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장군 비망록] 전 해병대 사령관 전도봉 장군(8회)
전도봉 장군은 현역 장교 때 필화사건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이는 해병대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었다.
79년 7월 전 장군은 해군대학 학술처 교관과정을 마쳤다.
그런 다음 전 장군은 역시 해군대학에 남아 참모과정을 공부하게 됐다.
그러니까 10·26사건이 발생하기 3개월 전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윤동휘 해군대학 총장(해사9기 예비역 준장)이 전 장군(이하 중령)을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해대 학술처장인 김경섭 대령(해사15기 예비역 소장)과 함께 호출당했던 것이다.
“이봐, 전 중령. 할 말이 있네.”
“네 총장님. 말씀하십시오.”
“전 중령, 자네 논문을 준비하고 있지? 그 제목이 뭐라고 했나?”
“네, 총장님. ‘해병대 구성원의 전통의식 고찰’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그 논문을 중단하게. 절대 작성해서는 안되네.”
뜻밖의 명령에 전 중령은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논문을 쓰지 말라니, 말이나 될 법한 일인가.
그동안 온갖 자료를 뒤지며 열심히 논문을 준비해 왔는데 중단하라는 것은
‘너 그짓을 하려면 군복을 벗어’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총장님, 이유가 뭡니까? 자료준비도 다 마쳤습니다.”
“글쎄, 이건 명령이네. 논문을 절대 써서는 안되네. 알겠나? 김 대령도 그리 알고 잘 지도해 주게.”
전 중령의 얼굴은 어느새 울근불근 일그러져 있었다.
전 중령은 일단 이러쿵저러쿵 대답을 하지 않고 그냥 밖으로 나왔다.
김 대령도 같이 따라나왔다.
김 대령이 앞서 가던 전 중령을 불렀다.
“이봐, 전 중령. 자네 꼭 논문을 쓸 생각인가?”
“네 처장님,꼭 쓰고 싶습니다. 군복을 벗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글을 남기겠습니다.”
“그래? 자네가 정 그렇게 하고 싶다면 하게나. 내가 책임지겠네.”
김 대령은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을 지냈던 터라 사고방식이 총장과는 조금 달랐다.
그렇다면 해군총장이 왜 전 중령을 불러 논문작성을 중단하라고 했을까.
전 중령이 준비하는 논문 내용은 당시 분위기로써는 일대 사건을 일으킬 여지가 다분히 있었다.
논문제목은 ‘해병대 구성원의 전통의식 고찰’이었다.
얼핏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전 중령은 평소 군생활을 하면서 언젠가 해병대의 해체이유를 꼭 밝히고 싶었다.
73년 10월 왜 갑자기 해병대가 해체되어야 했는지 그 진실을 공개하고 싶었다.
그래서 전 중령은 해군대학 재학 중
논문을 통해 해병대의 위상을 새삼 고찰해 본다는 취지 아래 논문작성의 계획을 세웠다.
논문의 주요 내용은
△해병대의 창설배경
△해병대의 해체이유와 문제점
△해병대 앞날과 올바른 방향제시 등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미리 알고 있던 윤동휘 해대총장은 전 중령을 불러 논문중단을 명령했던 것이다.
윤 총장은
“이제 와서 해병대 해체 이유를 밝히면 뭐하느냐”
“그러한 논문작성은 수뇌부에 대한 반론제기이며 해병대 장병들에게 동요만 일으킬 수 있다”는게 중단명령의 이유였다.
전 중령은 복도를 걸어나오면서 김 대령에게 다시 말했다.
“처장님. 후배들에게 해병대의 방향을 제시하고 진실을 알리는 차원인데 뭐가 잘못됐습니까?”
“그래, 자네 말이 맞네.”
전 중령은 이와 관련된 자료를 1년여 동안 어렵게 뒤지며 준비를 해왔던 것이다.
국회도서관은 물론이고 국방부 자료실, 전사편찬위 자료실 등을 찾아 관련자료를 하나하나 수집했다.
또한 예비역 장성 등을 만나 여러 비화와 조언도 들었다.
주위에서는 미친 듯 뛰어다니는 전 중령을 보고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했다.
결국 전 중령은 해대총장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해 10월 논문을 탈고했다.
그런 다음 책자로 만들어 해군본부와 해병대 장교들에게 우편으로 발송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바로 그날 국군기무사에서는 발칵 뒤집혔다.
해군본부에 파견된 기무부대에서는 전 중령을 당장 호출했다.
그러나 전 중령은
“내가 뭘 잘못했느냐. 조사하고 싶으면 직접 와서 하면 될 것 아니냐”며 호출에 응하지 않았다.
이튿날 기무사 조사요원들이 전 중령에게 들이 닥쳤다.
논문을 작성한 저의가 무엇이며 인쇄는 어디서 했는지 등 꼬치꼬치 캐물었다.
전 중령은 논문의 인쇄작업을 해군대학 등사실에서 했다.
일반 인쇄소에서 하려면 12만원 정도 지불해야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 중령은 등사요원에게 담배 몇 갑 사주고 몰래 부탁을 했던 것이다.
만약 이같은 사실을 말했다가는 등사요원은 단칼에 날아간다는 것쯤은 뻔히 알고 있었다.
“논문 쓰게 된 배경이야 논문 머릿말에 전부 나와 있고, 인쇄는 서울에서 했소.”
“서울 어딥니까?”
“그것까지 말할 수 없네.”
전 중령은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다음날 전 중령은 해군본부 보안부대장 변모 제독한테 찾아갔다.
변 제독과는 어느 정도 아는 처지였다.
전 중령이 해군본부 예산담당관으로 근무할때 변 제독은 해군본부 보안처장으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 중령은 이미 변 제독에게 논문 한 권을 우편으로 발송한 상태였다.
“전 중령 아닌가. 앉게. 그래, 요새 뭐가 문제가 있다며?”
“제독님, 바로 저 논문 때문에 난리들입니다.”
“그래?”
변 제독이 자리에 일어서며 운영과장을 불렀다.
잠시 후 운영과장이 들어왔다.
“이봐 운영과장, 저 논문이 뭐가 문제인가? 나도 읽어봤네만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변 제독은 사실 전 중령의 논문을 읽어보지는 않았다.
“위에서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그래? 운영과장이 잘 좀 처리를 해봐.”
전 중령은 이 자리에서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겠다. 만약 잘못됐다면, 문제점을 확실히 제시한다면 옷을 벗고 떠나겠다”는 점을
여러차례 강조했다.
기무사 요원들의 조사는 며칠 더 계속됐다.
대개 일과 후 저녁 무렵에 조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이 지나 밤이 되도록 기무요원들의 연락이 없었다.
이날따라 전화 한 통화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 밤10시쯤 전군에 비상이 걸렸다는 소식이 들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됐다는 것이었다.
전 중령에 대한 기무사의 조사는 더 이상 진전되지 없었다.
결국 10·26사건으로 전 중령은 군복을 벗기 직전에서 살아 남았다.
아마 10·26사건이라는 국가적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면 전 장군은 체제비판죄로 법정에 섰을 가능성이 높았다.
전 장군의 회고.
“나는 정말 군복을 벗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글(논문)을 남기고 싶었다.
해병대의 정신이 무엇이고 해체이유는 또 무엇이며, 앞으로 해병대가 나아가야 할 방향 등에 대해 솔직하게 쓰고 싶었다.
아마 10·26사건이 아니었다면 당시 그 논문은 체제비판으로 몰려 적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것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모험이었다.
정말이지 작품 하나 남기고 군을떠나고 싶었다.”
당시만 해도 ‘위태위태하기’만 했던 전 중령이 나중에 장군이 되고 해병대사령관까지 올라가리라고 누가 예상했을까.
전 장군은 올해 8월말부터 9월초까지 미국을 다녀왔다.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여러 해병대 관련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였다.
전 장군은 “그동안 ‘뉴스피플’을 통해 언급한 내용은 사실상 주변잡기적인 흥미위주의 얘기였다”면서
“앞으로 해병대의 발전, 우리 군의 발전을 위해 진지하게 감추어진 비화를 밝히겠다”고 말한다.
전 장군은 그러면서
△장군진급 비화
△해병대의 법제처 상륙작전
△사단장 때 사령관과의 갈등
△사령관 시절 군수뇌부와의 싸움 등등을
조금씩 언급하기 시작했다.
우선 장군진급 때를 떠올렸다.
전 장군은 85년 9월1일자로 대령진급을 했다.
그는 연합사 작전계획처 부처장을 1년여동안 지낸 뒤
1사단 군수참모 자리(87년 2월∼88년 6월)로 옮겼다.
군수참모 시절 전 장군은 1사단의 주변 환경을 180도 바꿔놓았다.
1사단 주위 공터 80만평에다 80만그루의 소나무를 심는 대규모 작전을 펼쳤다.
말이 80만그루이지 1개 대대를 동원, 묘목을 내리는 데에만 1주일이 걸릴 정도였다.
병사들도 이 지겨운 일을 좋아할 리 없었다.
전 장군의 진두지휘하에 작전은 시작됐다.
작전의 캐치프레이즈는
“나무에도 생명이 있다. 다만 말을 하지 않을 뿐이다. 생명을 경시하는 자는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였다.
1주일동안 5년생 묘목을 전부 운반한 뒤 나무심기 작업에 들어갔다.
매일 아침 현장에 나가 한 그루 한 그루 소중하게 다루도록 감시하고 독려했다.
그러기를 6개월여. 1사단 주변의 광활한 공터는 완전히 소나무 숲으로 뒤덮였다.
지금은 나무가 완전히 자라 울창한 숲으로 변해 있다.
처음에 설마했던 최갑진 1사단장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연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기분이 좋아진 최 사단장은 전 장군에게 3연대장에 보임시켰다.
3연대장 출신치고 장군 진급이 안된 사람이 없을 정도로 3연대장은 요직중의 요직이었다.
이후 전 장군은 김포지역 해병2사단 참모장으로 옮겼다.
최전방 지역인 2사단 참모장에 있을 때 전 장군은 세차례의 운좋은 사건을 접한다.
89년 여름에 임정희씨 (개성병원 간호원 출신) 등 귀순자 3명을 초동단계에서 적발, 신속하게 처리했던 것이다.
이는 2사단이 평소 경계근무를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를 입증해준 것이었다.
그래서 2사단은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았다.
대통령 표창은 국군의 날이나 특별한 경우에만 받는 게 상식인데
평상시에 표창을 받는것은 매우 드문 일이서 군내부에서 모두들 부러워했다.
90년 1월1일자로 그는 영광스러운 장군계급장을 단다.
이에 앞서 89년 10월 장군 진급심사가 이루어졌다.
어느날 기무사 보안처장으로부터 전 장군한테전화가 걸려왔다.
“나요, 기무사 보안처장이오.”
“어쩐 일입니까. 보안처장께서.”
“전 대령은 매우 운이 좋은 사람이오.
내가 휴가 다녀온 사이에 장군 진급심사가 이미 끝났더군요. 아무튼 축하합니다.”
기무사 보안처장은 장군 진급심사 때 전 장군의 과거전력을 한번 문제 삼으려고 했는데
휴가 가는 바람에 깜빡 지나쳤다는 것이다.
장군 계급장을 달던 날 서울 대방동의 해군회관에서는 이를 축하하기 위한 회식자리가 벌어졌다.
김종호 해군총장 내외를 비롯, 최갑진 해병대사령관 등 해군·해병대 고위 장성들이 모두 참석했다.
술잔이 돌아가고 분위기가 조금씩 무르익기 시작했다.
이때 전 장군은 술잔을 들고 최 사령관한테 다가갔다.
“사령관님,고맙습니다.”
“아니, 나 말인가.
이봐, 전 장군. 저쪽 해군총장의 눈빛을 보게. 해군총장에게 먼저 권하고 오게나.”
“아닙니다.사령관님이 저희 직속 상관 아니십니까. 먼저 받으십시오.”
최 사령관이 왜 해군총장의 눈빛을 염두에 두었을까.
잠시후 전 장군은 술잔을 들고 김 총장에게 다가갔다.
“총장님,술 한잔 올리겠습니다.”
“저리 비켜,술 안마셔!” 김 총장은 언성까지 높였다.
갑작스러운 총장의 태도에 당황한 전 장군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자리에 돌아와 앉은 전 장군은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왜 술잔을 뿌리쳤을까.
한참 고민하던 전 장군은 부인과 함게 다시 김 총장에게 다가가 정중히 술잔을 올렸다.
“총장님, 술 한잔 받으십시오.”
그제서야 김 총장은 술잔을 받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봐, 자네 진급시키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알아? 똑바로 해.”
갑자기 뇌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최 사령관이 아니라 김 총장이구나.
전장군은 그동안 최 사령관이 자신의 진급을 위해 애를 써준 줄로만 알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최 사령관은 한때 전 장군의 진급을 반대했었다.
사연은 이러했다.
평소 김 총장과 절친하게 지내는 구윤서씨(전 청소년연맹 사무총장)가 있었다.
구씨는 김 총장과 경북대 사대부고 동기동창이었다.
구씨는 또 전 장군과 잘 알고 지내는 송동근씨와도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
송씨는 구씨에게 틈만 나면 전 장군의 얘기를 꺼내면서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러자 구씨는 전 장군의 의사와 상관없이 진급 때가 되자 김 총장에게 자연스럽게 전 장군의 얘기를 꺼냈다.
해병대에 해사 출신이 아닌 일반 대학(연세대) 출신이 있는데
일도 잘하고 그러니 본보기로 진급시켜 주는 것도 일리가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식으로 귀띔을 해줬다.
결국 김 총장은 전 장군의 진급문제를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또 김 총장은 최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전 장군을 진급시키는 문제를 생각해보라”고 했다.
그러자 최 사령관은 내심 불쾌하게 생각했다.
안 그래도 최 사령관은 전 장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터라 장군반열에 올려놓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거꾸로 돌아오니 괘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빽’이나 쓰고 다니는 전 장군이 얄미웠던 것이다.
최 사령관은 그래서 전 장군의 진급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같은 사실은 회식이 끝날 무렵 최 사령관의 고백으로 전말을 알 수 있었다.
“자네 장군진급을 시켜준 사람은 내가 아니라 김 총장일세.”
전 장군은 대망의 별을 달고 나서 극비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군지휘 체계개편안 작업과 해병대의 기능을 원상회복시키는 작업이었다.
이른바 ‘법제처상륙작전’이었다.
출처 : 서울신문, 김문 기자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code=people&id=20010914006004&keyword=전도봉'★해병대 사령관 글 > 22대사령관 전도봉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든 해병대원은 소총수 (0) | 2015.11.03 |
---|---|
싸움에서 지면 이는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0) | 2015.11.03 |
[新장군 비망록] 전 해병대 사령관 전도봉 장군(7회) (0) | 2015.01.29 |
[新장군 비망록] 전 해병대 사령관 전도봉 장군(6회) (0) | 2015.01.26 |
[新장군 비망록] 전 해병대 사령관 전도봉 장군(5회) (0) | 2015.0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