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將軍들의 전쟁] #4. “이양호는 내 손도 제대로 못 잡았다”
‘린다 김 스캔들’, 공군 출신 국방장관 몰아내려는 ‘육군 패권주의’ 음모
1996년 가을 어느 날. 린다 김에게 이양호 국방부장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김영삼 대통령에게 장군 진급 인사 재가를 받으려고 청와대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대통령이 이상한 말을 하더라는 얘기였다. “이 장관,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인가?” 도대체 대통령의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게 이 장관의 얘기였다. 혹시 이 장관 자신과 린다 김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일까? 무언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날 밤. 숙소인 하얏트호텔 방문 앞으로 걸어가던 린다 김의 눈에 문 앞에 서 있는 호텔 보이가 보였는데 어쩐지 엉거주춤하는 게 이상했다. 린다 김이 앞으로 다가가 노려보며 말했다. “너 누구야, 왜 내 방문 앞에 서 있어?” 그는 눈만 멀뚱거렸다. “너 호텔 직원 아니지, 너 누구야?” 잠시 정적이 흐르다가 린다 김이 “호텔 직원인가 보네”라는 말을 남기고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 순간 안에서 린다 김의 방을 수색하던 5명의 기무사 요원들이 밖에서 나는 린다 김의 목소리를 듣고 일제히 욕실로 숨었다.
린다 김이 욕실로 들어가면 5명이 들어찬 욕실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질 판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린다 김은 곧바로 침대로 가서 고목나무처럼 쓰러졌다. 이 틈에 욕실에 있던 5명은 몰래 방을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호텔 정문 앞에서 린다 김이 들어오는 것을 놓친 기무사 요원의 조인트를 사정없이 깠다. 린다 김은 모든 게 꺼림칙했지만 통 큰 여자답게 ‘들여다보든 훔쳐가든 마음대로 하라’는 듯 잠에 빠져들었다.
2000년 6월21일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린다 김이 서울지법에 들어서고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
‘부적절한 관계’라는 말을 유행시킨 ‘린다 김 사건’은 한 불운한 국방부장관에게 가해진 파국의 비극성을 드러낸다. 1995년 국방부장관에 임명된 이양호 장관은 문민정부의 대규모 군부 숙청인 ‘하나회 척결’의 대표적 수혜자였다.
육군의 핵심 인물들이 줄줄이 거세되고, 공군 출신으로 합참의장과 국방부장관으로 승승장구한 그였다. 그러나 청와대에 다녀온 직후인 1996년 10월 국정감사 기간 중에 이 장관은 대우로부터 뇌물을 수수했다는 스캔들에 휘말려 전격적으로 경질된다.
이양호, “린다 김과 부절한 관계” 고백
국정감사 마지막 날, 국방부에 감사를 나온 여야 의원들은 어제까지 합참의장이던 김동진 대장이 국방부장관 자리에 앉아 있는 걸 보고 거의 기절초풍했다. 하룻밤 사이에 합참의장이 군복을 벗고 장관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준전시 상황인 한반도에서 군사 작전을 총괄하는 합참의장은 누구란 말인가?
국방부 답변은 “지금은 공석”이었다. 그해 9월 잠수함을 타고 강릉에 들어와 상륙한 북한군과 우리 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지는 비상사태가 발생했다. 다수의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하면서 침투한 북한군을 소탕하는 군사 작전은 11월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그 기간에 군사 작전을 총지휘할 한국군 사령관은 없었던 셈이다. 당시 국방부에서 일어난 급변 사태는 하나의 작은 ‘정변’이라고 불러도 될 판이었다.
린다 김 스캔들은 이로부터 4년 후인 2000년에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이양호 전 장관이 자신의 장관 시절이던 1996년부터 린다 김에게 보낸 연서(戀書) 수백 통이 언론에 흘러들어가 둘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 증폭됐다. 그러던 중 이 전 장관이 이를 취재하던 한 언론사를 제 발로 찾아가 린다 김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다”며 사생활을 언급했다.
한국 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모든 언론사의 사회부 기자들이 서울 논현동 린다 김의 집 앞에서 일명 ‘뻗치기’라고 하는 대기 상황에 들어가고, 취재 경쟁이 과열되면서 온 나라가 초대형 스캔들에 휘말려 들어갔다. 지금도 중앙 언론사 중견 기자들은 사회부 초년병 시절 논현동 골목에서 대기하던 일이 한 번쯤 있었을 법하다. 공사장에서 주워 온 나무로 깡통에 불을 지피고, 밤을 새는 기자들이 안쓰러웠는지 린다 김이 중국집에서 배달시켜준 짜장면을 얻어먹은 기억들도 한 번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신드롬도 일어났다. 린다 김이 착용한 것과 유사한 선글라스가 백화점에서 동나기도 했다. 그가 쓰는 모자, 핸드백, 즐겨 마시는 커피까지 모든 주변이 화제였다. 심지어 한 여성지는 ‘여고생이 닮고 싶은 여성 1위’에 린다 김이 선정되었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여성 로비스트의 이미지는 연예인, 미모, 선글라스, 무기 로비, 재벌 2세와의 관계, 권력의 이면, 국제 사업가, 연애편지와 같은 무수한 키워드로 확장되었다.
대중은 왜 이 사건에 그토록 빠져들었을까. 바로 우리의 내면에 은밀하게 서식하는 욕망의 판타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스캔들이라고 하지만 미모와 재능, 재력을 겸비한 성공한 여성의 이미지는 숭배의 대상이다. 심지어 그 스캔들까지도 부러움이 되고 마는 기가 막힌 일이 이어진다. 그것이 어떤 때는 소설로, 또 다른 때는 드라마로 재현되기까지 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0년경, 필자가 인터뷰를 하기 위해 만난 린다 김은 그런 세간의 이미지와 다르게 노년 초기에 진입한 보수적인 여성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서인지 그 사건을 회고하던 그는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다”며 후회했다.
당시 린다 김이 손을 댄 무기 사업은 거의 다 성공했다. 1970년대 27세의 나이로 중동에서 전투기를 팔아 한 번에 큰돈을 벌고 남미로 건너가 셀 수도 없는 무기를 팔았다. 한국에서도 그는 전두환 정권 시절에 미국의 노스롭그루먼사의 F-20 전투기 판매가 거의 성사될 상황까지 갔었다. 하지만 1984년 성남 비행장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비행 시범을 보이던 중, 조종사가 너무 과시욕을 부리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처박히는 사고를 당했다. 이후 이 비행기는 탈락했고 전두환 정권은 전투기 사업을 아예 하지 않았다.
“사업 나누라는 말 들었어야…” 뒤늦게 후회
그러다가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1990년대에 와서야 린다 김이 중개한 이스라엘의 팝아이 미사일 도입이 성사됐고, 동부 지역의 전자전 장비 사업도 곧 성사될 것으로 보였다. 가장 큰 사업인 백두·금강 정찰기 도입 사업까지 이어졌다. 린다 김이 혼자 하기에는 너무 벅차서 영상 정보 수집 정찰기 도입인 금강사업은 또 다른 무기 로비스트인 조풍언씨에게 떼어줘야 할 정도였다. 린다 김은 신호 정보 수집 정찰기인 백두사업에만 전념했다.
이 사업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센서를 공급하는 4개 회사, 이를 탑재하는 비행기를 공급하는 항공기 3개 회사로 총 12개의 센서-항공기 조합 시나리오가 나왔다. 이걸 도맡아 한 것이 국방부나 합참의 정보본부도 아니고, 정찰기를 운용하는 정보사령부도 아닌 바로 린다 김이었다. 우선 한국군은 사업의 판을 짤 수 있는 실력과 경험이 없었다. 이 무렵 린다 김은 이미 단순한 무기 로비스트가 아닌 권력자였다.
하루는 무기 도입을 관장하는 국방부의 윤종호 차관보가 거꾸로 린다 김에게 부탁을 했다. 린다 김이 담당하는 몇몇 사업에 대해 “다른 회사에 넘기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당시 린다 김의 성격으로는 자기 것을 남에게 주라는 제안을 용납하기 힘들었다. 물론 지금에 와선 “그때 그 말을 들었어야 했다”고 후회하지만. 안기부·기무사와 같은 권력기관들이 전부 무기 사업에 관여하면서 한 다리 걸치려 하는 데 대해 린다 김이 단호히 거부하자 국방부 일원에서 그는 어느새 공공의 적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뇌물 사건이 불거졌다.
2000년 5월11일 백두사업과 관련해 로비 의혹을 받고 있던 린다 김이 논현동 안세병원에서 퇴원하기에 앞서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
‘엘리트’ 육군, 공군 출신 국방장관 ‘왕따’
이양호 장관의 전격 경질과 그 후 이어진 자신과 관련된 스캔들. 린다 김은 지금도 당시 김영삼 정권에서 소외돼 있던 육군 세력들이 조직적으로 공모해 이양호를 제거하려 했고, 자신은 그 과정에서 이용됐다고 확신한다. 공군 출신이 합참의장과 국방부장관이 되는 걸 과연 우리 군의 파워엘리트라고 하는 육군 세력이 용납할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이양호 장관에 대한 내사를 진행한 육군 출신의 권영해 안기부장과 임재문 기무사령관 그리고 김동진 합참의장까지 전부 한패였다고 본다. 이양호 장관이 청와대에 인사 재가를 받으러 가기 전 권영해 안기부장이 먼저 청와대에 들어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이 장관의 뇌물 스캔들과 ‘충청 군맥을 만들려 한다’는 인사의 문제점을 먼저 보고한 것은 여러 언론 보도를 통해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육군 출신들이 해·공군 출신들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패권을 유지하는 경향이 있다는 건 한국군의 아주 기이한 특징 중 하나다. 이는 이양호가 합참의장이던 시절부터 그랬다. 의장으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1993년 어느 날 합참 고위 장군들과 회의를 하던 의장이 뜬금없이 한마디 했다. “그런데 전투지경선이라는 게 뭔가?” 어떤 부대가 인접 부대와의 작전구역을 구분하기 위해 전방·후방·측방으로 설정하는 선이 전투지경선이다. 이걸 모르는 육군 장교들은 없다. 그런데 합참의장이 이걸 묻자 대다수가 육군인 합참의 장군들은 ‘의장이 저런 것도 모르냐’며 조롱하는 분위기였다. 이후 이 의장은 합참 업무에서 겉도는 듯했다. 그래서일까? 이양호는 합참의장임에도 불구하고, 현행 작전에 대한 개입보다 특정한 정책에 더 몰입하는 것처럼 보였다.
1996년 장관 지시로 합참 정보본부는 ‘한국군 정보 현대화 계획’을 최초로 수립한다. 그 보고서는 충격적이었다. 한국군은 신호 정보의 99%, 영상 정보의 98%를 미국에 의존한다. 이제껏 자주국방을 표방한 한국군 전력 증강 사업, 일명 ‘율곡사업’을 추진한 이래 한국군이 정보 전력에 투자한 예산은 총 전력 증강비의 0.6%에 불과하다. 정보병과는 아예 육사 출신들이 기피하는 소외된 병과였다. 한때 합참의 정보본부장을 역임한 이양호가 한국군의 ‘정보 자주화’를 자신의 핵심 과업으로 인식하고, 이후 금강·백두 사업을 장관실에서 직접 관장한 것이다.
그러나 분위기가 이상했다. 이런 일이 있었다. 백두사업이 이미 문제가 되던 1998년 10월에 당시 국회 국방위원 보좌관으로 국정감사 배석차 국방부에 와 있던 필자가 잠시 감사장 밖으로 나온 사이에 한 장교가 필자에게 다가왔다. “잠깐 조용한 데서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말을 건넨 이 장교는 필자를 민간인이 절대 출입할 수 없는 국방부 청사 맨 위층으로 데려갔다.
복도에서부터 필자를 발견하고 제지하는 헌병을 제압한 이 장교가 데려간 방에는 백두 정찰기를 운용하는 정보사 소속의 9125부대 주요 간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준장 계급의 한 장성이 자신을 부대 참모장이라고 소개하고 첫마디부터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1994년 5월30일 김영삼 대통령이 안보장관회의에서 이양호 합동참모본부 의장과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백두사업만 저지할 수 있다면 감옥 가도 좋다”
“백두 정찰기 도입 사업만 저지할 수 있다면 저는 감옥에 가도 좋습니다. 무슨 비밀 자료든 다 제공할 터이니 국정감사에서 이 정찰기 도입만은 막아주십시오.” 그야말로 황당했다. 책상 위에는 백두사업과 관련된 갖가지 비밀 자료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는 사실상 국방부장관에 대한 항명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영삼 정권 때 이양호 장관이 추진한 사업이고, 김대중 정부에 들어와서 천용택 국방부장관도 계속 추진하려 했던 사업이다. 필자는 당시 이 장성의 문제제기에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흘러 지금에 와서 만약 한국군에 백두·금강 정찰기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를 상상해보게 된다. 이 정찰기가 도입되고 나서 한국군의 대미 정보 의존도는 90%대에서 80%대로 낮아졌다. 심지어 미군도 우리의 정보를 얻으려고 한다. 그 덕분에 좀 더 대등한 관점에서 한미 간의 정보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다. 눈과 귀가 먼 한국군에게 이만한 효자 무기도 없다. 그런데 그 시절에 육군 출신들은 왜 그처럼 이 사업을 못마땅해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또 왜 대형 스캔들로 번진 것인지도 미스터리다.
한때 백두사업은 “머리를 하얗게 세게 만든다”는 애물단지라는 의미의 백두(白頭)사업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의 천용택 장관은 이 사업에 반대하는 9125부대장과 그 참모장을 구속시키면서까지 이 사업을 강행했다. 그렇다면 최소한 이양호 전 장관이나 린다 김이 세간에 알려진 대로 국방 사업을 말아먹은 역적은 아니라는 얘기다. 린다 김 역시 필자에게 “백두사업을 성사시키고 나는 훈장을 받을 줄 알았다”며, 훈장은커녕 거꾸로 공공의 적으로 내몰린 데 대해 억울해했다.
백두사업의 진실이 그처럼 왜곡되었다 하더라도 린다 김과 이양호 장관 간의 부적절한 관계의 진실은 지금도 여전히 궁금증으로 남는다. 이에 대해 린다 김은 “결코 부적절한 관계는 없었다”며, 2000년에 이 전 장관이 언론사에 찾아간 배경을 설명했다. 그날 이양호 전 장관은 그 신문사를 찾아가기 전에 가족회의를 하고 부인으로부터도 양해를 얻었다고 했다. 사생활 문제라면 사법적 문제가 아니므로 법적 책임을 피할 수 있었다고 본 것이다. 실제로 이양호는 린다 김의 손 한번 잡아본 일조차 없다고도 했다.
그렇게 수줍어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린다 김에 대한 연모를 편지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린다 김에 대한 기무사의 수사는 온통 백두사업의 실무자와 국방부 주요 인사는 물론 장관에 이르기까지 ‘어떤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는가’에 맞춰져 있었다. 굳이 린다 김의 해명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되면 중령부터 대령, 장군, 차관보, 장관까지 전부 내연의 관계라는 이야기인데 이는 상식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수사기관과 언론은 사태를 그렇게 몰고 갔다.
린다 김과 이양호의 관계는 한때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을 만큼 대형 스캔들이었다 하더라도 그 이면의 진실과, 우리 사회 내부의 권력 관계를 심층적으로 고려하면 우리는 역사적 사건도 얼마든지 정직하게 재구성할 수 있다. 그러나 말초적 관심에 끌려 사건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데 그친다면 이는 역사를 제대로 볼 줄 모르는 것이다.
[시사저널] 2014.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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