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 전통·비화

제주도 주둔기-비극의 섬 제주도

머린코341(mc341) 2015. 3. 22. 14:57

제주도 주둔기-비극의 섬 제주도

 

제주도를 비극의 섬이라고 새삼 말하는 까닭은 악몽같은 4.3사건의 비극이 일어난 섬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해인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전남도당위원회 산하 군사부 직계하의 이른바 '제주인민해방군' 이라는 조직체가 주동이 되어 제주읍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일으켰던 그(4.3) 폭동사건은 혈연관계가 유별나게 진하게 얽혀 있던 제주도민들에게 막심한 피해를 입힌 사건이었고, 국가적으로도 매우 불행한 사건이었다.

 

창설된 이후 진해와 진주에 병력을 분산 배치하여 부대를 운영하고 있던 해병대가 제주도로 이동한 날짜는 그 해(1949년) 12월 28일이었다. 공비내습사건이 발생한 지 2개월이 경과한 시점이었다. 해병대가 제주도로 이동한 목적은 자체훈련을 겸한 한라산의 공비토벌과 4.3사건으로 인해 피폐된 제주도민들의 민심수습과 치안확보 및 자체훈련을 통한 전투력 강화를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그때까지 제주도에는 육군부대가 주둔하여 그러한 임무를 수행애 왔었는데 그 일을 해병대가 떠맡게 된 것은 병력을 교체하거나 보급품을 운송할 때마다 해군의 지원을 받아야만 했던 육군측에서 해병대와 임무를 교대하게 되면 그런 불편을 덜 수 있고, 또 제주도에 못박아 둔 병력을 필요로 하는 용처에 사용할 수 있다는 판단하에 그 문제를 상부에 건의하여 결정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해병대가 제주도로 이동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사회 일각에서는 "해병대를 제주도로 귀양보내는 모양이지?" 하며 수근거린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러한 말들은 진주에서 공비내습사건이 발생했을 때 해병대가 반란군으로 오인된 것을 사실인줄 착각했던 사람들과 해병대가 제주도로 이동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 퍼뜨려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게 했다.

 

제주도로 이동할 당시 해병대의 병력은 그 해 9월 말에 해병대의 신병교육대를 수료한 450명의 2기 신병(해군 14기)와 공비내습사건 일주일 후에 해군신병훈련대를 수료하고 해병대로 전입하여 진주파견부대에 배치된 150명의 제2기 신병들(해군 14기) 및 창설식을 거행한 후 해병대로 전입한 기간장병을 합쳐 약 1100명으로 늘어나 있었으며, 450명의 2기 신병들은 3중대와 6중대로 편성되고 150명의 2기 신병들은 7중대로 편성되었다 (1중대와 5중대는 1기생들로 편성)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傳統과 秘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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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태와 해병대

 

"역사"라는 아이디로 "특전사에 5.18이 있다면 해병대에는 4.3이 있다"라는 제목으로 19일자 특수전게시판에 아픔의 현대사의 제주 4.3사태에 해병대를 크게 연관부각시켜 해병대를 4.3사태의 진범으로 몰아가고 4.3사태의 책임을 해병대에 떠안기는 듯한 인상을 지울수 없고 이런글을 올린 당신의 정체가 수상하군요...

 

단순히 해병대에 미운 감정을 지닌 안하무인격의 철없는 벌레라기에는 의심도 많이가고....

진실을 좀 알고나 글을 올리세요....

제주 4.3사태가 아직까지 진실규명이 안돼고 당시 희생된 무고한 양민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이 안되고 해결이 안되는 이유는 제주4.3사태에 미국이 깊은 관련이 있었기(4.3당시 한국군의 지휘권이 미군에게 있었음)때문에 현재 대한민국 정부에서 과거사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고 또 현재 한국의 경제와 군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초강대국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기엔 시기상조 인듯한 느낌...

 

이런것을 마치 해병대가 진범인냥 제주4.3사태의 범인을 해병대로 지목하는데 한심하고 안타까운 마음밖에 안드는군요....

 

안타까운 마음에 진실을 알리는 차원에서 글재주 없는 제가 감히 몇자 적어보겠습니다.(참고로 해병대는 진해에서 창설됐지 제주도에서 창설돼지 않았슴...)

 

◆가. 먼저 제주4.3사태가 발생한 당시 해병대는 창설조차 안됐습니다.

 

- 제주4.3사태가 일어난 날자=1948년 4월 3일.
-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일   =1949년 4월 15일.

 

(관련근거)
소위 '제주 4.3사태'는 제주도 무장대가 미군정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극우세력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던 1948년 4월 3일을 가리킨다. 무장대는 단독선거·단독정부의 반대와 조국의 자주통일, 극우 세력 의 탄압에 저항한다는 기치를 내걸었다.

 

1948년 11월 13일 새벽 2시-제주도 중산간마을인 조천면 교래리를 포위한 토벌대는 집집마다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불기운에 놀란 주민들이 황급히 집밖으로 뛰어나오자 군인들의 총구에서 일제히 불이 뿜어져 나왔다.

 

드넓은 교래리 벌판에 총성과 비명이 뒤섞였고 불바다를 이룬 마을에선 하늘과 땅이 온통 붉었다. 1백여 가호가 오순도순 살아가던 설촌 7백년의 유서깊은 마을이 하룻밤새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

 

이른바 '초토화작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건 토벌이 아니라 무자비한 살인극이었다. 시신들 대부분은 총에 맞은 채 불에 탔고, 열네살난 한 소녀의 시신에는 대검이 찔려 있었다. 주로 노약자들인 이들의 '죄'는 재빨리 도망치지 못한 것이었다.

 

대한민국 군인과 경찰이 국민에게 저지른 일이라고 도저히 믿기지 않는 사건이다. 그러나 이는 50년 전 그날 제주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사건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오히려 증언자들은 "총에 죽은 사람들은 고통이 짧으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까지 말한다. 아무튼 어떻게 해서 이런 엄청난 일들이 벌어졌으며, 50년이란 세월이 흐르도록 철저히 은폐될 수 있었을까.

 

◆나.제주4.3사태 기간중 인명피해가 가장 많았던 시기는 1949년 4월 1일이전이다...

(이때 역시 해병대가 창설된 1949년 4월 15일 이전의 일이다.)

 

(관련근거...1)
무엇보다 제주4.3사태를 역사적 사건이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은 무엇보다도 엄청난 인명이 희생됐다는 데 있다. 사건이 진행 중일 때 1949년 4월 1일자 한 미군보고서는 "지난 해 동안 1만4천∼1만5천 명의 주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 중 최소한 80%가 보안군에 의해 사살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시기는 인명피해가 가장 컸던 때이긴 하지만 6년 6개월의 전개과정중 단지 1년간의 집계라는 점에서 전체 희생자라 할 수 없다.

 

(관련증거...2)
가장 참혹한 희생은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3월께까지 약 4개월 동안 발생했다. 이른바 '초토화작전'이 벌어진 것이다. 이 기간동안 토벌대는 중산간마을을 덮쳐 온 가옥에 불을 지르고 80대 노인에서부터 젖먹이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살해했다.

 

토벌대는 초토화작전을 감행하기에 앞서 10월 18일 제주해안을 봉쇄했다. 제주도의 상황은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유일한 지역언론사인 제주신보 사장과 전무가 끌려갔고 편집국장은 총살됐다. 제주에 주재기자를 뒀던 경향신문과 서울신문의 지사장이 끌려가 총살됐다. 급기야 토벌대는 제주신보를 아예 접수, 서북청년단장을 사장에 앉혔다.

 

(관련증거...3)

초토화작전의 학살극은 중산간마을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소개령에 따라 해변마을로 내려온 사람들의 희생도 컸다. 토벌대는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며 수시로 학살했다. 1948년 12월 22일 표선리로 소개한 가시리 주민 76명이 속칭 '버들못'에서 집단학살됐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호적을 일일이 대조했다. 그 결과 젊은이가 사라진 경우엔 '폭도로 산에 오른게 분명하다'며 총살했다.

 

또한 1948년 10월 말부터 11월 초순 사이에 9연대 장병 1백여명이 군사재판도 거치지 않고 불법적으로 처형됐다. 희생된 군인들은 주로 제주 출신이었다. 같은 시기인 11월 1일 제주도 경찰당국은 경찰에 침투해 있던 남로당 프락치를 색출했다고 발표했다. 무장대에 동조한 혐의를 받은 군인과 경찰들은 바닷물 속에 수장됐다는 풍문만 전해질 뿐 대부분 시신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이로써 초토화작전의 걸림돌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 제주 4.3사태의 미군보고서...(이때 역시 해병대는 창설돼지도 않았다)

 

(관련증거)
토벌대가 파악한 무장대 숫자는 최대 5백명 안쪽이었다. 그 5백명의 무장대에 대한 토벌작전에 3만명이 희생된 것이다. 토벌전이 본격화되던 1948년 11월경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이 본국에 보낸 한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전과를 기록하고 있다.

 

"제주도 연대장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1948년 11월 20일부터 27일까지 일주일간 유격대 122명을 체포하고 576명을 사살했다. 10월 1일부터 11월 20일 사이에는 1,625명을 사살하고 1,383명을 체포했다. 많은 물건들을 노획했으나 무기는 거의 없었다."

 

이 시기의 또다른 보고서를 보면, '11월 13일 경비대 작전결과, 구좌면 행원리에서 유격대 115명 사살' 혹은 '11월 24일 제주읍 노형리 부근의 전투에서 유격대 79명 사살' 등의 전과기록이 나오는데 토벌대 희생자는 한 명도 없다.

 

많은 숫자의 무장대를 사살·체포했으면서 노획한 무기가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 전투가 벌어졌다면서 어떻게 토벌대 사망자는 한명도 없고 무장대만 사살되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이는 교전을 벌이던 무장대가 죽은게 아니라 대부분 불가항력의 주민들이 무차별 학살됐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마을 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금방 드러난다.

 

4월3일 발발 후 한동안 이어지던 소강상태는 1948년 10월에 접어들면서 깨졌다. 그동안의 토벌작전은 정부수립을 앞둔데다가 우기로 인해 지연돼 왔다. 강경작전은 미군정이 끝나고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순간 이미 예고돼 있었다. 남과 북에 서로 적대적인 국가가 출현함에 따라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문제를 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도전으로 부각됐다.

 

◆라. 제주4.3사태는 미국과 깊숙한 관련이 있다.


(관련증거)
4·3발발 시점 외에도 미국의 오라리방화사건 조작, 미CIC장교가 중산간 초토화작전 개념을 제시한 점, 미군장교의 추천으로 서북청년단이 파견된 점, 미군이 49년 6월 말 철수 때까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었던 점. 특히 “미군이 군사작전을 지휘·명령하는 가운데 미라이나 노근리보다 수십·수백배 가까운 양민이 죽어간점"

 

개인적으로 제주4.3사태에 희생된 무고한 인명에 명복을 빌며...제주4.3사태,,,노근리 양민사건등의 사건에 초강대국 미국의 눈치를 살피느라 그들에 대한 보상과 명예회복이 안되는점에 안타가운 마음밖에 없습니다...(김구선생 암살사건도 미국과 깊은 관련이 있고)... 강대국이 되는 길 밖에 답이 없군요... 이럴진데 이 나라 대한민국 안보에 일익을 담당하는 해병대에게 모든 짐을 떠넘기려는 대책?은 한심한 생각밖에 안 들고 나라를 팔아먹자는 매국노는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