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將軍들의 전쟁] #7. 한국군 장교, ‘북핵 폭격’ 하려던 미 장군에 저항하다
1994년 한반도 전쟁 먹구름…청와대·군 수뇌부 상황 파악 못하고 허둥지둥
김영삼(YS) 정권 출범 첫해인 1993년, 한미연합사 작전부장으로 부임한 토미 프랭크스 소장은 성질이 매우 급하고 단순한 군인이었다. 전쟁이란 군사적인 요인 외에 정치·외교·문화적 요인이 결부된 매우 복잡한 문제임에도 그는 이런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다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게 전쟁이란, 마치 한국전쟁 당시의 맥아더 사령관처럼 오직 이기지 않으면 지는 것이고,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것이며, 상대방을 지배하지 않으면 내가 지배당하는 그런 단순하고 명쾌한 문제였다.
그 중간을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폭력의 행사가 극단으로 치닫는 파국적 상황에서 오직 결과만을 생각해야 했다. 이런 그의 기질은 훗날 대통령이 된 조지 W. 부시와 같은 텍사스 출신이라는 점에서 미국의 네오콘과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는 10년 후 대장으로 진급해 미군 중부사령관으로 부임한 2003년 이라크 전쟁이 벌어지자 단 17일 만에 전쟁을 끝냈다.
그가 한미연합사 작전부장으로 부임해 있던 1994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와 영변 핵시설 가동으로 핵 위기가 고조되었다. 위기의 3월을 넘어 4월에 북한 대표가 판문점에서 ‘서울 불바다’ 같은 협박 발언을 하고 모든 대화 채널이 단절된 가운데 6월이 되자 전쟁은 이제 기정사실화되었다. 걸프 전쟁에서 이라크군을 완벽하게 제압했었던 프랭크스 장군에게 북한은 단 며칠이면 붕괴시킬 수 있는 원시 국가처럼 보였다.
1993년 6월22일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게리 럭 신임 한미 연합사령관에게 지휘봉을 수여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반도 전쟁 직전까지 간 1994년 6월
그러나 당시 김영삼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군 수뇌부와 정부 관계자 누구도 미국에 “군사행동을 중지하라”고 말하지 못했다. YS는 회고록에서 자신이 클린턴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전쟁을 중지하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한국군을 한 명도 동원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미국의 전쟁을 저지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나중에 통역은 ‘YS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나중에 백악관 역시 “YS에게서 그런 전화를 받은 적이 없다”며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의 통화 기록까지 제시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청와대는 급박한 전쟁 위기에서 거의 판단력이 마비되다시피 했다. 군대 내 사조직 척결과 무기 도입 비리 조사를 통해 군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은 정치권력은 실제 전쟁 위기에서 국군 통수 능력의 한계를 드러냈다. 미국 국가안보회의(NSC)에서 영변을 폭격하기 위한 미군의 군사 계획이 구체적으로 논의되는 시점에도 동맹국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한국 정부는 혼란에 빠져 아무런 정책도 결정하지 못했다. 미국의 동향뿐만 아니라 북한의 전후방 상황에 대해서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미국의 전쟁 의지가 확고하다고 본 한국군 수뇌부는 6월에 육해공군의 전쟁 준비 실태를 점검했다. 그런데 곳곳에서 허점이 드러났다. 우리 전투기는 북한의 표적을 식별하는 적외선 센서와 야간 항법 장비가 없었고, 북한 장사정포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신형 대포병 레이더도 없었다. 무엇보다 탄약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당장 국방 예산에서 긴급 소요로 3300억원을 전용해 긴급한 물자를 조달하도록 했다. 이제 한반도의 운명은 미국에 맡겨야 할 판이었다.
미국이 북한 핵시설을 포격하면 전방의 북한 장사정포가 대응할 것이 분명했다. 연합사에 근무하고 있던 한국군 장교들은 그럴 경우 서울이 불바다가 되기 때문에 사전에 북한의 장사정포를 항공력으로 제압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당시 작전참모부의 한국군 연락장교 정경영 중령(육사 34기)이 “폭격 계획만이 아니라 장사정포 대비책이 있어야 한다”고 발언하자 프랭크스 장군은 “회의 시간에 이미 계획된 폭격 계획 외에 절대 다른 말을 하지 말라”고 일축했다. 6월 초 게리 럭 연합사령관 주재로 개최된 작전회의에서 정 중령이 “장사정포 대책이 없으면 북한 핵시설 폭격은 불가하다”며 이 문제를 재차 거론했다.
순간 옆자리에 있던 프랭크스 장군이 정 중령의 목을 옥죄며 “그 말 하지 말랬잖아”라며 발언을 제지했다. 정 중령이 “한 말씀만 더 드리겠다”고 하자 게리 럭 사령관이 프랭크스를 가로막고 정 중령에게 발언하도록 했다. 정 중령은 군산에 배치된 미 7공군의 F-16 전투기는 ‘야간 저고도 항법 및 적외선을 통한 목표 획득 장치’로 알려진 랜턴 장비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동원해 영변 폭격과 동시에 북한 장사정포에 대한 항공 작전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난장판이 된 작전회의가 끝나고 그날 저녁 프랭크스 장군이 정 중령을 호출하더니 “축하한다. 너희들 건의를 게리 럭 사령관이 수용했다”고 비아냥거리면서 말했다. 그러자 즉시 미 7공군 조종사들 사이에 난리가 났다. 북한의 조밀한 방공망을 뚫고 저고도로 지상에 착 붙어 날아가 북한의 장사정포를 실수 없이 포착해 공격하라는 아주 어려운 임무가 자신들에게 부여된 사실을 안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하면 작전에 투입된 미 전투기의 50%는 손실된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1994년 3월19일 북한의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실무 접촉이 결렬된 뒤 박영수 북측 대표가 눈길을 돌린 채 송영대 남측 대표와 악수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서울 불바다’에 집착한 북한
이 무렵 전쟁 위기를 지켜본 카터 전 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에게 “내가 직접 김일성을 만나겠다”며 자신을 특사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이어 게리 럭 사령관은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국 대사와 만나 8만명의 주한 미국인 철수 계획을 논의했다. 클린턴 대통령이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 존 샐리캐슈빌리 합참의장과 함께 마지막 결심을 앞둔 6월15일, 북한에서 돌아온 카터는 주한미군 벙커에서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해 “김일성 주석과 핵 동결에 합의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 장면을 지켜본 게리 럭 사령관 역시 전쟁이 발발하면 초기 90일 동안 5만2000명의 미군과 49만명의 한국군 사상자가 발생하고 민간인 피해가 막대하다는 점을 들어 신중론으로 돌아섰다. 8만명의 미국인을 대피시킬 계획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미국의 전쟁 비용 610억 달러도 동맹국으로부터 보전받기 어렵다고 판단됐다.
북한은 1990년대 벽두부터 비정상적으로 ‘서울 불바다’에 집착했다. 전방의 장사정포를 비롯한 포병 화력이 서울을 타격할 수 있도록 전진 배치하고 집중시키는 새로운 작전이 출현함에 따라 서울의 안전은 크게 위협받았다. 불과 40km 밖에서 적의 대포가 겨누는 수도권 일원에 1500만명이 살고 있었다. 인류가 전쟁을 시작한 이래 전쟁터 한복판에서 이렇게 높은 인구 밀도를 보인 적은 어떤 기록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사실 북한의 이런 포병 배치는 전쟁의 원리에 비춰본다면 비합리적이다.
자신들의 포병 전력을 분산해 은닉해야 하는데 서울 불바다에 병적으로 집착한 나머지 전방에 포병 전력을 밀집시켰다. 이럴 경우 유사시 상대방의 공격에 의해 한꺼번에 파괴되기 쉽다. 그러나 북한은 서울 시민을 인질로 한 강한 전쟁 억지력을 구축함으로써 자신의 안전이 도모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전략은 주효했다. 당시 전쟁 위기가 불상사 없이 지나간 것은 카터의 중재 역할 때문이기도 했지만, 서울의 안전이 볼모로 잡혀 있는 국가적 상황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8년 후인 2002년. 이남신 합참의장의 방에 리언 러포트 연합사령관이 찾아왔다. 그는 “럼즈펠드 국방장관의 지시를 받아 구상한 미국의 새로운 작전계획을 설명하겠다”며 “미국의 현대화된 항공력으로 북한의 장사정포 포탄이 서울에 단 한 발도 떨어지지 않도록 하면서 북한의 핵시설을 정밀하게 폭격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이게 그 유명한 ‘작전계획 5026’이라는 북한 핵시설에 대한 선제공격 계획이었다. 기존의 전면전 계획인 ‘작전계획 5027’과 달리 북한을 정밀 타격하는 또 하나의 ‘비상계획(contingency plan)’인 것이다. 이 계획은 북한이 핵과 미사일로 위협하려는 징후가 있을 때 이를 선제 행동으로 제거하면서 서울의 안전을 도모하는 각종 군사적 방책을 담고 있었다.
“미국은 언제든 전쟁을 결심할 수 있다”
이 설명을 들은 이남신 합참의장과 그 자리에 함께 배석했던 의장 비서실장 한성주 준장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항공력에 의한 북한 선제공격과 화력 제압 계획을 듣는 순간 공군 출신인 한 준장은 “천재적인 발상”이라고 느꼈다. 1994년과 달리 2002년에는 미국의 항공 작전 능력이 눈부시게 발전해 있었다. 스텔스 기술이 적용된 폭격기(B-2)와 전투기(F-22), 스마트 폭탄인 합동직격탄(JDAM), 여기에 지하 시설을 타격할 수 있는 벙커버스터까지. 예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신무기들을 사용하면 단기간 내 전방의 북한 포병을 제압하고 북한의 전쟁 능력을 마비시키는 게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이 계획은 즉시 이준 당시 국방부장관에게 보고됐다. 이 설명이 있고 나서 2002년 말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에서 이준 국방부장관과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작전계획 5026과 5029 등 새로운 비상계획을 공동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무모할 정도의 이 계획은 다행히 한반도가 아닌 이라크로 향했다.
다시 1994년의 서울 불바다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북한의 전쟁 위협 못지않게 한국 정부에게 큰 충격을 준 것은 ‘미국은 언제든 전쟁을 결심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이 그해 김일성 주석의 사망에 이은 대기근으로 국가 시스템이 붕괴 위기에 직면한 북한뿐 아니라 김영삼 대통령의 한국 정부를 임기 말까지 신경쇠약증에 시달리게 했다. 적대적인 분단 체제에서 남북한은 ‘언제든 전쟁으로 국가가 파국을 맞이할 수 있다’는 공포와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대북 정책에서 냉탕과 온통을 오가며 정책이 일관성 없이 흔들리는 양상이 심화된 것은 그러한 신경쇠약증의 또 다른 일면이었다.
YS는 1993년 대통령 취임사에서 “어떤 동맹도 민족을 대신할 수 없다”며 민족을 강조한 바 있고, 남북 정상회담과 4자회담을 추진해 한반도 핵문제와 평화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1994년 김일성 사망 직후 한국전쟁 전범론을 부각시켜 남북 관계에서 최악의 파국을 초래했고, 전쟁 위기를 고조시켜 국내 정치에서 반사이익을 노리는 이중적 행태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1996년 4월 유종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양호 국방부장관-김동진 합참의장-김동신 합참 작전본부장으로 이어지는 안보 라인은 판문점에 무장 북한군이 난입해 박격포 진지를 설치하는 등 무력시위를 벌이는 상황을 정치화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강릉에 북한 잠수함이 침투하며 벌어진 9월의 안보 위기에서도 우리나라 국방·안보 태세는 총체적인 난맥과 무능으로 상황에 끌려다니기만 했다. 그 와중인 10월에 뇌물 사건으로 이양호 장관을 경질하는 등 안보 위기와 정치 논리가 뒤섞여 마치 가면무도회 같은 대혼란이 연출되고 있었다.
1996년 9월22일 해군 군함이 강릉 앞바다에 좌초한 북한 잠수함을 동해항으로 예인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합참의장 지침, 일선 부대 하달에 17일 소요
전쟁을 겪어본 군인은 함부로 평화를 말하는 민간인보다 더 전쟁을 두려워하며 신중하기 마련이다. 이런 특징 때문에 2003년 이라크 전쟁 때 콜린 파월 같은 정통 군 출신 인사나 에릭 신세키 대장 같은 프로 장군들은 대부분 전쟁에 반대하며 신중한 선택을 주문했다. 그러나 우리 고급 장교들의 경우 전쟁에 관한 깊은 통찰력과 신중한 판단력으로 안정적인 국방 정책을 책임지기보다는 시류에 따라 책임지지 못할 강성 발언을 남발하고 위기 앞에서는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수없이 보였다. 이런 군사 문화에 대해 김종업 예비역 육군 대령(육사 36기)은 “군의 문화는 조작의 문화”라고 단언한다.
그는 정치권력과 상급자의 의도에 따라 전투 상황이 조작되고 허위 보고가 만연한 우리 군은 철저한 자기반성으로 군대 문화를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한국군 군사 문화의 난맥상을 드러내는 증거로 1996년 9월의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을 예로 들었다.
우리 군 17명이 사망한 당시 동부전선 군사작전에서 현장 부대의 전투 상황 기록과 군사령부, 합참의 전투 상보는 상당 부분 사실관계가 맞지 않았다. 상급자가 전투 상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사후에 이리저리 뜯어고쳤기 때문이다. 우리 군은 전투에 대한 상세한 교훈 분석도 없었다. 1996년 당시 우리 군의 상황을 보면, 합참의장의 지침이 일선 말단 부대에 하달되는 데 17일이나 소요되는 등 믿을 수 없이 느린 행정과 비효율적 사례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합참과 각 군 본부 사이의 책임 전가와 비협조, 취약한 지휘통신 체계, 무엇보다 조작을 당연시하는 군대 문화가 어우러져 있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에서 합참의장으로 새로 부임한 윤용남 대장(육사 19기)은 우리 군의 작전 수행 태세를 현대적으로 개혁하기보다 자신이 총장 시절부터 강조한 새로운 지상군 전술인 ‘견부진지 종심 타격’이라는 새로운 전술 개발에 몰입해 군이 요구하는 큰 개혁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게다가 자신의 말에 반발하거나 저항하면 여지없이 재떨이가 날아가는 ‘재떨이 지휘관’에 가까웠다. 그가 만든 마일스톤 접근 기법이나 상황 판단 논리는 우리 군에 새로운 의사소통 체계를 이루어낸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지만 군이 적응하지 못하는 실패작에 가까웠다.
게다가 지상군 편제도 3각 대대에서 4각 대대 편제로 수시로 바뀌면서 일선 부대들은 새로운 진지 조성 공사와 새로운 작전 계획 작성이라는 소모적인 업무에 시달려야 했다. 모두 최고 지휘관의 취향에 부응하려다 빚어지는 관료주의의 병폐였다. 후에 윤용남 합참의장이 퇴임한 다음 날, 이제껏 의장 지시로 운용해오던 그 복잡한 상황판은 몽땅 뜯어져 국방부 소각장에서 불살라졌다. 그러는 가운데 1997년 대선 열기가 정국을 뒤덮었고, ‘북풍’(北風)의 어두운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시사저널] 2014.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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