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의 비망록 해병사관 1기생 김연상 장군편(8회)
“ 金然翔장군은 지금껏 ‘해병의 자존심’을 한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말 그대로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라는 해병정신을 생활철학으로 여기며 살아왔고 또 여생을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고 했다.
金장군은 또 ‘해병혼’은 자신뿐만 아니라 현역이든 예비역이든 해병대 출신이면 모두가 지니고 있는 공통된 생각이라고 말했다.
金장군은 이처럼 해병정신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은 해병의 상징인 ‘팔각모의 위력’에서 기인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팔각모’는 현역시절 해병대원들이 쓰는 모자로 1949년 4월 해병대 창설이후 쭉 이어져 온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金장군의 ‘팔각모’에 대한 애착은 대단하다.
하루는 蔡命新 주월한국군사령관이 청룡부대를 방문했다.
蔡사령관은 金장군과 함께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문득 막사밖을 내다보더니 "이보게 金장군, 나는 金장군한테 매우 부러운 점이 하나 있네”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金장군은 그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蔡사령관은 “저렇게 용감하고 씩씩하고 늠름한 군인을 부하로 두고 있으니 얼마나 좋겠느냐.
눈빛만 보아도 베트콩들이 나자빠지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金장군은 자신이 쓰고 있는 팔각모를 가리키며 말했다.
”갓 들어온 신병들도 팔각모만 씌웠다 하면 금방이라도 적을 잡아올 것처럼 신들린 표정들이다”
‘팔각모의 용맹성’은 월남전에서 숱한 신화를 낳았다.
67년 6월13일이었다.
이날은 청룡부대 2대대가 ‘怒龍작전’을 전개한 지 14일째 되는날이었다.
적 77고지를 완전탈환하는 것이 작전의 최종목표였다.
이날도 섭씨 45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속에 적의 완강한 저항이 예상되는 77지점을 향해 병력이 착착 이동하고 있었다.
2대대 5중대장 姜達信대위는 아까부터 무전기곁을 떠나지 않은채 첨병소대인 1소대 소대장 김광길중위에게 세부 작전상황을 지시했다.
77지점까지 가려면 몇가지 장애물을 넘어야 했다.
77목표물은 광나이 동북방 16km지점으로 그 주위에는 ‘푸니우’부락이 있었다.
또한 77지점 앞쪽에는 정글로 뒤덮인 30고지가 마을과 잇닿아 있었다.
첩보에 따르면 30고지에는 교통호와 각종 화기엄폐물 및 크고 작은 동굴이 구축돼 있어 공격시에 틀림없이 완강한 저항이 예상되는 곳이었다.
상오 10시 2대대 6중대는 77고지의 좌측을, 7중대는 목표의 우단을 맡아 공격을 개시했고 5중대는 목표의 중앙을 맡아 늪지대를 통과, 마을입구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마을입구와 30고지 하단부에 이르자 적의 저항이 거세었다.
더 전진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이때 항공관측을 하고 있던 L-19정찰기가 적의 상황을 알려왔다.
77지점내의 30고지를 중심으로 교통호 및 엄폐물을 이용, 완강히 방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姜대위는 즉각 다음 상황을 떠올렸다.
여러가지 징후, 즉 적의 병력수나 전투수법으로 봐서 바탄칸반도의 베트콩보급기지를 사수하려는 적의 48대대 병력임을 간파했다.
48대대는 게릴라전에 능수능란한 적의 최정예부대였다.
정공법으로는 희생이 많을 것으로 판단한 姜대위는 새로운 전술을 모색했다.
기만전술을 펼치며 적과 게릴라식 근접전을 벌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姜대위는 즉각 실행에 옮겼다.
1소대를 특공소대로 편성했다.
11시55분쯤 姜대위는 2소대(소대장 임영치중위)를 주력부대로 가장케 하여 30고지 좌단부로 기동사격을 하도록 했다.
또한 3소대(소대장 이광복중위)는 30고지 우단부에서 전면사격 및 지원사격을 실시하도록 명령했다.
1소대는 姜대위의 직접지휘하에 각개약진으로 적의 교통호까지 돌격을 감행, 적화기를 무력화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작전은 곧 시작됐다.
중대장 姜대위는 무전기를 들고 2소대와 3소대의 상황을 계속 청취하며 적절한 지원사격을 지시하는 한편,
30고지 정상을 중심으로 M60유탄발사기와 수류탄 등으로 집중공격했다.
사람의 키를 넘는 각종 열대풀과 가시덤불로 뒤덮인 30고지 주변에는 사수하려는 적과 이를 빼앗으려는 아군의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됐다.
姜대위는 30고지 좌우단에서 돌격하는 2.3소대를 무전으로 독려하면서 자신이 직접 지휘하고 있는 1소대를 이끌며 맹공격을 가했다.
4시간의 교전끝에 드디어 30고지를 점령했다.
기만전술을 사용한 특공공격이 주효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아군의 공격에 적은 무너지고 말았다.
뜨거운 태양, 화약냄새와 피비린내속에 1단계 작전을 성공리에 마친 5중대전중대원들은 흙투성이에다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고 가시덤불에 찢긴 손과 얼굴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지쳐 있지 않았다.
30고지 정상에 흩어진 수많은 베트콩의 시체와 무기들을 바라보며 사기는 충천해 있었다.
적사살 50명, K44소총등 여러 종류의 소화기 수십정 노획이라는 전과를 올렸다.
姜대위는 이같은 전과를 곧바로 대대에 보고한 뒤 부하들을 시켜 지체없이 도주한 적을 추격토록 했다.
또한 적이 숨어 있을지 모를 동굴을 수색하도록 지시했다.
30고지 주변 곳곳에 있을지 모를 적의 은거지를 찾아내 남아 있는 적을 완전히 소탕해야 77목표물을 송두리째 거머쥐는 것이었다.
동굴수색작업이 시작됐다.
잠시후 1소대장의 무전연락이 왔다.
동굴 하나를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소대장은 지금 막 동굴속으로 분대장이 지휘하는 1개조가 들어가고 있다고 했다.
姜대위는 후속조치에 들어갔다.
2소대를 동굴입구 주변에 경계배치했다.
3소대는 외곽에서 기습공격해 올지 모르는 적의 동태를 탐색하도록 했다.
姜대위는 동굴입구로 갔다.
이때였다.
1소대 1분대 병력이 동굴탐색을 시작한 지 15분후 동굴속에서 갑자기 콩볶는 듯한 M16소총소리와 함께 커다란 폭발음이 들려왔다.
화약연기가 동굴밖으로 확 밀려나왔다.
姜대위는 동굴속에 은거해 있던 베트콩이 던진 수류탄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아군병력의 큰 피해가 예상됐다.
아니나 다를까.
1분대원 3명이 온몸에 피투성이가 된 채 동굴밖으로 뛰쳐나오고 있었다.
동굴입구의 姜대위를 보자 ”중대장님, 분대장님이 분대장님이...”하면서 땅바닥에 쓰러졌다.
상황이 급박하다는 것을 안 姜대위는 나머지 분대원을 이끌고 동굴안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동굴입구에서 15m쯤 들어가자 누군가가 쓰러져 있었다.
분대장 정동호 하사였다.
이미 심장이 멈춰 있었다.
동굴속에서 적이 던진 수류탄을 몸으로 막으려다 장렬하게 전사했던 것이다.
姜대위는 대원들에게 시체를 밖으로 옮기게 한 뒤 다시 안으로 조심조심 들어갔다.
약 3m쯤 들어갔을 때 피비린내가 확 끼쳤다.
피범벅이 된 베트콩 시체 15구가 나뒹굴고 있었고 그 옆에는 소총들과 수류탄 30여개가 흩어져 있었다.
아군의 전사자가 발생해서 안타까웠지만 일단 첫번째 동굴작전에서는 의외의 대승을 거뒀다.
姜대위는 대원들과 함께 딴 동굴을 찾아 정글속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10여분후 앞서가던 1소대쪽에서 “중대장님 수류탄입니다”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姜대위는 반사적으로 “엎드려라 모두 엎드려!”라며 소리치고 나서 막돌아서려고 할 때 ‘쾅’하고 수류탄이 8m전방에서 터졌다.
이와 동시에 아군측이 쏘아대는 M16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총소리는 곧 멈췄다.
姜대위는 대원들이 무사한지 살피려고 막 일어서려는 순간 “중대장님”하며 1소대장이 뛰어왔다.
그의 손에는 피묻은 자동소총 한 정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적의 방독면 1개와 베낭.
77지점에서 마지막 저항하던 적을 완전히 섬멸시켰다는 것이었다.
姜대위는 기뻐 어쩔 줄 몰라 얼른 일어서려다가 그만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왼쪽 대퇴부에서 벌써 피가 흥건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때서야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온몸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 같았다.
바로 전 마지막 베트콩이 던진 수류탄 파편을 맞았던 것이다.
어느 새 위생하사가 달려와 지혈 등 응급치료를 했다.
그러나 姜대위는 흐뭇했다.
자신의 상처를 염려하는 위생하사의 어깨를 두드리며 “朴하사,수고했어. 귀대하면 맥주 한잔 사지”하고 말했다.
마치 작전을성공리에 마치고 귀대하는 전쟁영화의 한 장면처럼.... 이렇게 해서 ‘노룡작전’은 성공리에 끝났다.
현재 대한상이군경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姜達信씨(해사 14기)는
“당시 응급치료를 받고 나서 필리핀 클라크공군기지로 옮겨 치료를 계속 받았다”면서
”완치불가로 그해 12월 경남 진해병원에서 대위로 전역했다”고 말했다.
姜씨는 노룡작전때의 용전으로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金장군은 월남전을 회고하면서
“전장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위해 희생한 전우가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월남전 당시 해군 군의관으로서는 건군이래 처음으로 전사한 한 장교를 회상했다.
金장군의 회고.
”...67년 1월 청룡부대 전체가 투망작전을 펼 때였다.
이때 金壽鉉해군대위가 군의관으로 파견나와 있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부상병을 치료하던 중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
어떤 전쟁을 들여다봐도 군의관이 전사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는 서울출신으로 어려운 가정환경속에서도 경기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서울대 의대를 거쳐 서울대병원 인턴과정을 수료한 후 66년 3월 지원입대했다.
그는 작전중에도 틈틈이 민간인 진료에도 열성적이어서 이에 감동한 월남주민들이 자진해서 중요한 적의 정보를 제공해 오는 등 주월한국군의 승리에 많은 공헌을 했다..."
金장군의 계속된 회고.
“...전장에서 지휘관은 늘 고독한 법이다.
하루는 티우대통령이 청룡부대를 방문한다기에 월트장군(주월미제3상륙군사령관)과 차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었다.
월트장군은 한국동란때 미해병 5연대장으로 참전한 경험이 있어 그의 별명은 전쟁밖에 모르는 지독한 ‘곰’이라고 지어졌다.
그와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티우대통령을 기다리는데 비행기가 계속 연착이라는 것이었다.
갑자기 월트장군은 막사밖으로 나가 혼자서 먼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뒤따라 나갔더니 월트장군은 한손으로 눈가를 몰래 훔치고 있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월트장군은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처음 월남에 와서 지금까지 저 앞에 보이는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너무나 많은 싸움을 했지.
서로가 피도 많이 흘렸고......’
그때 월트장군의 뒷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게 생각나는 것은 지휘관의 고독을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계속)
(金文기자) 바로잡습니다
지난주 게재된 ‘장군의 비망록’(김연상장군편7) 내용중 71쪽 사진설명에서
‘월남1군단장’을 ‘金榮寬해군참모총장’으로,72쪽 좌상부 위로 둘째줄 ‘청룡부대를 작전통제하에...’를 ‘청룡부대를 작전지도하에...’로 각각 바로잡습니다.”””
'★해병대 사령관 글 > 10대사령관 김연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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