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50) - 피로 지킨 서부전선
혼비고지 전투
휴전회담 속도에 따라 고지 탈환전은 가열됐다. 36고지에 대한 중공군의 두 번째 기습공격일은 1차 공격으로부터 2주일 후인 1952년 9월 19일이었다. 이 공격을 받은 아군은 인해전술에 밀려 잠시 진지를 내주었다가 피가 튀는 몇 차례 탈환전 끝에 되찾았다.
당시 36고지를 지키던 부대는 3대대 11중대 1소대였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적이 그렇게 세게 나올 줄은 몰랐다. 뒤에 파악된 바로는 그 전투에서 중공군은 무려 3000발의 각종 포탄을 아군 전초진지에 퍼부었다. 초가을 찬비가 추적거리는 저녁시간에 적의 포성이 울리더니 이내 천지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적은 박스마인 공격을 못견뎌 패퇴했던 36고지에 주공부대를, 67고지에 조공부대를 배치했다. 며칠 동안 계속된 적의 포격으로 진지가 파손된 터에 집중탄우가 쏟아지자 응급복구를 끝낸 교통호마저 무너져 메워졌다.
전차포의 직격에 노출된 앞 사면 호와 벙커들도 제 기능을 못할 지경이었다. 맞서 싸우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었다. 사격 범위를 넓혀가면서 돌격해 오는 적을 물리치고 물리쳐도 적은 파도처럼 밀려 왔다. 어떻게 감당해 볼 도리가 없었다.
36고지를 점령한 적은 파괴통으로 진지를 폭파하고, 그 속에 매몰된 아군 병사들을 끌어내 살육을 즐겼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우리는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31고지를 지키던 11중대 선임장교 임경섭(林炅燮) 중위에게 역습임무를 부여했다. 1대대 차출병력 30여 명을 인솔한 임 중위의 역습부대는 그날 밤 10시가 넘어 출진했고 중도에 적 매복병의 방해를 받아 새벽녘에야 간신히 36고지 공격개시선에 도달했다.
지원포격의 포연으로 인한 시야 차장(遮障) 상황에서 공격을 시작한 역습부대는 20여 분 뒤 진지에 돌입해 육박전 끝에 진지를 되찾는 데 성공했다. 임 중위는 허물어진 진지부터 파헤치게 했다. 그때까지 매몰돼 있던 해병 10여 명이 구출됐다. 반죽음 상태인 그들은 혼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만세를 부를 겨를도 없이 급편방어에 나선 지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적진에서 반격 포 공격이 시작되더니, 아침 햇살을 뒤로하고 적병들이 까맣게 몰려들었다. 중과부적이었다. 물러설 수밖에 대책이 없었다. 고지 아래로 밀려와 이를 갈면서 철저한 복수전을 서둘렀다.
두 번째 역습에는 9중대 선임장교 최용환(崔鏞煥) 중위가 나섰다. 2개 소대로 병력 규모도 늘리고, 미 해병대에 지원을 요청했다. 미 해병대는 전투기와 화염방사 전차를 지원해 주었다.
전투기 편대가 적진으로 출격한 뒤를 이어 화염방사 전차 소대를 앞세운 본대가 출진했다. 오후 1시 30분이었다. 미 해병 전투기들이 사천강 도강을 시도하는 적진에 기총소사를 가하는 사이 전차부대가 적 포진지를 맹폭하는 입체작전이 시작됐다. 무난히 36고지 능선에 접근한 역습부대와 고지 위에 있던 중공군 사이에 백병전이 벌어졌다.
30여 분이 경과했을 때였다. 적들은 갑자기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고지 위의 모습은 생지옥 바로 그것이었다.
무너진 진지 안에는 생매장된 적병들의 비명이 낭자했다. KSC 노무자들을 불러 진지를 응급보수하고 방어태세를 갖춘 저녁 무렵 벙커 안에서 주먹밥을 먹던 대원 6~7명이 총안 구멍으로 날아든 적 직격포탄에 쓰러졌다. 물러갔던 적이 역습을 시도한 것이었다. 그렇게 밤늦도록 공방전을 계속한 끝에 해병 1대대 장병들은 고지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그로부터 이 고지는 ‘혼비(魂飛)고지’로 불리게 됐다. 혼이 날아갈 정도로 전투가 치열했다고 해서 ‘혼비고지’라는 이름을 얻은 36고지였다.
중공군 추석 전야 추계 대공세로 고지들 실함
그러나 고지의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2주일도 못 돼 시작된 중공군 추계 대공세의 폭풍에 사천강변의 아군 전초진지들은 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제일 중요한 67고지와 36고지, 인근 87고지, 92.4 고지도 빼앗겼다.
그것은 한국 해병대 역사에 부끄러운 뼈아픈 패전이었다. 이 사실을 털어놓는 것은 있었던 일을 그대로 적어 교훈으로 남기려 함이다. 지휘부와 일선, 그리고 한미 해병대의 유대에 잠시 느슨한 간격이 있었고 추석 전야의 정신적 이완도 한 원인이 됐다.
1952년 10월 2일, 추석 전날 저녁이었다. 그 전날 해병 1연대가 전투단으로 승격된 경사가 겹쳐 모처럼 푸짐한 잔칫상이 준비되고 있었다. 전투단 본부는 추석 특별부식으로 중대마다 돼지 두 마리씩을 내려 보냈다. 날이 밝으면 원 없이 고기를 먹게 된다. 어서 밤이 가고 추석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저녁이었다.
어두워지기 시작한 8시 사천강 건너 적진에서 포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뜻밖이었다. 중공군에게도 추석이 있는 줄 알았는데 명절 전야에 전투를 걸어 온 것이다. 진지마다 아우성이 일어났다. 초병들이 급히 움직이고 1중대 2소대장 김일생(金日生) 소위가 악을 쓰듯 무전기에 외쳤다.
“중대장님! 적이 새카맣게 몰려오고 있습니다. 새카맣게….”
같은 주파수를 썼기 때문에 먼저 연결된 통화가 길어지면 다른 진지 무전기는 무용지물이다. 맞서 싸우거나 철수하는 방법뿐이다. 맞서 싸우다가 실탄이 떨어지면 백병전을 벌이다가 쓰러지고, 잡혀 가고 했다. 적은 마치 파도처럼 2파, 3파, 겹겹이 밀려왔다.
67고지에서는 기관총 사수가 적 수류탄에 쓰러져 급격히 방어선이 무너졌다. 질풍같이 고지 위로 몰려든 적병들과 육박전을 지휘하던 소대장이 전사하자 상황은 끝나버렸다. 많은 소대원이 죽거나 다쳐, 포로로 잡혀갔다.
무참히 짓밟힌 해병의 위신
빼앗긴 고지 위에 추석달이 휘영청 밝았다.그렇게 하여 전초진지 넷을 빼앗겼다. 추석 잔치에 마음이 팔려 경계를 느슨히 한 징벌이었을까. 무적해병의 위신이 이렇게 무참히 짓밟힐 수는 없다고 모두들 이를 갈았다.
아니나 다를까, 전투단 본부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빨리 역습해서 빼앗긴 진지를 되찾으라는 명령이 추상같았다. 미 해병1사단에서도 같은 지시가 날아왔다. 특히 67고지 탈환이 급하다고 했다. 판문점 좌측 전선에서는 제일 높은 그 고지는 왼쪽으로 36고지를, 오른쪽으로 경의선 사천강 철교를 감제할 수 있는 곳이다. 그곳을 되찾지 않으면 아군 주저항선의 최고봉인 도라산 고지도 위태로워지게 된다.
해병전투단은 67고지를 빼앗긴 지 4시간 만인 10월 3일 새벽 2시, 역습을 감행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5일 오전 10시까지 56시간 사이에 무려 여섯 차례의 역습으로 가까스로 고지를 되찾았다가 또 빼앗겼다. 이 말은 여섯 차례 공격이 모두 무위로 끝났다는 뜻이다.
훗날 왜 그토록 무모한 공격을 되풀이해 전력을 소모했느냐는 말들이 무성했다. 작전의 변경 없이 단조롭고 무모한 공격을 거듭한 까닭에 대한 의문이었다. 밤낮으로 주인이 뒤바뀐 혈전에 목숨을 바친 전우들 넋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그 전투 상황을 낱낱이 기록해 두지 않을 수 없다.
트럭에 편승한 역습부대의 출발에 맞춰 우리 야포가 적진을 강타하고 전차소대가 대원들의 전진을 엄호했다. 적진에서도 즉각 반응이 일어났다. 역습부대 공격개시선(LD)을 겨냥한 조명탄이 터지더니 탄막사격이 시작됐다. 공격개시선에서부터 강력한 저지를 당하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작전을 밀어붙인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혼비고지의 최후, 이진일 소위 탈출기
1중대 1소대장 이진일 소위는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극적으로 탈출한 전설적인 소대장이다. 고지는 빼앗겼지만 그의 기백과 용전분투는 한국 해병대 전사에 찬연히 빛나는 귀감이 됐다.
중공군의 1차 추계 대공세 사흘째인 10월 5일 아침 10시, 1중대 1소대가 지키고 있던 36고지(혼비고지)에도 적의 포탄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땅이 흔들리고 진지가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충격이었다. 9월의 혈전으로 무너진 것을 제대로 보수하지 못한 진지였다.
“포격이 연신(延伸)되면 지체 없이 뛰쳐나가 적을 모두 격퇴시키도록! 알겠나?”
진지 안에서 포격이 후사면으로 넘어가기를 기다리면서 이소위는 소대원들에게 단단히 일렀다. 각 분대장들에게도 같은 지시를 해 뒀다.
통신선이 끊어지기 전에 중대본부에 위급시의 지원을 요청해 두려고 통신병에게 중대본부 호출을 지시했다. 그러나 어느새 통신선이 끊겨 통화가 안 된다고 했다. 무전기 스위치를 틀었지만 중대본부가 67고지와 통화 중이어서 할 말을 못하고 있었다.
“중대장님, 중공군이 새카맣게 몰려오고 있습니다. 야포로 저 되놈들을 갈겨주십시오.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이….”
다급하게 지원을 요청하는 67고지의 무선통신을 끊고 본부를 불러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기다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36고지도 위험해졌다. 적의 포격이 후사면으로 넘어가자 적 돌격대가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전원 자기 위치로! 끝까지 위치를 사수하라. 한 놈도 진지에 발을 못 붙이게 하라.”
이 소위는 벽력 같은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면서 진지 밖으로 뛰어나갔다. 기관총이 불을 뿜고 수류탄이 투척됐다. 적군은 낙엽처럼 쓰러져 내렸다. 2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뒤로 3진 대열이 나타났다. 중과부적! 아무리 용감하게 싸워도 지켜낼 수 없는 싸움이었다.고지로 돌격해 온 적병들의 폭약 투척으로 진지가 폭삭 주저앉았다.
장단 사천강 지구 전투 상황도
"부하들 다 죽이고 무슨 중대장 노릇이오!"
실탄도 떨어졌다. 백병전도 중과부적이었다. 사방에서 돌격해 온 수많은 적병을 감당할 도리가 없었다. 많은 소대원이 죽고, 다치고, 사로잡혔다. 중상자는 즉결처분당하고 온전한 사람과 경상자는 포로가 됐다.
이 소위도 붙잡혀 끌려가는 신세가 됐다. 추석 달이 밝은 가을밤, 목숨 바쳐 지키려던 고지를 떠나면서 이소위는 피눈물을 흘렸다. 그 와중에서 그는 기회를 엿보았다.
교통호를 타 넘는 순간 그는 뒤에서 총을 겨누고 따라오는 적병 둘 가운데 날렵하게 생긴 놈을 해치우고 몸을 경사면 아래로 날렸다. 돌려차기로 놈의 턱을 가격하는 행동과 동시에 비호같이 몸을 던진 것이다. 한 놈은 벌렁 나자빠지고, 한 놈은 급하게 다발총 사격을 서둘렀다.
그러나 이 소위는 벌써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포탄 구덩이 속에 몸을 숨긴 이 소위는 적이 고지 네 귀퉁이에 두 명씩 초병을 배치하고 철수하는 것을 목격했다. 한참을 더 기다렸다가 능선의 달그림자가 산자락에 드리워졌을 때 어둠 속을 더듬어 낮은 포복을 시작했다. 그렇게 중대본부에 돌아온 이소위는 중대장에게 화풀이를 했다.
“부하들 다 죽이고 무슨 중대장 노릇이요! 1개 소대 병력만 차출해 주세요. 내가 잃은 고지는 내가 되찾겠습니다.”
중대장 김용겸 중위는 “67고지 탈환이 급해 미처 손을 쓸 겨를이 없었다”고 사정을 설명했다. 혼비고지보다 67고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더 이상 불평할 수가 없었다. 그는 휴식도 없이 67고지 탈환 4차전 차출에 응했다.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
'★해병대 사령관 글 > 6대사령관 공정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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