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주둔기-공비토벌 비화록
4.3사건이 일어난 후 한라산(△1950m)에는 수백 명의 공비들이 입산했으나 군경 및 서북청년단원들에 의한 대대적인 소탕작전으로 그 수가 격감되어 해병대가 제주도로 이동했을 당시에는 약 100명 정도의 잔당이 남아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었다.
해병대의 한라산 공비토벌작전은 일차적으로 1950년 2월부터 6.25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수행되었다. 그 기간 중 3개분대로 편성된 932토벌대(사령부 정보대 소속)는 오백장군과 1394고지 부근의 세오름, 돌오름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담당하고, 소대 단위 또는 분대 단위로 편성된 모슬포부대의 토벌대는 한라산 상봉(上峰)을 중심으로 한 그 서쪽 지역을 담당했는데, 이러한 지역들은 해병대가 처음으로 토벌대를 투입한 지역들이었다.
산세가 험한 한라산에는 지연동굴과 일본군이 포진지나 탄약고로 파놓은 인공적인 동굴이 많은 데다 기상 이변이 심해 토벌작전에 많은 애로가 수반되었다. 특히 초목이 무성한 여름철과 백설이 쌓이는 겨울철에는 성과가 더욱 부진했다. 공비들은 동서남북으로 사방에 눈에 잘 띄지 않는 위병소를 설치하거나 위장을 하고 나무위에 올라가 망을 보고 있다가 토벌대가 접근해 오면 민첩한 신호에 따라 간 데 온 데 없이 잠적해 버리곤 했다.
따라서 평범한 수색방법으로는 그들을 수색해 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아군 토벌대는 후각에 의한 수색활동을 벌이거나 까마귀떼를 보고 공비들의 잠복처를 수색하는 방법을 동원했다. 식량을 조달하기가 어려워 야생 우마를 도살하여 연명을 하고 있던 그들의 잠복초에서는 으레 고약한 악취가 풍기기 마련이었고, 그들이 방분한 배설물에서도 그런 악취가 풍겼기 때문에 그 고약한 냄새를 쫓는 수색방법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고, 또한 그러한 악취를 쫓아 취식을 일삼는 까마귀떼를 쫓게 된 것이었다.
1950년 2월 하순경 세오름 부근에서 수색전을 벌이고 있던 김익태 분대장의 932부대 토벌대는 약 100미터 전방에서 10여 마리의 까마귀들이 공중 나즉히 선회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재빠르게 그 현장 가까이로 다가가 목표지점을 쌍안경으로 살펴 봤더니 남루한 옷을 걸친 공비 3명이 그들이 잡아 놓은 야생마의 껍데기를 벗기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해치우기 위해 좀 더 가까운 곳으로 접근해 가던 중 토벌대의 접근에 놀란 까마귀들이 갑자기 날아가는 바람에 부득이 그 위치에서 집중사격을 가해 3명중 2명은 사살하고 1명은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상황은 그것으로 끝나지를 않고 그 주위를 수색하고 있던 대원들은 가시덤불로 입구가 가려져 있는 곳에서 조그만 동굴아지트 하나를 발견했을 뿐 아니라 바로 그 근처에 산채로 잡혀 있는 수척해진 말 한 마리가 혓바닥과 아래 위턱이 노끈으로 챙챙 동여 매인 채 나무에 붙들어 매여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한 분대원이 죽임을 기다리고 있던 그 말의 묶여 있는 곳을 대검으로 끌어 주자 그 말은 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로 허둥지둥 산 아래로 달아났다고 한다.
2주일 내지는 약 1개월 간씩 교대로 투입이 된 토벌대 대원들은 계곡지대의 자연동굴과 인공적인 동굴들을 거점으로 삼아 수시로 장소를 옮겨가며 수색전을 벌여야 했으므로 피로가 겹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여름철에는 극성을 부리는 모기떼와 짙은 안개와 비바람 등으로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고, 겨울철에는 추위와 눈얼음 때문에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끝으로 전설적인 화재를 남긴 932부대의 진두태 분대장(상사)와 처녀공비 '연옥'이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해 둔다.
일본군에서 복무할 때 아무리 적탄이 빗발치는 상황 하에서도 절대로 허리를 굽히지 않고 용감하게 서서 돌진한 군인으로 알려져 있었고, 단칼에 쳐서 떨어뜨린 적자의 수급을 말안장에 매달고서 의기양양하게 진중으로 돌아오는 삼국지의 맹장들을 동경하고 있었다는 진두태 상사는 어느 날 한라산 골짜기에서 사로잡은 공비의 목을 일본도로 베어 그것을 허리춤에 메달고 돌아와 부하 대원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다음 조조가 덫에 걸린 관우의 목을 베어 유비의 진영에 보내기 위해 소금이 담긴 통속에 넣었듯이 그 목을 소금통에 담아 신현준 사령관과 김성은 참모장에게 보인 연후에 공비들로 하여금 장례를 지내게 한라산 골짜기에 갖다 두려다가 산중의 공비들에게 외면을 당할 것 같아 양지 바른 한라산 기슭에 정중하게 묻어 주었다는 전설적인 화제를 남겼다.
흑자는 그 이야기가 진 상사의 꿈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고 흑자는 그렇지가 않다고 한다. 빗발치는 적탄 속에 용감히 서서 돌진을 했다는 그 진두태씨는 그가 2대대 정보장교로 있을 때인 1951년 3월 7일 진두에 서서 박지산(△1391m)을 정찰하던 중 적병의 저격탄에 미간을 맞아 애석한 최후를 맞이했는데 그 날이 그의 25회 생일이었다.
4.3사건 때 폭도들에게 부역을 한 아버지를 따라 어쩔 수 없이 입산을 했다는 소문이 전해지고 있던 처녀공비 연옥은 토벌대 대원들의 연모의 대상이었다. 꿈속에서 그녀를 봤다거나 꿈속에서 몰래 만나 사랑을 속삭였다느니 하는 따위의 말을 농하는 대원들도 있었고, 토벌에 나설 때는 '연옥이를 만나러 간다." 는 투의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와는 달리 실제로 연옥이를 본 사람음 극히 소수에 불과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녀를 보았다는 한 증인의 말에 따르면 단 한 번 그녀의 뒷모습을 멀리서 바라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누군가가 뒤에서 총을 쏘자 잠시 뒤를 돌아보며 슬픈 미소를 살짝 짓더라는 것이었고, 또 다른 목격자의 말에 따르면 급히 산으로 달아나다가 벗겨진 한 쪽 고무신을 주워 봤더니 누더기 같이 기워져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 밖에도 빈 건빵봉지에 이런 저런 연서를 써서 나뭇가지에 걸어 두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傳統과 秘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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