이 뒤따르기 때문에 청룡부대의 철수문제를 국회차원에서 심각히 고려하고 있다는 허위정보를 내세우기로 했다.

 

金장군은 한편 자신의 요구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당분간 적과 싸우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도 은근히 퍼뜨렸다.

 

그러나 미해병 제3상륙군사령관 쿠시맨장군(나중에 미중앙정보국장을 지냈다)은 이러한 일이 金장군의 고집에 의해 진행되고 있음을 알고 한국정부에 청룡부대장을 교체해 달라는 의견서를 보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렇듯 한동안 한국해병과 미해병간에는 부대이동을 둘러싸고 미묘한 기류가 형성됐다.

 

결국 한.미해병간의 자존심 싸움은 청룡부대의 승리로 끝났다.

 

계속된 한.미.월남군 참모회의에서 수차례 논의끝에 청룡부대의 의견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여 호이안지역으로 최종 결정을 보게 됐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또 하나 생겼다.

 

미군측이 이동방법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즉 부대이동은 도보로 하되 전투하면서 옮기라는 것이었다.

 

金장군은 다시 참모회의를 즉각 소집하고 곧 닥칠 우기 등을 거론하면서 헬기로 동시에 이동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주장을 폈다.

 

참모들도 이같은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또 한번 미해병측과 담판을 짓게 됐고 결국 이번에도 청룡부대의 승리로 끝났다.

 

이렇게 해서 청룡부대가 당초 주둔했던 추라이에는 새로 증파된 아메리칼사단이 진주했으며 청룡부대는 호이안으로 이동하게 됐다.

 

그런데 부대가 이동하고 나자 문제는 엉뚱한데서 터져 나왔다.

 

부대지휘본부를 놓고 참모들과 金장군 사이에 의견이 엇갈렸다.

 

청룡부대는 이동후 미해병 포병부대가 주둔해 있던 막사 등을 인계받아 사용토록 돼 있었으나 현장을 직접 둘러본 金장군은 적에게 이미 노출돼 있다는 이유로 지휘본부를 해안가지역으로 다시 옮길 것을 주장했다.

 

호이안 해안가는 유사시 해상지원을 받을 수 있는 이점이 있는 곳이었다.

 

그러자 참모들은 현위치가 좋다면서 金장군의 의견에 반대하고 나섰다.

 

참모들은 새로운 지휘본부를 구축하려면 적어도 6개월에서 1년이라는 시일이소요되기 때문에 그냥 미해병포병 막사를 사용하자는 논리였다.

 

아무리 지휘관이라도 참모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

 

며칠을 고민하던 金장군은 참모들에게

“먼저 (새로 지휘본부를 정해 놓은곳으로) 떠날테니 올테면 오고 말라면 말라”고 하면서 경비소대만을 인솔하고 헬기로 휑하니 떠나버렸다.

 

참모들도 도리없었다.부대원을 인솔하고 金장군이 지정한곳으로 옮겼다.

 

전쟁에서는 운이 뒤따라야 하는 법.며칠뒤인 1월30일(음력 설날) 새벽을 기해 월맹군과 베트콩이 기습적인 대공세를 취해오는 것이었다.

 

전방에는 월맹군이 후방에는 베트콩이 월남전역에 걸쳐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바로 이것이 ‘구정공세’였다.

 

한국군이 월남참전중 가장 피해가 컸던 것도 이때였다.

 

아군측은 ‘구정날은 서로 공격하지 말자’는 약속을 월맹군측과 맺고 태만해 있다가 허를 찔렸던 것이다.

 

그러나 청룡부대는 운이 좋게도 막대한 피해를 비켜나갈 수 있었다.

 

월맹군측은 청룡부대가 미해병포병부대의 막사에 주둔해 있는 줄 알고 이곳을 로켓포 등으로 집중포격을 가해왔기 때문이었다.

 

金장군으로서는 매우 운이 좋았다.

 

만약 서둘러 이동하지 않았다면 아군의피해가 상당히 컸음은 물론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金장군 휘하의 참모들은 한동안 얼굴을 들지 못하고 다녀야 했다.

 

金장군의 회고.

 

”...구정공세는 태만해 있던 아군측의 분위기를 틈타 감행된 기습공격이었다.

 

청룡부대의 피해도 많았다.그러나 큰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지휘소를 몰래 옮긴 이유도 있었지만 일선 소대장들의 효과적인 대응으로 조기에 수습할 수 있었다.

 

특히 당시 5중대 1소대장으로 있던 全道奉소위(74쪽 기사참조)가 목숨을 걸고 월맹군 주력부대 지휘소를 찾아내 아군 항공부대에 연락함으로써 막대한 피해를 미리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수세에 몰린 싸움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훈장을 주지못해 지금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金장군은 당시 월남전에서의 일선 소대장들의 활약상은 실로 대단했다며 전공을 부하들에게 돌렸다.

 

특히 해병이 좋아 해병을 자원한 해병간부후보 35기출신들의 용맹성은 지금도 예비역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고 한다.

 

이들과 관련된 흥미있는 에피소드 한가지.

 

66년 8월8일.일요일이었다.

 

임관을 앞둔 해병간부후보 35기 4명이 전날 외박을 나갔다가 귀대하기 위해 부산에서 버스를 탔다.

 

귀대장소는 진해 해병기지였다.

 

버스안에는 김해공군기지에서 훈련받는 파일럿후보생들도 있었다.

 

이들도 곧 임관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시비가 벌어졌다.말다툼끝에 해병예비소위 한명이

“소위면 다 똑같은 소위냐.해병소위의 맛을 보여주겠다”면서 공군예비소위들에게 펀치를 날렸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버스는 김해 공군기지앞에 머물렀고 얻어맞은 공군예비소위들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위병소를 통해 자신들이 해병대원들한테 집단 구타당했다고 보고했다.

 

버스는 이미 진해쪽으로 떠난 뒤였지만 이같은 소식을 접한 공군동료들은 즉각 군용트럭 두대를 출동시켜 전속력으로 버스를 추적했다.

 

이들은 곧 버스를 따라잡고는 버스 앞뒤를 가로막고 강제로 버스를 정지시켰다.

 

덩치좋은 공군장병 20여명이 버스로 올라오더니 해병대원 4명을 끌어내린 다음 버스를 출발케 했다.

 

다음 일은 뻔했다.

 

해병대원 4명은 공군대원들로부터 초주검이 되다시피 얻어맞았다.

 

몸이 성한 데가 제대로 없을 정도였다.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간신히 부대에 도착한 해병대원들은 이같은 일을 동료들에게 즉각 전했다.

 

혈기왕성한 해병대원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이날 저녁 순검(점호)이끝나자 후보생 자치회에서 긴급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회의는 오래 가지 않았다.

 

결론은 ‘김해비행장’을 습격하자는 것이었다.

 

어느 누구 하나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구겨진 해병의 자존심을 회복하자는것이었다.

 

이때 주축이 된 멤버들이 훗날 월남전에서 명성을 날린 간부후보 35기들이었다.

 

특히 35기출신들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에서 학부과정을 마친 상태여서 엘리트의식도 강했다.

 

구정공세때 명성을 날린 全道奉후보생(연세대 정외과)도 적극 합류하고 나섰다.

 

작전은 치밀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옷을 벗고 취침에 들어갔던 해병대원들이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직장교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불침번근무한테 귀띔하고는 연병장에 집합했다.

 

모두 110명이었다.

 

이들은 ‘후퇴는 없다.

 

죽어도 전진해야 한다’는 평소의해병대정신을 다짐하고는 후문을 통해 부대를 몰래 빠져나왔다.

 

후문 근무자에게는 야간훈련을 나간다고 둘러댔다.

 

이들이 진해역에 도착한 것은 새벽 3시쯤이었다.

 

부산행 첫 기차가 새벽 4시에 있었다.

 

곧이어 기차가 당도했다.

 

이들은 신속히 기차에 올라탄 뒤 다시 한번 작전을 점검했다.

 

새벽 5시쯤 진영역에 도착했고 이들은 곧 길가에 주차해있던 트럭 2대에 지체없이 나눠타고 김해 공군부대로 무작정 돌진해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당시 전군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해병대원들의 ‘김해비행장습격사건’이 시작됐던 것이다.(다음호에 상세히 기술)[계속] (金文기자)

 

[당시 청룡부대 5중대 1소대장 全道泰해병소장]

“68년 1월말 음력 설날을 기해 월맹군과 베트콩의 공격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우리가 방심한 틈을 타서 대대적이고도 기습적으로 공격을 가해왔기 때문에 아군의 피해도 컸지요

 

월남전 당시 북위 17도선 최전방 청룡부대 5중대 1소대장이었던 全道奉해병소장(현00지역사단장 해병간부후보 35기)은 ‘구정공세’때 1개 소대를 잃을뻔했던 아슬아슬한 순간을 새삼 떠올렸다.

 

그해 1월30일 저녁 全道奉소위는 전방지역 정찰을 마치고 부대 집결지로돌아와 저녁식사를 막 끝냈다.

 

음력설에 즈음 월맹군과 아군은 묵시적으로 서로 공격하지 않기로 돼 있다는 얘기도 있어 다른 날보다는 한결 긴장이 풀려 있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안부편지나 쓸까 하고 막 펜을 드는 순간 지축을 뒤흔드는 폭발음이 여기저기에서 터져나왔다.

 

全소위는 월맹정규군이 쏘아대는 로켓포탄의 폭발음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기습전이었다. 全소위는 소대원들에게 즉각 출동명령을 내리고 부대 경계선 진지호에 매복시켰다.

 

머리위로는 계속 적의 포탄이 지나갔다.

 

공격형태로 봐서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가 않았다.

 

마치 일시에 아군측을 궤멸시키겠다는 의지였다.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여러 소리를 종합해 볼 때 많은 아군측 진지가 벌써 아수라장이 된 것 같았다.

 

全소위는 순간 빨리 반격을 가해야 아군의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였다.

 

대대본부로부터 긴급 무전명령이 하달됐다.

 

가장 최전방에 위치한 1소대장한테 지시하는 것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적의 지휘소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규모 공격시에는 대개 평소의 지휘소에서 빠져나와 은폐지역에 지휘소를 마련하기 때문에

기존의 체크된 지휘소는 사실상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全소위는 휘하 소대원들에게 “”해병의 진가를 보여줄 때가 왔다””고 독려하면서

결사항전을 각오케 한 뒤 포탄이 쏟아지는 곳을 뚫고 적지역으로 은밀히 파고들었다.

 

적의 공세는 더욱 거세졌고 시간은 자정을 지나 이튿날 새벽으로 치닫고있었다.

 

全소위는 초조와 불안이 엄습해 왔다.

 

월맹정규군은 또 베트콩과 합세해 인해전술식 파상공격을 가해 오고 있었다.

 

드디어 全소위를 비롯한 1소대 특공조들이 적지에 파고드는데 성공했다.

 

정글 깊숙이 적 1개 대대의 지휘소가 어렴풋이 드러났다.

 

全소위는 지체없이 상부에 무전연락을 취했다.

 

적의 지휘소가 발견된 이상지휘능력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상부에서는 성공을 축하한다면서 서둘러 빠져나오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1소대원들이 막 뒤돌아 나오자 말자 기다렸다는듯 적의 자동소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부하 몇몇이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졌다.

 

근접거리에서 적에게 포위당했음을 직감했다.

 

죽음을 각오한 1소대원들은 망설일 것도 없이 M16 소총을 갈겨대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렸다.

 

육박전까지 벌어졌다.

 

귀신잡는 해병의 혼에 질린 적들이 풀썩풀썩 나가 떨어졌다.

 

1소대원들이 간신히 적의 포위망을 뚫고 막 나오는 순간,적 연대지휘소가 시야에 들어왔다.

 

全소위는 즉각 상부에 보고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포위망을 뚫은 끝에 얻은 대단한 수확이었다.

 

잠시후 아군측에서는 대대적인 공중공격을 감행했다.

 

적의 주요 지휘소는거대한 불기둥을 내뿜으며 삽시간에 무너져버렸다.

 

이를 본 1소대원들은 환호를 질렀고 날이 밝아오면서 아군지역으로 전진해왔던 적들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무수한 시체를 밟으며 적과 육박전을 벌였던 기억이 눈에 선합니다”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한 뒤 해병대를 자원한 全소장은

구정공세때처럼 치열한 격전을 치러보기는 처음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 청룡부대장 金然翔장군은 “구정공세때 全소위가 빨리 적의 지휘소를찾아냈기 때문에 조기에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는 수세에서 우세로 전환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全소대장에게 공을 돌렸다.

 

金장군은 “평소 全소장은 청렴결백하기로 소문나 있으며 현재에도 허술한 집에 살 정도”라면서 월남전 참전때 떨쳤던 그의 용맹성과 특유의 청렴한 생활은 가끔 예비역 장성들 사이에 회자되곤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