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179기 황석영의 해병이야기 -
[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3. 끝없는 편력 <161>
덜컥 해병대 자원 입대… 잘 가거라, 내 청춘
해병대179기.청룡출신/ 황석영
그 무렵에는 연애조차도 건성이었다.
나는 무엇엔가 헛것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뭔가 애달캐달하는 몰입된 감정이 있어야 할 텐데
보면 시큰둥이고 안 보면 그냥 잊어버렸다.
뒷날 군대에 갔다 와서 얼핏 서울 거리 모퉁이에서
그녀를 만난 적이 있었지만 별로 반가워하지도 않고
스쳐 지나 보내고는 나중에 후회했다.
칠십년대에 전라도 해남으로 내려가던 때에 연재를 쓰던
신문사로 연락이 와서 잠깐 만나 차를 한 잔 나눈 적이 있었고,
근년에는 강연을 갔던 지방 도시에서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지만
너무 늙어 버렸다고 만나기를 사양하는 바람에 몇 분간 통화만 했다.
그녀 외에도 세상을 먼저 떠나기도 하거나 해외로 나가 버린 이도
있고 그렇게 여름 구름처럼 흩어져 갔다.
친구 중의 누구는 술맛 나라고 일부러 사랑할 상대를 일정 기간
정하기도 한다지만 나는 실상 글 쓰는 짓 이외에는 몰입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물 위를 스쳐 날아가는 제비 팔매질처럼 지나쳐 사라져 갈 뿐이었다.
그것이 나의 오랜 회한이 되었다고나 할까.
상대는 내가 무엇엔가 딴 것에 사로잡혀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나도 군대 나가기 전 몇 달 동안에 잠깐 누군가에게 열중했던 적이
있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갖지 못했다.
그냥 그러다가 말았는데,
전쟁터에 나가서 남들처럼 사진 한 장도 지니지 못했으면서도 딴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병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출라이 전선에서 구정 공세가 한창이던 때에 몇 달이나
묵어서 들어온 편지에 의하면 이미 결혼을 해 버렸던 것이다.
이렇듯 씁쓸한 젊음을 추스르지 못한 채로 나는
어느 날 그야말로 느닷없이 해병대에 자원 입대를 하게 된다.
그 무렵에는 어머니도 시장에서의 장사를 걷어치우고 대방동에 작은 전셋집을 얻어 이사를 갔다.
해방 직후 이북에서나 전쟁 때에도 그랬듯이 여러 가지 재주 중에 한 가지였던 옷 짓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
재봉사 몇 사람을 두고 한복점을 냈던 것이다.
어느 날 집에 들어갔더니 중학생이던 아우가
파출소에서 순경이 다녀 갔다면서 소집장을 내밀어 보였다.
내용은 내가 두 번이나 신체검사 통지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서로
출두하라는 내용이었고 응하지 않으면 체포한다는 식의 매우 위압적인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헤매고 다니던 기간에 신검 통지서가 몇 번이나 날아왔던 모양이었다.
나도 어디선가 세 번이나 신체검사에 응하지 않으면 육개월 살고 나서
강제 징집 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사태가 곤란하게 되었다는 걸 알았다.
거리를 지나다가 해병대에서는 매달 기수별로 일정 인원의 자원자를
입대시킨다는 벽보를 보고는 그대로 사령부로 찾아가 입대 원서를 내 버렸다.
일사천리로 지능 테스트에서 체력검사와 신체검사를 받고 나서
바로 그 달에 입대 통지서가 나왔다.
해병대의 군기가 세고 훈련이 가혹할 정도로 심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건 사령부 입장에서는 자원 입대한 놈들이 웬 잔소리냐고 되물을 법한 노릇이다.
천구백육십육년 팔월에 나는 용산역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다시 남도로 향하고 있었다.
새벽에 집을 나서면서 어머니가 만들어 준 비상금 전대를 속옷 안에다 둘렀다.
어머니는 내가 어릴 적에 소풍 갈 때처럼 한밤중에 김밥을 만들어 내밀었고
그맘 때에는 내게 절대로 눈물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어두컴컴한 새벽의 용산역에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내 청춘의 전반기와 작별했다.
글 출처 : 중앙일보,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ctg=12&Total_ID=93024
사진출처 : 호이안朴 선배님 블로그, http://blog.daum.net/parkky123/8003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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