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당 100의 해병대 정신을 배우자’
해병대는 1949년 4월 15일 경남 진해덕산 비행장에서 380명의 인원으로 창설된 이후 올해로 66주년이 됐다. 해병대 창설의 결정적인 계기는 1948년 10월 여수와 순천반란사건이었다. 즉 이 사건은 여수와 순천 지구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제14연대 내에서 남로당의 지시를 받는 ‘공산프락치’가 주동이 돼 일으킨 반란 및 폭동사건을 말한다.
사건 발생 4일째 22일에는 순천을 탈환하고 27일에는 여수를 탈환하게 됐다. 당시에 반란세력들은 전마선을 타고 육지로 도주해 지리산 일대에서 숨자 국군은 소탕전을 전개했다. 반란세력들이 토벌되자 해군에서는 육지에서도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특수부대가 필요했는 데, 이 부대가 바로 오늘 날 ‘귀신 잡는 해병대’이다.
해병대가 창설 당시의 국가정세는 언제 전쟁이 발발할지도 모르는 ‘풍전등화(風前燈火)’같은 위기상황이 존재했다. 이에 따라 해병대는 유사시를 대비해 교육훈련에만 정진했다. 그 결과 한국전쟁당시에는 한국군 최초의 단독상륙작전이라는 ‘통영지구전투’에서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칭호를 얻었다. 또 ‘도솔산 지구전투’에서도 ‘난공불락’이라는 도솔산 1148고지를 16일 만에 탈취 및 확보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무적해병대’라는 휘호를 받았다.
특히 월남전쟁당시 ‘짜빈동야간 기습방어전투’에서 청룡부대 3대대 11중대가 월맹군 약 1개 여단을 격퇴 및 격멸함으로써 ‘신화를 남긴 해병대’라는 명성을 국내외에 과시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해병대가 한국전 및 월남전에서도 백전백승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보다도 지휘관들이 부하들을 내 가족처럼 사랑했다는 점과 지휘관들의 명철한 판단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병대 전투사에서 귀감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통영지구상륙작전당시에 해군본부에서는 거제도를 상륙작전을 명령했지만 김성은 대대장은 세 번씩이나 해군본부 수뇌부들을 끈질기게 설득해 통영으로 상륙작전을 실시했다.
김성은 대대장의 생각은 거제도에 상륙해 거제도 긴 해안선을 방어하기에는 1개 대대규모로는 적당치 않다고 판단, 차라리 통영에 상륙 작전해 원문고개만 점령한다면 적은 독안에 든 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통영지구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진해와 마산일대의 제해권을 확보함으로써 적의 해상봉쇄 기도를 좌절시켰다.
도솔산 지구전투에서도 김대식 연대장은 주간전투로서는 전략요충지인 도솔산고지를 확보할 수 없음을 깨닫고 야간전투로 전환해 미 구해병 5연대가 탈취할 수 없었던 도솔산 고지를 점령해 양구에서 인제로 이르는 주보급로를 확보하게 됐다.
오늘날 고위관료들의 부정부패로 우리 국민들은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국민들에게 용서와 사과를 구하지는 못할망정 순간의 위기만 모면하려고 거짓말 또 거짓말을 하고 있는 총리에게 분통을 터뜨린다.
국민들에게 모범이 돼야 할 총리가 검은 돈을 받았다는 의혹에 연류 돼 있으니, 정치인들을 불신하는 풍토가 만연해 있다. 한국전쟁시에 ‘무에서 유를 창조’해 전승을 이끌었던 해병대 지휘관들의 정신적 자세를 위정자들은 배웠으면 한다.
오늘날 해병대가 작지만 강한 군대로써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지휘관들의 청렴결백이었으며 국민들에게 인정을 받는 강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창기 해병대 교육훈련이념은 ‘민에게는 양이 되고 적에게는 사자가 되자’라는 내용에서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해병대만큼 국민을 사랑하는 군대는 없을 것이다. 진주주둔 때는 “백성 없이는 군대도 없다”라는 표어로 애민정신을 실천해 왔다.
월남전시에도 “99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단 한명의 양민을 보호해라”고 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정치인들이 국민을 섬기고 사랑하는 해병대 역사와 문화를 배웠으면 한다. 특히 해병대는 해룡(1사단), 청룡(2사단), 흑룡(6여단) 등의 용(龍)을 가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용(龍)은 깊은 물이 없으면 승천하지 못한다. 깊은 물은 국민들을 의미한다.
즉 국민에게 사랑받지 못하면 해병대는 존재가치가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 정치인들도 지역 국민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존재의미가 없다.
정치인들은 환골탈태(換骨奪胎)하는 심정으로 국민들에게 인정받도록 노력해야 한다. 해병대도 그랬듯이 1973년 10월에 국민들에게 미움을 사 해병대 사령부가 해체되는 시련도 있었지만 환골탈태(換骨奪胎)를 통해 1987년 11월에 해병대 사령부를 재창설했다. 진실하지 못하고 국민을 우롱하는 정치인은 반드시 국민들에게 냉혹한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상기했으면 한다.
국민들에게 지속적으로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강인한 훈련을 통해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해병대가 되도록 ‘임전태세’를 완비했으면 한다.
[경상매일신문] 2015.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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