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의 비망록 해병사관 1기생 김연상 장군편(7회)
“ 金然翔장군은 최근 일련의 비자금사건
그리고 12.12와 5.18사건의 검찰 재수사 등과 관련, 현역 군인들의 마음가짐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金장군은 군대는 국가와 더불어 영원한 것이라고 전제한 뒤,
"비록 군이 정치적 흐름에 따라 한때 좌지우지 끌려갔을지는 모르나 국민 역시 그러기는 마찬가지였다”면서
“싸잡아 군을 욕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군 스스로도 사기가 저하되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대부분의 선배군인들은 국가보위를 위해 목숨을 건 전쟁을 치른 바 있다면서
“정치적 흐름이야 어떻게 변하든 군은 항상 전쟁에 대비하며국민과 국가를 지킬 때 영예로운 것”이라고
평소의 신념을 피력했다.
金장군이 자신이 최근 몇 차례 친목모임에 참석해 본 결과,
대부분의 예비역장성들이 군의 사기문제를 깊이 우려하고 있음을 절감했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특히 군의 사기는 유사시 승패의 결정적 요인이 된다는 것을 金장군은 실전을 통해 체득했다.
金장군은 월남전 참전당시 부하 한명을 적에게 포로로 내주고 실의에 빠진적이 있었다.
68년초였다.
청룡부대 소속 해병중사 한명이 호이안 인근의 한 민가에 은거하면서 정보활동을 벌이다가 적에게 들키고 말았다.
해병중사는 적의 추적을 받고 도망하던 중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어깨 관통상을 입고 쓰러져 그만 월맹군한테 잡혔다.
보고를 받은 金장군은 속이 너무 상했다.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난감하기만 했다.
지휘관으로서 부하가 전사했을 때의 슬픔도 크지만 포로로 잡혀갔을때의 마음은 여간 착잡하지 않을 수가 없다.
金장군은 또한 부대원들의 사기를 우선 고려해야 했다.
잡혀간 포로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부하들의 불신을 받는것은 뻔한 이치였다.
金장군은 부득이 ‘적과의 협상’을 벌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무리 적이라고 해도 필요에 따라 가끔 서로의 조건을 주고 받을 수는 있는 일이었다.
金장군은 월맹군사령관의 귀에 들어가도록 책략을 썼다.
*청룡부대장은 본디 조용한 성격이기 때문에 건드리지 않으면 공격을 잘 하지 않으며
*특히 포로로 잡힌 해병중사 한 명을 돌려보내면 몇 달 동안 공격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등의 정보를 월맹군쪽으로 흘려보냈다.
그러자 베트콩의 ‘구정공세’가 끝난 직후 적측의 서신이 왔다.
‘金장군 귀하’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봐서 정식으로 보내온 서한이었다.
또한 이 서한은 한글로 표기돼 있었다.
북한측 심리전 요원이 작성한 듯했다.
약속된 날짜에 포로를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포로로 붙잡힌 부하를 넘겨받을 수 있었다.
물론 이 편지는 사이공의 주월 한국군사령부로 넘겨주었다.
당시 월맹군과 대치해 있던 청룡부대는 미해병의 지원을 받아 하루에도 수십 차례 공격을 퍼붓는 날이 많았다.
그러나 金장군은 포로를 살리기 위해 약속대로 얼마간 공격을 늦출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포로가 되돌아오자 사기가 오른 장병들은 곧 전투력을 재정비한 후 대대적인 수색전을 전개했다.
당시 작전참모로 이름을 떨친 吳允晋중령의 빈틈없는 작전계획에 따라 크고 작은 승리를 연거푸 거두어
잠시동안의 ‘휴전’을 만회했던 것이다.
월남전참전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베트콩의 ‘구정공세’가 어떠했는지를 잘 안다.
구정공세는 68년 2월 음력설을 맞아 베트콩이 월남 전역에 걸쳐 벌였던 대대적인 게릴라식 공격을 말한다.
이때 아군의 피해도 상당히 컸다.
북위 17도선의 최전방 뿐만 아니라 후방의 사이공 시내에까지 기습공격해 한국군뿐만 아니라 미군측에도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金장군은 월남패망의 이유를 나름대로 설명하면서
“구정공세 직후 한.미 고위장성들은 전쟁이 장기화될 수 밖에 없다고 보았으며 사실상 전의가 한 풀 꺾이게 됐다”고 말했다.
전쟁 초반기인 64년부터 67년말까지는 아군측의 효과적인 공세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면 구정공세 이후로는 비록 공격횟수는 많았지만 화력에만 의존, 사실상 성과없는 전쟁을 치렀다고 金장군은 회고했다.
게다가 68년 3월에 발생한 ‘미라이학살사건’으로 주월미군은 전세계로부터 비난여론을 받게 됐다.
당시 미라이학살사건의 파장은 실로 대단했다.
베트콩의 구정공세 직전 金장군이 이끄는 청룡부대는 광나이성에서 동북부쪽의 전선인 호이안지역으로 이동하게 됐다.
당초 청룡부대가 주둔해 있던 광나이성에는 미국본토로부터 증파된 미육군 1개 사단이 새로 진주했다.
사단장은 이미 파병된 미제3상륙군 부사령관 코스터장군(당시 소장,70년대 중반 주한미군사령관을 지냈다)이 맡았다.
당시 제3상륙군은 월남의 최전방에서 한국의 청룡부대를 작전통제하에 두고 있었다.
金장군은 코스터장군과 수많은 합동작전을 펼쳐 절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이때 코스터장군의 참모장으로 새로 부임한 이는 나중에 국무장관까지 지낸 헤이그대령이었다.
당시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미라이학살사건’은 코스터장군 휘하의 윌리엄 켈리중위가 저질렀다.
켈리중위가 이끄는 미군부대가 광나이성 미라이군의 한 촌락에서 베트콩 동조자로 지목된 주민 100여명을 모아놓고 무차별 학살을 벌였던 것이다.
사건은 68년 3월에 발생했지만 문제가 된 것은 이보다 2년정도 지난 70년초 특파원 세뮤어 허쉬기자가 폭로하면서였다.
특히 학살된 사람은 성인남자들 뿐만 아니라 촌락의 부녀자와 어린이까지 포함돼 있으며, 이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대량학살이 강행되었다는 점에서 미국에 엄청난 충격을 던져주었다.
당시 한국일보 주월특파원을 지낸 安炳씨璨(59 시사저널 발행인)가 저술한 책 ‘사이공 최후의 새벽’에는 미라이학살사건의 파문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당시 국방성은 은밀한 가운데 이미 켈리중위의 범법에 관해 조사를 진행하고 있었으나 막상 이렇게 공공연한 공개보도가 있자 닉슨정부도 적지않게 당혹하였다.
비록 존슨정부때 일어난 일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일선의 사기뿐만 아니라
국민여론에 불을 붙인 격이라고 닉슨정부는 생각하였고 보도의 자제를 요망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신문들은 이런 일을 어느 전쟁에서나 있기 쉬운 불가피하고도 정당화될 수 있는 살상으로 여기는데 동조하기를 거부하였다.
당시 프랑스신문 ‘르 몽드’지는 ‘이런 끔찍한 범죄자를 공중의 심판에 맡길 수 있는 미국을 다른 나라들은 멸시할 수 없다.
군대를 가진 모든 나라들은 미국의 이 용기를 배우기 바란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켈리중위를 재판에 회부한 미국정부의 용기보다 이 부끄러운 사건을 서슴없이 보도한 미국 신문의 용기에 보내는 경의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결국 미라이학살사건이 폭로되자 그 후유증으로 당시 웨스트포인트(미국육군사관학교)교장으로 있던
코스터장군은 켈리중위가 과거 자신의 부하였다는 데에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스스로 교장직을 사임했다.
金장군은 이 사건을 놓고 몇가지 흥미있게 가정해 보았다.
* 만약 청룡부대가 이동하지 않았더라면 이같은 학살사건은 발생하지 않았 을 것이며
* 또한 월남전에서의 전세를 계속 유리하게 리드할 수 있었다는 것.
이 학살사건으로 미군은 월남전 참전명분을 어느 정도 잃었고 또한 참전중인 미군들에게도 사기면에서 큰 타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광나이에서 호이안으로 이동한 청룡부대는 월맹정규군과 더욱 근접한 거리에서 전투를 벌였다.
당시 월남군은 모두 4개의 군단으로 편성돼 있었다.
다낭을 중심으로 한 최전방지역의 1군단, 퀴논을 거점으로 1군단 후방부를 담당하고 있던 2군단, 그리고 사이공을 중심으로 월남 후방지역을 맡은 3, 4군단이 각각 주둔해 있었다.
이중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1군단지역에는 한국군 청룡부대와 미해병 제3상륙군 그리고 미1개사단 등이 합류해 있었다.
청룡부대가 이동하자 金장군은 새삼 감회에 젖는 일이 생겼다.
1945년초 일본 해군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전,
구사일생으로 헤엄쳐 살아난곳이 광나이성 추라이 남쪽해안이었다면,
호이안지역은 당시 몇 달 동안 주둔해 있으면서 목숨을 연장했던 추억이 깃든 곳이었다.
金장군의 회고.
“:일본 해군으로 참전할 때 미군함의 어뢰공격을 받아 바다에 표류한 적이있었다.
헤엄치다가 나중에 정신 차려보니 추라이 남쪽 바닷가였다.
나는 그후 몇 달 동안 다낭 남쪽의 한 암자에서 지냈다.
우리 부대가 월남1군단 지휘부가 있는 다낭 남쪽으로 옮기게 되자 인연도 참 묘한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또 이곳에서 코스터소장과 석별의 정을 나누기도 했다.
부대이동한 지 얼마 안돼 코스터소장이 미국육사교장으로 발령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귀국 후 미라이학살사건이 터지자 코스터소장이 육사교장에서 사임했다는 연락이 왔다.
또한 일계급 강등까지 당했다는 연락을 받고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이러저래 호이안지역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부대이동 후 미해병과의 접촉은 더욱 잦아졌다.
최일선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재미있는 일도 더러 생겨났다.
하루는 한국 해병 2명이 M16소총을 어깨에 메고 다낭시내를 걸어다니다가 미군 해병들과 맞닥뜨리게 됐다.
영어실력이 짧은 한국 해병 2명은 미해병대원에게 맥주 한잔 사라며 손짓발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미해병대원은 근처의 한 클럽으로 가서 맥주를 사주는 것이었다.
술을 얻어먹은 한국해병대원은 한국 해병의 자존심을 생각해서라도 신세를 갚아야겠다고 마음을 먹고는
미해병대원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다.
한국 해병 2명은 근처 천막(영관장교들의 임시숙소)에 들어가 M16소총을 장전하고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겁에 질린 영관장교들은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모두 500달러였다.
그런데 한국 해병 2명은 20달러짜리 석장을 집어들더니 휑하니 사라졌다.
이상하게 여긴 미해병장교 한명이 이들의 뒤를 밟았다.
아니? 자신들을 협박했던 한국 해병 2명은 사병클럽에서 미해병들에게 맥주를 권하면서 즐겁게 웃고 있었다.
이들은 또 태권도시범까지 보여주고 있었다.
일단 천막으로 돌아온 미해병장교는 동료장교들과 함께 즉석에서 회의를 열었다.
의견은 양분되었다.
정식보고를 통해 처벌해야 된다는 쪽과 그냥 웃어넘기자는 쪽이었다.
한참 토론이 벌어졌고 결국 후자의 주장이 강해 ‘봐주자’는 식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이 ‘사건’은 어떻게 해서든 金장군의 귀에 들어갈 것이며 따라서 金장군의 성격상 처벌받을 것이 분명하다는 동정론이 제기됐다.
이튿날 金장군과의 면담을 요청하는 미해병장교 2명이 金장군의 집무실로 찾아왔다.
이들은 어제의 사건을 자초지종 설명하면서
*500달러 가운데 60달러만 가져간 것은 도둑의 소행이 아니며
*또 60달러 전부로 미해병 친구들에게 술을 샀으니 얼마나 멋쟁이 해병이냐고 말했다.
이들은 또 엄지손가락을 내보이며 ”한국 해병은 넘버원” 이라는 말을 여러차례 강조했다.
金장군은 한바탕 껄껄 웃어대며
“그런 것을 알아주는 미해병은 더욱 멋진 넘버원”이라고 응수했다.
이렇게 해서 이 사건은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계속)
'★해병대 사령관 글 > 10대사령관 김연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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