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將軍들의 전쟁] #2. 남재준 “○○○ 진급시켜달라”, 김장수 “……”
육사 2년 선후배로 다른 ‘군인의 길’…박근혜정부에서도 경쟁 이어져
노무현 정권 3년 차이던 2005년, 김장수 육군참모총장이 새롭게 취임했다. 노 정권 출범 이후 두 번째 육군 수장이었다. 그의 전임이자 첫 번째 수장은 남재준 전 총장이었다. 김 총장은 취임 이후 군 인사에서 장군 진급 대상자를 복수로 추천해 청와대가 진급 결정에 개입하도록 아예 제도를 바꿔버렸다. 청와대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전임자인 남 전 총장이 설정한 원칙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김장수와 남재준 간 갈등의 시작이었다.
2007년 국방부장관이 된 김장수는 노무현 대통령과의 담판을 통해 영관급 장교의 정원을 증원시키는 난제를 해결한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정치권력의 요구를 유연성 있게 수용하면서 군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통령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한 것은 지금도 그의 자랑거리다. 이후 2007년 10월의 제2차 남북 정상회담 때 노 대통령을 수행했고, 정상회담 중간의 오찬장에서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바로 옆 헤드테이블에 앉은 사람이 바로 김장수 장관이었다. 또한 남북 국방장관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한 국내 최초이자 마지막 국방장관이기도 하다. 이는 전임 남재준이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숙명의 라이벌’ 김장수와 남재준은 이처럼 서로 달랐다. 실제 자신의 군 재임 기간 중 가장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일화에서도 그 차이가 느껴진다. 남재준의 경우 육군참모총장 시절 자신이 노 대통령의 청와대에 맞서 얼마나 소신 있게 원칙을 고수했는지를 강조한다. 이 점은 전회(시사저널 제1264호 ‘군 검찰 압수수색에 육본 필사적 저항’ 참조)에 이미 소개한 바 있다. 그는 원칙 수호가 당시 노무현 정권의 종북주의자에 맞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남재준의 육사 2년 후배(육사 27기)이자 2005년 남 총장으로부터 총장직을 물려받은 김장수의 경우는 달랐다.
2013년 6월10일 남재준 국가정보원장, 김관진 국방부장관, 김장수 국가안보실장(맨 왼쪽부터)이 청와대에서 열린 외교안보장관회의 시작 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김장수는 ‘아이젠하워’, 남재준은 ‘맥아더’
미국의 장교단 사이에는 두 가지의 상이한 전통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하나는 민주주의와 산업 문명을 반영하는 친근감 있고 사교적이며 편안한 군인들로서 아이젠하워 장군과 같은 유형이라고 하여 ‘아이크(Ikes) 전통’이라고 한다. 이와 반대로 불변하는 군인의 전형으로, 총명하지만 권위적이고 민간인에게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자존심 센 장교들로 맥아더 장군과 같은 유형이라고 하여 ‘맥(Mac) 전통’이라고 부른다.
1952년 T. 해리 윌리엄스가 한 논문에서 제시한 이 분류가 매력적이었는지 이후 미국의 정치인들도 카리스마 있고 굽힘이 없는 맥 타입의 정치인과, 유연성 있고 겸손하며 사교적인 아이크 타입으로 분류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맥아더는 남과 구별되는 특출한 인물이 되고자 했다. 반면 아이젠하워는 주변 사람들의 태도와 행동에 동화되고자 했다. 새뮤얼 헌팅턴은 그의 저서 <군인과 국가(The Soldier and The State)>에서 “맥아더는 횃불이었고, 아이젠하워는 거울”이라고 말했다.
이를 오늘날 한국에 견줘본다면 단연 남재준 국정원장은 맥 전통이고, 김장수 청와대 안보실장은 아이크 전통이다. 이 둘은 현 박근혜정부의 주기율표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상이한 원소들이다. 남 원장은 절대 다른 물질과 반응하지 않고 오직 홀로 존재하는 비활성의 기체, 즉 아르곤(Argon)이다. 외곬이며 고집불통이라는 비난과 함께 강직함이라는 찬사가 교차하는 그의 성격은 북한만이 아니라 그가 고개를 숙이지 않는 민간 정치인들까지도 상당수를 적으로 돌려세웠다. 반면 김 실장은 다른 원소와 쉽게 결합해 다양한 물질을 창조해내는 활성형 물질, 즉 탄소(Carbon)다. 친화력 있는 성격을 앞세워 당파를 초월한 협력의 가능성을 꾸준히 암시하지만 일견 기회주의적이라고 오해받을 수 있을 만큼 다양한 행보를 보여준다.
동시대를 살았던 맥아더와 아이젠하워는 판이한 성격 때문에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재준 원장과 김장수 실장의 경우는 어떠할까. 이것이 지금 우리의 핵심적인 관심사다. 2차 세계대전 말기에 맥아더와 아이젠하워의 경쟁 관계가 미국의 정치와 외교 정책에 큰 영향을 주었듯이 지금의 한국 정치와 대북 정책 역시 이 둘의 관계에 상당 부분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2007년 11월28일 남측 김장수 국방부장관(오른쪽)과 북측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이 2차 남북 국방장관 회담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 공동사진취재단
김일철과 평양 송전각에서의 한바탕 격돌
사교성이란 일종의 인간적 신뢰와 친밀함을 도모하는 과정이다. 김장수 실장과 관련해 의미 있는 일화가 있다. 2003년 4월 합참 작전본부장으로 부임한 그는 당시 조영길 국방부장관이 주재하는 국방부·합참의 간부 조찬·오찬 모임에 자주 참석하게 된다. 이때 김장수는 육사 출신이 아닌 갑종 출신의 조 장관이 입지전적인 노력으로 장관직에까지 오른 것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은 듯하다. 조 장관은 클래식 애호가여서 식사 중에 항상 음악이 나오도록 했고 “저게 베토벤의 ○○ 작품이다” “모차르트의 △△ 음악이다”라며 음악 평론을 반찬으로 삼다시피 했다.
대다수 고위 장성이 못 알아듣고 밥만 먹었지만, 조 장관은 “너희들은 이런 걸 아느냐”는 식으로 계속 평론을 늘어놓았다. 이에 ‘나라고 못할 것이 뭐냐’며 김장수 본부장은 사무실로 돌아와 부관에게 베토벤의 작품 CD를 몽땅 구해오라고 했다. 그런데 베토벤 작품이 그처럼 많은지 미처 몰랐던 게 문제였다. “이렇게 많은 걸 언제 다 듣나”라며 괜히 베토벤을 선택했다고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참고 성실하게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기회가 왔다. 며칠 전에 들었던 베토벤 곡이 때마침 식사 시간에 흘러나왔던 것이다.
“장관님, 지금 베토벤의 작품에서 카덴차가 나옵니다”라는 김 본부장의 말에 놀란 조 장관이 “카덴차가 뭐냐?”고 물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악보와 관계없이 연주자가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부분을 말하며, 작곡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삽입되는 부분이라는 등 공부한 내용들을 설명했다. 김 본부장은 조 장관에게 승리하는 기쁨과 동시에 자신이 모시는 상관과의 친밀성까지 다졌다. 이것이 바로 김장수 사고의 특징, 즉 “공감의 범위가 넓을수록 좋다”는 다다익선 전략이기도 하고, 사교의 미학이기도 했으며, 성공을 보장하는 처세도 되었다.
국방부장관직을 수행하던 2007년 10월2일, 남북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노 대통령과 평양에 도착한 김장수가 김정일 위원장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고 전봇대처럼 뻣뻣하게 서서 인사하는 장면 하나로 그는 ‘꼿꼿장수’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것 하나로 국민적 인기를 모은 김 장관을 향해 일각에서 시기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한 예비역 장성은 “허리 한번 세웠다고 누구는 인기가 치솟고 이게 뭐냐?”고 했고, 또 다른 예비역 장성은 “그 허리는 다림질했냐”며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들은 모두 이후에 정치권 진출과 고위직 진출을 두고 김 장관과 경쟁했던 인사였다.
2007년 11월27일부터 평양 인근의 송전각에서 개최된 남북 국방장관회담은 김장수의 마력이 드러난 극명한 사례다. 회담 이틀째까지 김일철 북한 인민무력부장과 밀고 당기는 협상을 하면서 양쪽은 극도로 피로해 있었다. 이틀째 남한 측이 준비한 저녁 만찬에 북한 쪽 대표들이 참석할지도 미지수였다. 김왕경 준장이 만찬에 참석하라는 유혹의 메시지를 북쪽에 계속 보내는 동안,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은 김정일 위원장으로부터 “북방한계선(NLL) 문제를 계속 고집하지 말고 공동어로구역을 제외한 나머지 남측의 요구 사항을 전부 수용하라”는 지침을 받게 된다. 이제껏 NLL 문제가 재협상되지 않으면 어떤 합의도 할 수 없다고 버티던 북한 쪽의 태도가 확연히 달라진 것이다. 이 지침이 있고 나서 김일철은 이제껏 지었던 험악한 표정을 거두고 우리 측이 준비한 만찬에 온화한 얼굴로 참석하게 된다.
김일철은 심장이 좋지 않아 박동기를 가슴에 달고 다닌다. 이랬던 그가 김 장관이 제조한 폭탄주를 4잔이나 마셨다. 그리고 회담에서의 승강이 때 김 장관이 툭하면 자신에게 “서울에 돌아가서 (국방부장관) 사퇴하면 그만이다. 후임 장관하고 잘해보시라”고 말한 걸 거론하며 “장수 장관, 사퇴하지 마시오. 우리 한번 잘해봅시다”라며 손을 잡았다. 총 7개조 21항의 합의서가 채택되었고, 김 장관은 노 대통령으로부터 전화로 재가를 받아 서명했다. 송전각에서의 국방장관 회담은 남북 관계에서 새로운 역사가 탄생하는 시대의 여명이었다. 우리 측 참석자 일부는 술에 너무 취해 거의 들려서 나왔다.
남재준 “김장수 이후 육군 인재 다 죽었다”
대개 비관주의자는 현실 분석에는 탁월하지만 문제 해결에서 약점을 드러낸다. 반면 낙관주의자는 분석은 철저하지 못하지만 문제 해결은 한다. 김장수의 경우,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협조를 구하는 스타일이다. 2006년 말 당시 윤광웅 국방부장관이 장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확실시되던 때에 김장수 총장이 그를 찾아왔다. 김 총장은 “장관이 되고 싶다”며 마음을 털어놓았고, 이에 대해 윤 장관은 무척 놀랐다고 한다. 이 점이 낙관주의자 김장수와 비관주의자 남재준의 다른 점이기도 하다.
남재준 원장은 2005년 육군참모총장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후임자인 김장수 총장으로부터 시작된 육군의 새로운 진급 관리 시스템에 대해 “육군의 쓸 만한 인재들을 다 죽인 결과를 초래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속내를 남 원장은 필자에게 딱 한 번 직접 말한 적이 있다. 단순히 김장수 총장만이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후임으로 이어지면서 이명박 정부에서까지 초래된 정치권력의 인사 개입이 그런 결과를 초래했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남 원장의 육사 동기(25기)인 한 예비역 장군 ㄱ씨는 “둘 사이에는 인사와 관련된 구원(舊怨)이 있다”고 말한다.
노무현 정권의 청와대와 갈등을 빚으며 물러나는 남재준 전 총장이 새로 임명된 김장수 총장과 계룡대에서 오찬을 하면서 “◇◇◇를 진급 인사에서 구제해달라”고 말한 데 대해 김 총장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이를 무시하는 인사를 했다는 얘기였다. 그래서일까? 남 원장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당시 육군본부 출신의 예비역 장성들이 김장수 실장을 칭찬하는 얘기를 필자는 이제껏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여기에서 둘 사이에 일종의 숙명적 관계가 느껴진다. 그러나 박근혜정부 청와대에서 이 둘 사이의 불협화음을 의심하는 세간의 시선과 달리 지금까지 청와대 안보실과 국정원 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갈등이 없어서인지, 알려지지 않은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말이다.
박근혜정부 국방부장관 추천으로 첫 격돌
2012년의 대통령 선거 당시 상황을 보면 박근혜정부 안보 권력의 지형은 이미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김장수는 새누리당 국방추진단장으로, 남재준은 대통령 후보 안보특보로 이미 조직을 달리하고 각기 추종 세력을 관리했다. 김장수는 언론에 새누리당의 안보 정책을 설명하는 밝은 면을 차지했지만, 추종 세력이 적었고 그들의 충성도도 떨어졌다. 반면 남재준은 그 역할이 뚜렷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과거 육군본부 측근들로 구성된 강력한 추종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 간에 파워게임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시점은 박근혜정부의 초기 국방부장관 인선 때였다. 대통령직인수위에서 안보분과 간사위원으로 활동하던 김장수는 한기호 새누리당 의원을 국방부장관 후보로 강력히 추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 국방위원실의 한 관계자는 “당시 한기호 의원은 이미 장관직으로 진출할 것을 확신하고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김장수 단장이 전폭 지원하던 한기호 의원은 국방부장관 후보가 되지 못했다. 대신 안보특보단에 소속돼 있던 김병관 예비역 대장이 장관 후보로 발표되었다. 여기에는 새누리당 특보단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는데, 김장수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소문이 덧붙여졌다.
그러던 중 김장수 단장은 한 소신 발언으로 엄청난 비난 폭풍을 맞아야 하는 시련을 겪었다. 북한이 3차 핵실험을 단행한 지 사흘 후인 2013년 2월15일.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내정자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을 연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해선 안 되는 말이다. 한미 양국 대통령이 전작권 전환을 합의한 상황에서 연기하자는 건 이상한 얘기다”라고 말했다. 이 말이 알려지자 예비역 장군들 모임인 성우회에서 ‘김장수 영구 제명안’을 회부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북한의 핵실험 이후 성우회 등 보수 세력들이 전작권 전환 및 한미연합사령부 해체 연기를 당연시하는 주장을 내놓은 것에 대해 김 내정자가 정면으로 반박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명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김 내정자는 취임도 하기 전에 원로 예비역 장성들에게 괘씸죄를 지은 셈이다. 여기에다가 김 내정자가 “나는 (북한에 대해) 매파도 비둘기파도 아닌 올빼미파”라며 다소 유연한 대북관을 표명한 것을 두고도 보수 세력은 그를 향한 의구심을 가슴에 담게 됐다.
남재준과 김장수에 대해 예비역 장교들의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과연 무엇이 한국에서 ‘군인다움’의 표상이냐, 또 누가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인재냐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평가가 다를 수밖에 없다. 남재준에게 세상은 직각이고, 김장수에게 세상은 동그라미다. 이 둘은 각기 다른 인생관과 철학으로 일한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공통점은 있다. 2012년 대선 정국에서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로 지난 노무현 정권의 안보 정책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필자는 이 둘을 싸잡아 공격한 적이 있다.
이런 필자의 공격에 대해 이 둘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은 게 분명해 보인다. 이 일을 겪으면서 정치 논리는 오랜 인간적 연민도 변형시키면서 인간 공동체를 예측할 수 없는 복잡한 세계로 이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드러났다. 그러나 이들이 어떤 유형의 군인이건 간에, 한 시대를 책임지고 있다는 역사적 소명과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시사저널] 2014.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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