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將軍들의 전쟁] #6. 군인아파트에 ‘하나회 명단’ 괴문서 살포되다
YS, 대통령 취임 직후 참모총장·기무사령관 옷 벗겨…‘대숙군’ 작업 신호탄
권위주의 시대에 국가를 통치하는 최고 엘리트 집단으로서 군 장교단이 있었다면, 그 장교단의 기세를 확실히 꺾어버리고 제압한 정치인은 오직 한 사람 있었다. 바로 김영삼(YS) 전 대통령이다. 1993년 출범한 YS의 문민정부는 그동안 군 내부에서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던 전두환·노태우의 군맥이라고 할 수 있는 군 사조직, 일명 ‘하나회’에 대한 전면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스스로 ‘성전(聖戰)’이라고 부를 만큼 기세등등했던 수십 명 고위 장성의 군복을 벗겼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영관급 장교라 하더라도 하나회와 연관만 되어 있으면 장군 진출까지 봉쇄해버리는 사상 초유의 대규모 숙군 작업이었다.
YS가 대통령에 취임한 지 불과 11일 만인 1993년 3월8일 아침에 권영해 국방부장관과 회동을 하고 오후에 하나회 출신 육군참모총장·기무사령관 등을 갈아치운 이 전광석화와 같은 숙군 조치에 대해 기록은 ‘3·8 사태’라고 칭하기도 한다. 당시 정권 핵심부조차 놀란 이 조치가 있은 다음 날, 김영삼 대통령이 아침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니들도 많이 놀랐제?”라고 웃으며 말하자 청와대 수석들도 그 배포에 혀를 내둘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997년 10월 김영삼 대통령과 당시 권영해 안기부장이 공군 행사를 참관하고 있다. 김 대통령과 권 장관은 문민정부가 출범하자마자 하나회 숙청 작업을 주도했다. ⓒ 시사저널 포토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수방사령관, 특전사령관 등 하나회로 의심되는 인물에 대한 숙군이 이어지던 4월2일 서울 동빙고동 군인아파트 우편함과 승용차 앞유리창에 ‘하나회 명단’이 적힌 괴문서가 대량으로 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훗날 이 문서를 살포한 ‘거사’를 일으킨 이는 육사 31기 출신의 백승도 당시 대령으로 밝혀졌다.
명단에는 현역 중장급 인사인 육사 20기부터 중령급인 육사 36기까지 기수별로 7~11명씩, 총 142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원래 하나회는 1973년의 ‘윤필용 사건’에서 문제가 된 조직으로, 육사 26기를 마지막으로 명맥이 끊어진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해체되기는커녕 오히려 그 세를 더 확산하면서 시퍼렇게 살아 있으며, 이들이 동기생들 중에서 1차 진급과 핵심 보직을 독식하면서 군 사조직으로 활동해왔다는 점은 직업 장교단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또한 전두환·노태우의 5·6공화국 정권을 거치면서 사실상 한국 정치를 좌우한 권력의 줄기세포로 기능해왔다는 점에서 국가적으로도 심각한 일이었다.
육사 31기 ‘하나회’와 ‘비하나회’ 멱살잡이
‘백승도 대령의 거사’와 관련해 필자는 육사 31기생들로부터 그 전후 사정에 대해 다양한 증언을 들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동기생들 사이에서 증언이 엇갈린다. 이미 작고한 육사 31기생 노 아무개 예비역 준장은 노태우 정권 마지막 해인 1992년 당시 대령으로 기무사 1처 5과장을 맡고 있었다. 장교의 신상에 대한 동향 관찰을 총괄하는 게 주 임무였다. 당시 기무사는 사령관과 1처장이 모두 하나회 소속이었는데 청와대로부터 “일선 장교들 중 정부의 시책을 비판하는 자들이 있다는 첩보가 있으니 그 실태를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래서 관찰을 시작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기무사령관과 1처장 등은 이 일을 “군 내부에 사적 조직이 암약하고 있다”는 방향으로 몰고 가려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즉, 하나회가 아닌 다른 사조직이 있는 것으로 믿는 분위기였다는 설명이다.
그 직후 대통령 선거가 있고 나서 1993년 초쯤 육사 31기생 동기회장 선출이 있었다. 과거에는 동기생들이 모여 추대하는 방식이었으나, 일부 동기생이 이의를 제기해 선거로 뽑자는 주장이 나왔다. 이때 백승도 대령이 주도해 하나회 동기회장에 반발하는 ‘비(非)하나회’ 동기를 옹립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설전이 오가는 사태가 발생했고, 하나회 측과 비하나회 측은 서로 멱살잡이까지 했다. 물리적 충돌 직전까지 간 상황이 진정되자 백 대령이 노 대령에게 다가와 “너는 기무사에 있으니 상황을 똑바로 인식하라. 군에 하나회라는 사조직이 있다”며 격앙된 주장을 하더라는 것이다. 이 동기회장 선거가 이후 문민정부가 출범하고 난 뒤 하나회 명단 살포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게 노 준장의 증언이다. 그러나 한민구 전 합참의장을 비롯한 일부 육사 31기생들은 이후 필자에게 “당시 동기회장 선거에서 물리적 충돌은 없었다”며 “(노 준장의 증언은) 과장된 것”이라고 말했다. 사건의 주인공인 백승도 예비역 준장은 현재 이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다.
왜 육사 31기생이 주축이 되어 군 내부의 사조직 논란이 터져 나왔을까. 적어도 한국 현대사에서 군의 주요 사건을 이해하려면 31기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31기는 510명을 입학시켜 126명을 퇴교시키고 384명이 임관됐는데, 이는 전임 기수보다 임관 인원이 26% 증가한 수치다. 당시에는 북한의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한 사건인 ‘1·21 사태’(1968년)를 겪고 나서 ‘생도 배가운동’이 진행되던 때였다. 생도 시절 가혹한 스파르타 훈련과 극심한 경쟁을 견뎌냈다는 자부심과 에너지로 무장된 31기 출신들은 역동적인 집단문화를 표출시켜왔다. 이런 문화가 임관 이후에도 고스란히 이어져 동기회장 선거에서는 ‘하나회’와 ‘비하나회’로 양분되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는 이후 하나회 숙군을 가속화한 배경이 됐다.
2004년 벌어진 남재준 육군참모총장의 진급 비리 사건도 소장 진급을 앞두고 있던 육사 31기 출신들의 공개적 불만 표출에서 시작됐다. 1993년 하나회 명단을 살포했던 백 준장이 2004년 10월께에도 남 총장실을 찾아와 전역지원서를 던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이 발생하기 하루 전에 남 총장은 소장 진급 대상자인 3명의 31기 출신 준장을 계룡대 인근의 한 식당으로 불렀다. 남 총장은 이들에게 술을 권하며 진급을 시킬 수 없는 사정을 설명하고 위로했다. 이들 가운데 한 명은 남 총장의 말을 수용했고, 한 명은 유보적 입장이었는데, 나머지 한 명은 총장 면전에서 극심하게 반발했다. 그가 바로 백 준장이었다. 이후 남 총장에 대한 공개적 불만 표출이 육군 인사 비리 수사로 연결되었다는 게 육군 안팎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하나회 숙청 없었다면 DJ·노 정권도 없어”
YS 정권은 하나회 숙군에 이어 12·12 군사반란에 대한 국회 청문회를 수용하고, 군의 무기 도입 비리까지 파헤치는 ‘율곡 사업 비리 특별감사’를 진행함으로써 뇌물을 받은 전직 국방부장관, 참모총장들을 줄줄이 감옥으로 보냈다. 이 모든 것이 정권이 출범한 1993년 한 해에 전격적으로 다 이루어졌다. YS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후 여러 차례 인터뷰와 회고록을 통해 “당시 이 조치가 없었다면 김대중(DJ) 정권, 노무현 정권은 절대 출범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사상이 불온했다고 여겨지던 DJ와 노무현을 군부가 절대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YS 자신이 군부의 기를 확 꺾어놓았기 때문에 이후 군부가 감히 정치에 개입하지 못했던 것이고, 그 바탕 위에서 민주적 절차에 따라 정상적인 선거가 이루어져 야당으로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는 설명이다.
1991년 12월5일 취임한 김진영 신임 육군참모총장은 취임 1년3개월 만인 1993년 3월 YS의 하나회 숙청으로 인해 옷을 벗어야 했다. ⓒ 연합뉴스
전두환·노태우, 유력 정치인들 자질 평가
1987년 시민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신군부의 시각으로 보자면 민주주의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었다.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민주주의는 국가 안보에 위해를 가하고 북한 공산 집단을 유리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 안보에 책임이 있는 군부는 어떤 위기의 순간에는 국가를 보위하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돼 정국이 혼란스럽던 1979년의 신군부 반란, 즉 12·12 사태는 바로 그런 애국심과 충성심의 발로였다고 스스로 정당화한다. 비록 1987년의 민주화 시위가 군부에서 용납할 만한 수준이었다 하더라도 이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는 군부가 믿을 만한 안보관과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국가 안보를 위해 ‘행동할 수 있는 군부’였다. 그런데 YS의 하나회 척결은 그러한 군부를 ‘행동할 수 없는 군부’로 바꾸어놓았다.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면, 군부는 한때 대통령을 낙점하려고도 했다. 1980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맡으며 현역 군인 신분에서 국가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해 있었다. 하루는 최규하 대통령이 전 사령관을 불러 “나는 하야를 하겠으니 전(全) 장군이 국정을 맡아달라”고 말했다. 얼마 후 최 대통령의 하야 성명이 나오고 정권을 인수하는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전두환 사령관과 노태우 서울계엄분소장은 머리를 맞대고 유력 정치인들의 자질을 평가했다.
<노태우 회고록>(2011년)에 따르면, 당시 전두환과 노태우는 김종필(JP) 전 공화당 총재에 대해 유신과 장기 집권에 책임이 있는 사람인데 이제 와서 “유신을 반대했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신의가 없는 사람이라며 배제했다. YS에 대해서는 “국가 안보에 대한 신념이 부족하고 군에 대한 친근감이나 인맥이 두텁지 못하다”는 이유로 배제했다. DJ의 경우 “군 내부로부터 한마디로 ‘위험한 인물’로 평가돼 김일성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래서 신군부가 스스로 정권을 인수하게 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당시 군부는 혼란스러운 정국을 믿고 맡길 정치인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스스로 정권을 인수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권력 기반이었던 민정당에 YS의 민주당, JP의 공화당이 합쳐져서 탄생한 민자당의 뿌리는 역시 민정당이었다. 군부의 지분이 그만큼 강했던 집권 민자당에서 스스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이가 YS였다. 따라서 YS가 군부와의 관계를 원만히 가져갈 것이라는 점은 상식에 속했다. 그런데 그런 YS가 집권하자마자 거꾸로 신군부를 대거 몰아낸 것은 세간의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오늘날 국방부 사이버사령부의 댓글 공작과 군내 종북 교육 등 군의 정치 개입이 사회적인 논란이 되는 걸 지켜보면서 필자에게는 한 가지 떨쳐버리기 어려운 의문이 생긴다. 최근 우리 군의 장교단 사이에서 “우리 사회의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정치가 국가 안보에 부정적 영향을 초래하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에는 국가 안보 논리에 민주주의가 희생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민주주의 논리에 의해 국가 안보가 희생되고 있다는 인식이 장교단 내부에서 확산되는 것처럼 보인다. 국가에 반역하고 적을 이롭게 하는 세력에게까지 정치적 자유를 허용하는 민주주의 때문에 국가 안보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는 불안 심리가 그것이다. 이런 상황을 단순화한다면, ‘민주적 가치’와 ‘안보적 가치’라는 우리 사회의 핵심 가치가 서로 충돌하는 상황이 된다. 민주와 안보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사회의 중요한 구성물로서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서로가 서로를 잠식하는 구도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공방의 자기 파괴 속성은 의학에서 말하는 ‘자가 면역’과 흡사해 보인다.
왜 민주주의가 국가 안보에 부정적이라고 인식할까. 교육사령부 교재에서도 지적하듯이, 자유민주주의는 전체주의에 비해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우월’한 제도이지, 전체주의와의 결전에서 ‘유리’한 제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극단적 상황을 지향하는 전쟁에서 전체주의는 잘 단결돼 있는 반면에 민주주의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옛 소련에 대한 봉쇄 정책을 주장했던 미국의 대표적 소련 전문가인 조지 케넌은 최근 국내에 번역된 <미국 외교 50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민주주의가 이 강의실만큼 커다란 몸집에 바늘만 한 크기의 뇌를 가진 선사시대 괴물과 비슷한 게 아닌가 하는 썩 유쾌하지 않은 궁금증이 일곤 합니다.”
정규 육사 첫 기수로 통하는 육사 11기 동기인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군 사조직 ‘하나회’를 이끌었다. ⓒ 연합뉴스
‘민주적 가치’와 ‘안보적 가치’의 충돌
이처럼 군 일각의 의식 속에서는 민주주의와 국가 안보가 잘 조화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군 장교단이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해 스스로 논리적 모순으로 자신을 몰고 가지는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 개념 자체가 일반인과는 다를 수 있다는 데 그 차이가 있다. 국가 공동체의 생존과 이익을 더 중시하는 민주주의는 그 반대자를 배격한다는 전제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이는 로마식 민주주의, 즉 국가 공동체의 가치를 이끄는 집정관과 같은 엘리트의 통치에 바탕을 둔 공화적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일반인들이 선호하는 민주주의는 자유적 민주주의로서 국가보다는 개인의 가치를 더 존중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적어도 이 점에서 일반인과 장교단이 민주주의에 대해 가지는 개념은 확연히 다르다. 이렇게 민주주의에 대한 다른 이해가 한국 현대사에서는 극심한 갈등과 충돌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왜 군 사조직은 탄생했을까. 물론 하나회는 “육사 장교들끼리 친분을 도모하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를 계기로 만들어진 정권 친위적인 엘리트 장교들의 모임, 즉 ‘일심회’가 그 기원이다. 윤필용 사건 당시에는 하나회 소속 장교들이 서빙고 보안사 분실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군복을 벗기도 했다. 사조직을 이끌던 전두환과 노태우가 고문을 받지 않고 그 후에 진급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과 박종규 경호실장의 특전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만이 사조직의 본질은 아니다. 정치권력과 국가에 대한 무한한 충성과 애국심을 통해 나약한 개인은 무언가 위대하고 숭고한 체험을 한다는 국가주의 엘리트 의식이 그 핵심이다. 이것이 집단의식으로 한 번 형성되면 다른 조직, 다른 개인에 대해 “우리가 가장 스마트하다”는 상대적 우월감으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한없이 숭고한 그 무엇에 복종하는 선택된 선민, 즉 엘리트 집단이 창출되는데 그 순간 절차적 민주주의가 교란되기 시작한다. 이들은 도덕적 정당성을 스스로 만들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법을 위반하고 지휘 체계를 마비시키는 일을 해도 된다는 면죄부를 주었다. 그리고 자유적 민주주의자와의 숙명적인 전쟁이 발생하게 된다.
적어도 이 점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권위주의 시절을 떠받치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한 뿌리를 제거했다는 역사적 평가만큼은 받아야 한다는 게 필자가 접한 대다수 전문가의 공통된 견해다. 당시 숙군 작업에 국민의 90% 이상이 환호하며 지지했다.
[시사저널] 2014.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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