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 전통·비화

진주 주둔기-공비내습사건의 진상과 전말

머린코341(mc341) 2015. 3. 22. 14:42

진주 주둔기-공비내습사건의 진상과 전말

 

일요일인 10월 27일 새벽 1시 40분 경이었다. 사범학교 북문 쪽에 있는 제1병사(강당) 뒤편 철조망이 있는 곳으로 은밀히 접근한 공비들이 높은 곳에 매달려 있는 보안등을 총으로 쏴 깨뜨림과 동시에 그것을 신호로 공격조는 신속하게 위병소로 부터 약 50미터 떨어진 텅 빈 제1병사(학교강당) 주위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른 다음 강당 건너편에 있는 불이 켜져 있는 제2병사(2층에는 하사관 교육대, 1층에는 5중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함으로써 허를 찔린 아군 병영이 발칵 뒤집히게 되었다.

 

그 날 새벽 제1병사가 비어 있었던 것은 1중대가 외곽경비에 임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잠을 자고 있던 환자를 포함한 4~5명의 잔류자들은 전원 불에 타 죽거나 불길 속에서 뛰쳐 나오다가 공비들에게 사살되고 말았다.

 

불과 한 두 시간 전 진주 시내의 극장에서 공연된 해군본부 위문공연단의 공연을 관람하고 들어와서 곤히 잠들어 있던 장병들로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변이 아닐 수 없었다. 공비들이 제2병사에 사격을 가할 때 그 날 오후에 치를 도망병(하동경찰서에 체포되어 자살한) 장례식에서 낭독할 조사를 쓰느라 골몰하고 있던 5중대 선임하사관 염태복 중사는 실탄이 눈앞을 스치는 바람에 기절초풍을 했고, 약 1시간 전 순찰을 돌고서 잠자리에 들어있던 당직사관 안창관 소위는 마치 악몽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팬티바람에 뛰쳐 나와 "공비야 공비, 진짜공비가 왔어. 진짜공비가..." 하고 소리치기가 무섭게 칼빈소총을 거꾸로 쳐들고 개머리판으로 불이 켜져 있는 백열등을 박살내며 전투배치에 붙으라고 했다.

 

그 당시 시범학교의 부대 본부에는 신현준 사령관과 (사령부) 작전참모 고길훈 대위가 함께 있었다. 김성은 부대장은 진주호텔에서 그 전날 진주를 방문한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 김백일 대령을 영접하고 있었다.

 

신 사령관도 밤 12시경까지 그 자리에 동석하고 있다가 부대로 돌아왔는데, 신 사령관과 김백일 대령은 만주 봉천육군훈련처(신경군관학교의 전신)의 동기생이었다. 요란한 총성이 울렸을 때 신현준 사령관은 옆방에서 잠을 자고 있던 고길훈 대위를 불러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도록 지시를 했는데 어떤 사람의 중언에 따르면 일본군의 학도병 출신(명치대학)으로 알려져 있는 고길훈 대위는 전투배치를 하는데 있어 매우 침착하고 용감하게 지휘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한편 방화조가 제1병사(강당)에 불을 지르자 그 틈을 타서 무기고를 담당한 공격조가 재빠르게 북문 동쪽 부대본부 청사 근처에 있는 무기고로 접근해 갔으나 "병기고를 사수하라!" 고 소리치며 뛰쳐나온 5중대의 김희선 이등수병(교전중 전사)과 정찬교 병조장 등 9명의 대원이 결사적으로 그들을 격퇴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교전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정문 바깥쪽 어둠  속에서 "사격중지!" 를 외친 젊은 여자의 섹시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이 불쌍한 해병대의 2등수병들아! 더 이상 고생할 생각말고 우리와 손을 잡고 이승만 도당을 타도하자!" 고 선동을 했으나 부대 안쪽에서 누군가가 "야 이년아, 개수작 하지 말고 이 총알이나 받아라!" 하곤 마구 총격을 가해 그 여자의 목소리가 더이상 나오지 않게 했다.

 

새벽 2시경에 이르러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 즉 부대 바깥쪽에서 요란한 크락숑과 함께 강렬한 헤드라이트를 투사하며 2대의 GMC가 부대 정문으로 들이 닥쳤는데 그 시기를 고비로 공비들의 공격은 한풀 꺽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GMC는 위문공연이 끝난 뒤 위문단 단원들을 진주역까지 실어다 준 차량들이었는데 1시 40분 경 부대가 있는 쪽과 시낸 한 곳에서 불길이 솟고 총성이 들리자 무슨 변이 일어난 것으로 알고 위문단 단원들이 하차하자마자 부대로 돌아왓던 것인데 공비들로서는 그 차들이 증원병력을 싣고 온 것으로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학교 정문쪽에서는 또 이런 일이 있었다. 즉 홍정표 소위와 함께(진주호텔에서) 학교 정문까지 달려왔던 김성은 부대장은 총탄이 빗발치는 상황 속에서 자기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어~이, 나야 나! 나를 모르겠냐?" 하고 두 번, 세 번 소리친 끝에 가까스로 그 목소리를 알아 차린 하사관교육대의 교관 강용 병조장의 도움을 받아 배추밭 고랑으로 포복하여 부대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부대를 포위하고 있던 공비들이 자취를 감춘 시각은 새벽 4시 30분 경이었다. 공비들이 물러가지 부대본부에서는 즉각 추격전을 벌이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적의 함정에 빠져들 염려 때문에 동이 트기를 기다렸다가 2~3대의 트럭에 병력을 싣고 산청방면으로 출동한 끝에 수 명의 공비를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하차지점에서 분대별로 분산하여 추격전을 벌인 다음 정오경 차량이 있는 곳으로 집결하고 있을 때 해병들은 사방에서 집총을 한 군인들(육군)이 포위망을 좁히고 있는것을 목격하고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수신호로 "우리는 해병대다" 라는 의사표시를 되풀이 해 보았으나 상대편에서는 그 신호를 무시하고 그대로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그 군인들은 마산지구에 주둔하는 육군16연대의 병력이었으며, 그들은 그 현장에 나타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연유 때문이었다.

 

즉 그 날 새벽 1시 40분경 해병대의 병사에 불길이 치솟고 요란한 총성이 울리고 있던 바로 그 시각에 진양군청과 법원 및 형무소 사무실 건물에 불길이 솟고 요란한 총성이 울리자 진주경찰서 당직 경찰관 조정래 경감(사찰주임)이 필시 해병대가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속단하고 상부에 보고를 한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반란군을 소탕하기 위해 투입이 된 병력이었다. 1989년 발간된 신현준 장군의 회고록(老海兵의 회고록)에 보니 그 출동부대를 지휘하여 현장에 나타난 지휘관은 일제때 만군장교로 함께 근무한 적이 있는 백선엽 대령이었고, 신현준 사령관을 본 백 대령이 "형님, 해병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던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고 묻기에 신 사령관은 "아니 이 사람아, 해병대가 반란을 일으키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우리 해병대는 공비들의 기습공격을 격퇴하고 추격전을 벌이고 막 부대로 돌아가고 있는 중일세" 하고 대꾸했다는 내용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 특별히 언급해 둘 얘기가 있다. 분대별로 수색전을 벌일때 5중대의 어느 분대에서는 불리한 지형에서 조우한 육군 병사들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첨병이 사살을 당하는 변이 일어나 "우리는 진주에서 온 해병대요. 사격을 멈추시오!" 하고 소리치자 "그런 부대가 있냐?" 하며 계속 사격을 하는 바람에 혼줄이 났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고, 5중대 2소대 선임하사관 최창선 중사는 공비 2명을 사살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날 밤 해병대의 병사와 형무소를 동시에 습격했던 공비들은 해병대에서 탈취한 무기로 그들이 석방시킨 형무소의 죄수들을 무장시켜 진주를 제2의 여순사건화할 작정이었으나 그 기도가 좌절되고 말았다. 형무소를 습격하기 위해 시내로 잠입했던 약 100명의 공비들도 그들이 기도했던 대로 진양군청과 법원 및 형무소의 사무실을 방화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주목표로 삼고 있던 형무소의 죄수들을 석방하는 일만은 형무소의 경비원과 해병대의 기관원들과 경찰 및 한청 단원들의 분전으로 저지를 당하고 말았다.

 

공비 내습으로 인한 피해는 해병대에서 발생한 7명의 사상자(전사 4명)와 한청대원 전사 1명, 양민 피살 수 명 등 다행히도 그다지 큰 편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러한 상태에서 사건이 진화가 된것은 불행중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사건의 실제적인 피해의 규모와는 상관없이 사회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안져 주었다.

 

그 이유는 대구 10.1 폭동사건(1946년)과 4.3사건(1948년) 및 여순 사건 등 충격적인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는 가운데 사회적인 혼란과 불안이 극에 달해 있었기 떄문이었다. 그와 같은 이유 때문에 국회에서는 즉각 진상조사를 위한 조사단 구성을 결의하여 조사단원을 진주로 내려보내었고, 경남 출신인 김효석 내무장관도 현지로 내려가 독자적인 조사활동에 착수하는 등 주둔군 부대와 현지 경찰을 긴장 시켰다.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그 어느 누구보다도 애를 태운 사람은 김성은 부대장이었다. 국회에서 조사단 구성을 결의하기 전부터 주둔군 부대장으로서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는 '군인으로서의 나의 운이 여기서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절망감에 빠져 있던 중 설상가상으로 부대를 방문한 김효석 내무장관을 본의 아니게 홀대한 일로 김 장관을 격분시킨 일이 발생하는 바람에 그 절망이 더욱 커지고 말았다.

 

김효석 내무장관 홀대에 얽힌 바화는 이러했다. 즉 김 장관이 탄 검은 색 지프차가 부대 정문으로 들이닥쳤을 때 근무 중에 있던 위병이 정차를 시킨 다음 누구냐고 묻자 김 장관은  "나 김효석이야. 나를 몰라??" 하고 반문하며 부대장을 만나러 왔으니 안내를 하라고 했고, 김효석이란 사람을 알지 못했던 위병이 "잘 모르겠는데요..." 하며 머뭇거리는 바람에 화가 났던 것이고, 그 현장에 나타난 위병 오장이 필시 지위가 높은 분일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부대본부에 전화(EE8)연락을 취한 다음 그 차를 부대본부로 안내했으나, 문제는 신현준 사령관과 김성은 부대장도 "나 김효석입니다." 하며 부대장실로 들어선 그를 얼른 알아보지 못하고 달갑지 않은 불청객을 대하듯 홀대를 하는 바람에 그가 "내무장관 김효석이를 모른단 말이요?!" 하고 화를 내자 그제서야 그가 갓 취임한 내무장관이란 것을 알아차린 신 사령관과 김 부대장이 사과를 했으나 그는 사과도 받으려 하지도 않고 휑하니 나가 버린 것이엇다.

 

현지로 내려왔던 국회 조사단원들은 먼저 관계당국으로 부터 공비들의 내습경위와 피해상황 및 대처한 결과에 대한 상세한 보고를 청취한 다음 각계 각층으로부터 광범위히게 여론을 청취해 본 결과 해병대의 내부반란으로 일어난 사태인지도 모른다는 사회 일각의 억측이 전혀 터무니 없는 사실이란 것을 알게 되고, 또 해병대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감이 지극히 두텁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됨으로써 주둔군 부대에 대한 조사는 형식적인 방문에 그쳤다.

 

그 때 한 의원이 99식 소총을 휴대하고 있는 어는 병사에게 "M1소총과 같이 성능이 좋은 무기를 갖고 싶지 않느냐?" 고 하자 그 대원은 "후방에서는 이런 소총만으로도 만족합니다. 그런 신무기는 38선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보내 주야지요" 라고 대꾸하여 그 의원을 감동 시켰는데, 그 이야기는 그 다음날 일간신문에 보도가 되었다.

 

그 당시 해병대에 대한 진주시민들의 신뢰도가 그만큼 높았던 것은 민심수습을 위해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전투부대를 진주로 파견할 때 특히 술과 여자를 조심하고 민폐을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강조했던 신현준 사령관은 9월 초순경 부터 약 2개월 간 해군본부로 부터 지원을 받은 반공강연반과 반공영화반으로 구성된 선무공작반을 진양군과 그 인근 고을의 여러 면소재지를 순회하며 활동을 하게 했고, 또한 주둔군 부대에서는 자체 훈련과 경비임무에 만전을 기하는 가운데 추수기를 맞아 조농봉사활동을 하는 등 민심수습과 대민 봉사활동을 위해 정성을 기울인 끝에 진주시민들은 "육군이 공비 10명을 잡는다면 해병대는 30명을 잡을 것" 이라는 말을 했고, 김성은 부대의 고문관 파그레이 중위(미 육군)는 "영창은 있어도 입창자가 없는 영창은 처음 본다." 고 말하면서 주둔군 부대의 확립된 군기를 치하했다.

 

그 공비 내습사건은 결국 이렇게 결말이 났다. 즉 진상 조사 보고서를 국회에 제출했던 조사단원들은 최종적인 건의서에서 그러한 사건이 발생한데 대한 책임을 물어 주둔군 부대장과 진주경찰서장을 해임하고 사찰주임을 파면시킬 것을 건의함으로써 실의에 빠져 있던 김성은 부대장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단념케 했으나 바로 그 다음날 구세주처럼 나타난 신성모 국방장관이 "군의 생명인 무기고를 사수하여 공비들의 기도를 좌절시킨 주둔군 부대장에는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김성은 부대장은 해임 일보 직전에서 극적인 구원을 받았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傳統과 秘話'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