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10대사령관 김연상

장군의 비망록 해병사관 1기생 김연상 장군편(10회)

머린코341(mc341) 2015. 1. 12. 19:21

장군의 비망록 해병사관 1기생 김연상 장군편(10회)

 

“ 지난 66년 8월 김해 공군기지에 도착한 해병대원 110명은 정문위병소의 저지를 뚫고 연병장으로 질주했다.

 

해병대원들은 군용트럭이 아닌 2대의 민간인 트럭을 빌려타고 숨가쁘게 달려왔던 것이다.

 

이유는 단 한가지. 하루전 공군장교들이 김해근처에서 해병대원 4명을 집단구타한데 대한 보복을 하기 위해서였다.

 

해병간부후보 35기들로 주축이 된 해병대원(예비소위)들은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내무반 막사로 치달렸다.

 

이때가 상오 5시30경이었다.

 

이들은 우선 막사주변의 전화선을 끊고 안으로 쳐들어 갔다.

 

내무반안의 공군장병들은 아직도 단잠에 빠져 있었다.

 

옷을 벗고 있는 터라 소위인지 중위인지 계급을 분간할 수 없었다.

 

잔뜩 독기를 품은 해병대원들은 "우린 해병대다. 너희들에게 따끔한 맛을보여주기 위해 왔다”고 불침번에게 통고한 뒤 잠자고 있던 공군장병들을 향해 사정없이 주먹세례를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서 ‘우당탕’ ‘퍽퍽’소리가 나면서 내무반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해병대원들이 막사 출입문을 지키고 있었지만 일부 도망자가 생겼다.

 

도망자중 한사람은 곧장 당직사령실로 달려가 이같은 위기상황을 보고했다.

 

드디어 문제는 커지기 시작했다.

 

부대 요소요소에서 대공신호탄이 터지고 비상사이렌이 울렸다.

 

적이 습격해 왔을 때 알리는 긴급비상이었다.

 

해병대원들은 주먹세례를 일단 중지하고 연병장으로 나왔다.

 

이들은 연병장에 재집결, 해병대원 구타사건을 거론하면서 ‘당직사령관이 직접 나와서 공개사과하라’고 외쳐댔다.

 

그렇게 해야 돌아가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때였다.

어디선가 나타났는지 공군장병 1천여명이 삽과 곡괭이 등을 손에 들고 해병대원들을 때려잡을 듯이 달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들은 비행장인근에 주둔해 있던 주력부대 장병들이었다.

 

이들은 또 돌멩이를 던지면서 험악하게 접근해 왔다.

 

당황한 해병대원들은 일단 돌멩이 세례를 피하기 위해 활주로 끝 쪽으로 내달렸다.

 

그곳에는 수송기 10여대가 서 있었다.

 

비행기밑으로 가면 비행기 파손을 우려해서 돌멩이를 던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었다.

 

공군장병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돌을 던졌다.

 

비행기의 유리창이 깨지는 등 일부 파손되는 일이 벌어졌다.

 

해병대원들은 막다른 골목에 부딪쳤다.

 

출구가 완전히 막힌 채 포위당할 위기에 놓였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해병대원들은 비행기 뒤편에 있던 철조망을 부쉈다.

 

철조망기둥이 나무였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이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철조망뒤에는 인적이 전혀 없는 폭 100m정도의 늪지대였다.

 

앞에는 죽음의 늪, 뒤에는 적(?).

”무조건 건너라”고 하는 소리와 함께 너나할 것 없이 헤엄치듯 늪을 통과했다.

 

일부는 뒤따라오는 공군장병들과 육박전을 벌이기도 했다.

 

부상도 많이 발생했다.

 

결국 김해비행장을 습격했던 해병대원110명은 보복작전을 완료하고 가까스로 적지에서 빠져나오게 됐다.

 

공군장병들은 더 이상 추격을 못하고 닭쫓던 개가 지붕을 쳐다보는 식으로 늪 건너편에서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이때 어디서 담배를 구해왔는지 해병대원들은 저마다 담배를 피워대기 시작했다.

 

잠시후 공군측에서 연락을 취했는지는 모르지만 해병대 호송트럭 2대가 현장에 도착했고 해병대원들은 그제서야 부대로 복귀하게 됐다.

 

바로 이시각.

사건내용을 보고받은 姜起千해병대사령관은 작전참모부장 金然翔장군을 불렀다.

 

즉각 비행기를 타고 현장에 가보라는 것이었다.

 

金장군은 곧 현장에 도착했다.

 

얼마나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던지 비행장 곳곳에 돌멩이들이 널려 있었다.

 

철조망이 무너지고 핏자국도 여기저기에서 눈에 띄었다.

 

金장군은 늪가에서 주민 한사람을 만났다.

 

주민은 金장군에게

“아직껏 이 늪을 건넌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한명도 아니고 100여명 모두가 늪을 건너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사람이 아니라 영락없는 귀신들이었다”고 목격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金장군은 현장에서 자초지종 조사한 뒤 서울로 돌아와 姜起千사령관에게 저간의 상황을 보고했다.

 

이미 언론에서 이같은 사실을 보도한 상태여서 문제는 쉽게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姜사령관은 “金장군은 국회에 가서 사과하고 나는 청와대와 국방부에 가서 뒷수습을 하겠소”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金장군은 그 길로 곧장 金鍾泌공화당의장 閔丙權국회국방위원장 徐範錫의원 등을 만나

“젊은 혈기에서 비롯된 일인데 어떡하느냐”면서 더 이상 문제가 확대되지 않기를 간청했다.

 

결국 해병대원 주동자 몇 명이 군복을 벗는 선에서 타협점을 찾았다.

 

해병간부후보 35기로 당시 주동자중 한사람이었던 全道奉해병소장은 “그때 군법무관이 현재 全斗煥전대통령의 변호사인 李亮雨씨였다”면서 그 사건후 몇 달 동안 집에 있다가 동료들의 도움을 받고 다시 해병의 상징 얼룩무늬 군복을 입게 됐다고 말했다.

 

金장군은 “당시 이사건은 문제가 큰 것은 사실이었지만 군고위층에서도 충분히 이해하는 쪽으로 받아들였다”면서 35기출신들은 월남전에서도 적진지에 깊숙이 파고들어 전과를 올리는 용맹성을 발휘했다고 이들의 해병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金장군은 지난 두 달 동안 ‘뉴스피플’과 인터뷰를 하면서 다시 전쟁의 악몽이 되살아나 마음이 영 편치 않다고 말했다.

 

동안 잊고 지냈던 피비린내 나는 전쟁상황을 다시 떠올린다는 것은 마음만 괴로울 뿐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었다.

 

한편 현역시절을 회상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해병의 도전적 스타일이 되 살아나는것 같다고 金장군은 솔직한 심정을 털어놨다.

 

金장군은 월남전을 끝으로 자신의 생애에서 7년동안의 전쟁경험을 마감하게 된다.

 

金장군은 월남전 당시 가장 통쾌하게 싸웠던 것은 ‘비룡작전’ ‘해룡작전’ 등 수 차의 걸친 대규모의 공지합동작전을 전개했던 일이라고 자랑했다.

 

그러나 공격만큼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고 덧붙였다.

 

특히 이들 작전은 월남전을 통틀어 최대의 작전으로 대개 월남 북위 17도선 최전방지역을 정찰하던 청룡부대원들이 대규모의 적 은거지를 찾아낼 때 전개됐다.

 

하나의 예.

 

어느 날 전방을 수색정찰하던 청룡부대원들이 적의 은거지를 찾아내 金然翔장군에게 보고했다.

 

金장군은 상황판단을 한 뒤 미해병과 미공군 등에 지원요청을 했다.

 

대규모작전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 金장군의 뜻이었다.

 

미군측은 한국군 지휘관의 요청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우선 B52기가 출격했다.

 

B52는 당시 최대의 전략폭격기로 1만피트 상공에서 수 시간 동안 목표물에 융단폭격을 가했다.

 

이 폭격은 아무리 정글숲이 우거진 지대라고 해도 한번 공격시 반경 5km이내에는 정글지대가 허허벌판을 밭갈아 놓은 것처럼 변해버린다는 것이 金장군의 설명이다.

 

일차공격이 끝나면 F4팬텀기 16대가 인근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게 된다.

 

이때 金장군은 지휘용 헬기에 탑승,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다음 작전을 지시했다.

 

시누크헬기 40대가 일제히 발진했다.

 

이때의 모습은 마치 상공을 완전히 뒤덮는 형태로 일대 장관을 연출하기 마련이다.

 

1개 분대씩 태운 시누크헬기가 金장군의 명령에 따라 목표지점 요소요소에 분대원들을 내려놓으면 그 주위에는 또 다른 공격용 헬기가 엄호사격을 가했다.

 

金장군의 회고.

 

 “”...월남전에서의 수많은 작전중 비룡.해룡작전 등 대규모 작전, 즉 B52와팬텀 그리고 수십대의 헬기를 지원받아 공지합동작전을 펼쳤던 것이 가장 자랑스럽다.

 

이 작전은 한국군 지휘관으로서는 청룡부대장이 유일하게 작전권을 완전히 행사했다.


하늘을 뒤덮는 수십대의 헬기를 상상해 보라.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기 위해 쏜살같이 하강하듯 헬기가 순식간에 병사들을 목표지점에 내렸다가 다시 싣고 가는 모습들...

 

정말 영화의 한장면처럼 잊지 못할 감동과 긴장의 순간들이었다.

 

이런 작전이 전개될 때면 해병대원들은 눈에는 광채가 서려있고 숨소리하나 안들릴 만큼 바짝 긴장돼 있었다...

 

金장군은 또 월남전을 회고하면서 영원히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낭만적인 추억거리를 간직하고 있다.

‘횃불작전’이 바로 그것이었다.

 

해병대원들의 사기진작을 위한 ‘메뉴’ 중 하나로 위문단이 오거나 큰 작전이 끝난 뒤 남지나해를 바라보는 호이안 해안가 모래사장에서 이 작전이 이루어졌다.

 

이런 날은 몇 트럭분의 장작과 많은 양의 기름을 미리 준비해 놓은 다음, 달빛 은은한 모래사장위에 모닥불을 커다랗게 피워놓고 쭉 둘러앉아 행사를시작했다.

 

金장군의 회고.

 

”...행사 시작전 나는 몇 마디를 던진 다음 자리를 피해줬다.

그러면 해병대원들은 모닥불 주변을 빙빙 돌며 ‘흘러가는 물결 그늘 아래...’ 등 온갖 해병대노래들을 불러댄다.

이런 광경을 공관에 앉아 창너머로 가만히 응시하고 있노라면 어느 새 눈가에는 눈물이 맺히곤 했다...

 

이와 비슷한 또 다른 케이스.

 

68년 4월 어느 날이었다.

 

진지구축작업이 끝나고 전쟁도 약간 소강상태였다.

 

참모들이 모처럼 외출을 하자며 金장군에게 건의했다.

 

金장군은 이들과 함께 다낭시내의 월남 1군단장 공관으로 갔다.

 

金장군은 참모들과 휘하 지휘관들에게 술이나 한 잔 하고 오라며 내보냈다.

 

그런데 밤중에 참모 두 명이 왔다.

 

그들은 부대장이 이렇게 앉아 있으니 도저히 술이 넘어가지 않는다고 하면서 특별히 조용한 곳을 마련해 놓았으니 그곳에서 술 한잔 하라고 간청했다.

 

金장군은 할 수 없이 경호책임자인 高상사와 함께 은밀하게 어느 벽돌집 2층으로 들어갔다.

 

장군이 움직일 때는 적에게 노출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비밀리에 이동했던 것이다.

 

2층에 올라가보니 술상이 준비돼 있었고 예쁘게 생긴 월남여자 2명이 시중을 들었다.

 

金장군과 高상사는 술을 몇 잔 들이켰다.

 

그런데 밖에서 독일병정들이 행진하는 듯이 군화발소리가 저벅저벅 들려왔다.

커튼 너머 창밖을 슬그머니 바라봤더니 무장한 해병대원 수십 명이 어느 새 2층 집 입구를 왔다갔다 하면서 경호 경계를 서고 있는 것이 아닌가.

 

金장군은 또 한 번 가슴이 뭉클했다.

 

이 광경을 본 金장군은 들던 술잔을 내려놓고 高상사와 함께 뒷문을 이용, 몰래 공관으로 돌아와 버렸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金장군은

“이봐, 高상사. 내일 참모들이 물어보고든 일찍자리를 떴다고 하지 말고 모처럼 술 잘 마셨다고 하게”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金장군은 68년말 귀국했다.

 

그의 귀국은 태평양전쟁 한국전쟁 월남전 등그가 경험했던 7년간의 전쟁을 마감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金장군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중에 나오는 ‘전쟁이나 혁명은 다른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장이다’라는 말을 새삼 떠올렸다.

 

金장군은 또 손자의 말 중 ‘兵者國之大事 死生之地 存亡之道 不可不得也’ 즉 ‘병자(전쟁)란 나라의 가장 큰 중대사이며 많은 사람이 죽고 살고 국가가 존속하느냐 망하느냐가 달려 있다’는 말을 전쟁중 중요한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특히 金장군은

“병사는 자기를 알아주는 상관에게 죽음으로 충성을 한다”면서 현재 우리 군의 구조를 감안할 때 하사관을 위한 제도개선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 예로 미국의 경우 하사관은 능력에 따라 소령까지 진급할 수 있는 제도를 두고 있듯이 외국의 좋은 제도를 고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金장군은 월남전 회고를 마감하면서

“세계 여러 나라는 전쟁에 의해 존망이 엇 갈렸고 지정학적으로 일본과 중국사이에 있는 한반도 역시 과거사를 돌아볼 때 경계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金장군은 또 최근 해병의 위상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며 전체 해병전우들의 염원인 ‘해병회관’건립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됐다고 귀띔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