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6대사령관 공정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52) - 김용호 소대장의 자결

머린코341(mc341) 2015. 2. 4. 22:01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52) - 김용호 소대장의 자결

 

김용호 소위

 

사천강 주저항선 전초진지인 33진지(45고지)에서는 더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3대대 11중대 3소대 장병들은 날이 밝으면 진지 고수 임무를 다른 부대에 넘겨주고 떠나게 돼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밤중에 2개 중대 병력으로부터 공격을 당했다.

10월 31일 밤 10시 50분, 피가 튀는 공방전 끝에 적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피해가 너무 컸다. 소대 병력의 절반이 죽거나 다쳤고, 유선·무선 모든 통신수단이 단절돼 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자정이 조금 지나 적의 두 번째 공격을 받았다.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싸워야 한다.”

 

소대장 김용호(金龍鎬) 소위는 목청이 터지도록 외쳤다. 소대원들은 이를 악물고 싸웠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반쯤 남은 소대 병력으로 중대 병력을 당할 수는 없었다. 모두들 장렬한 최후를 각오해야 했다. 그때 진지 상공에 몇 발의 VT 신관탄이 날아들었다. 적병들은 혼비백산했다. 죽고 다치고 도망치고…. 그런데 아군 진영도 조용했다.

나가자 해병 노래도 들리지 않았다. 유선도 무선도 통하지 않아 안달이 났던 전투단 본부에서는 진지를 빼앗긴 것으로 알았다. 지휘부는 즉각 지원부대를 보내라고 명령했다.

 

2개 소대 병력이 달려갔을 때 33진지는 지옥 바로 그대로의 참상이었다. 교교한 달빛 아래 피아 양측의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고, 한쪽에서는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들려 왔다. 네 사람의 부상 해병이 구출됐다.

 

고지 정상에서는 끔찍한 주검이 발견됐다. 소대장 김 소위가 권총으로 머리를 쏘아 자진한 것이다. 시체 옆에는 종이 한 장이 달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김 소위가 급히 쓴 유서였다.

 

‘중대장님께, 중대장님이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시는 부하들을 다 잃어 버린 죄책감, 또 살아서 대할 면목이 없어, 대원들이 잠든 이 고지 위에서 죽음을 같이하여 속죄합니다.’

급하게 흘려 쓴 만년필 글씨지만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부하들을 잃은 죄책감을 죽음으로 속죄하려 하다니! 동서고금의 전쟁 역사에 이런 지휘관이 있었던가. 그의 죽음은 살아남은 자의 가슴에 회한의 못이 돼 깊이깊이 박혔다. 한 치 한 뼘의 땅도 적에게 내줘서는 안 된다는 결의를 굳히는 동력이 됐다.

뒷날 김 소위 3형제가 모두 전사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해병대에서는 그의 죽음이 잊을 수 없는 신화가 됐다.

전투가 끝난 뒤 중대장 임경섭(林炅燮) 중위는 화기소대장 이춘몽(李春夢) 소위를 경북 영천 김소위 집에 보내 정중하게 전사 소식을 전했다.

 

그러면서 조심스레 조위금 봉투를 내밀었다. 김 소위 아버지는 그것을 사양했다. 두부공장 배달 일로 근근이 먹고사는 처지지만 자식의 목숨 값을 받는 것은 아비의 도리가 아니라고 했다던가.

 

해병대에서는 두 번째로 사람을 보냈지만 이번에는 만나지도 못했다. 아들의 동료를 만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었을 것이다. 1·4 후퇴 때 월남한 그의 아들 3형제 가운데 둘은 육군, 하나는 해병대에 갔다고 한다. 무슨 기구한 운명의 장난이었던지, 그는 세 아들 모두를 전선의 고혼으로 바친 비운의 주인공이 됐다.

 

그로부터 5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 필자는 공적심사위원의 자격으로 2000년 11월 1일, 전쟁기념관에 고 김용호 해병중위를 ‘이 달의 호국인물’로 선정, 엄숙한 현양행사를 개최했다.

1952년 10월 31일부터 11월 1일까지 벌어진 사천강 중공군 2차 추계공세 전투에서 적 115명을 사살하고 33진지를 사수한 공로였다. 1929년 9월 16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그는 23년의 짧은 인생을 그렇게 마쳤다.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