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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들의 전쟁] #9. 노태우, 이종구 육참총장에게 “개혁 의지 없으면 물러나라”

머린코341(mc341) 2015. 8. 17. 11:13

[將軍들의 전쟁] #9. 노태우, 이종구 육참총장에게 “개혁 의지 없으면 물러나라”


정권마다 국방 개혁 시도…기득권 지키려는 장군들 저항으로 번번이 무산 

 
중국 군대인 인민해방군은 원래 11개 군구였다가 7개로 개편됐다. 대군구는 단독으로 지역 방위를 책임지는 육·해·공군 합성사령부 체제를 유지한다. 과거 군벌 체제의 유산이 남아 있는 중국 군부는 군구사령부 체제 변경에 대단히 민감하다. 군구가 통폐합돼 조정되면 상당수의 지상군 별자리가 줄어들고 지역에 뿌리내린 기득권도 잠식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은 지난해 전쟁을 지도하는 최고기구로 국가안전위원회라는 중앙 기구를 창설했으며, 7개 군구사령부를 5개로 통폐합한다고 발표했다. 


육군 군 구조조정, 25년째 제자리걸음


중국뿐만 아니라 최근 일본 자위대와 대만 군에서도 병력과 부대 구조가 활발하게 재조정되고 있고, 선군정치를 표방한 북한조차 상상하기 어려운 군 내부 개혁을 단행하고 있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 오직 변하지 않는 딱 하나의 군대가 있다면 바로 한국군이다. 한국군의 경우 노태우 정권 당시인 1990년 이른바 ‘818 군제 개혁’을 통해 경쾌하고 간편한 군 지휘 구조로의 전환이 표방된 이래 역대 정권마다 매년 유사한 취지의 국방 개혁안이 성안됐으나 지금까지 개혁된 것이 거의 없다.


국방 개혁에 관한 한 동북아 국가들 중 가장 먼저 눈을 떴음에도 내부 반발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이제는 가장 낙후된 신세가 된 것이다. 그런 한국군은 사령부의 천국이다. 서해에서 전투기가 뜨면 동해까지 10분도 걸리지 않는 이 좁은 전장에서 우리 군에는 별의별 사령부가 다 있다.


1991년 1월30일 노태우 대통령이 국방부 청사에서 이종구 국방부장관에게 1991년도 주요 업무를 보고받고 있다. ⓒ 연합뉴스


우리 육군의 야전군 사령부 체제를 보자. 1970년대 베트남 전쟁으로 한국군 고위 장교들을 과잉 양성한 결과,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들에게 보직을 제공해야 할 필요성에 따라 ‘개선문 계획’이 수립되고 이에 따라 3군사령부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한 번 만들면 없어지지 않는 게 조직의 속성이라서 1군과 3군을 통합한다는 개혁안이 노태우·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권의 국방 개혁안에 모두 포함됐으나, 박근혜정부가 되어서는 통합될 기미조차 없이 또 다음 정부로 연기될 전망이다. 육군 구조조정이 25년째 제자리걸음이다.


구조조정이 지체되는 동안 육군의 조직을 팽창시키는 사령부와 기관 창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인사사령부, 국군정보사, 국군수송사, 국군지휘통신사, 국군의무사, 국방참모대, 국방심리전부대, 국방조달본부(현 방위사업청), 전쟁기념관, 국방군사연구소, 국군복지단, 국방어학원 등등, 이 좁은 나라의 군에 없는 것이 없다. 여기에다 앞으로 국군군수사와 국군교육사가 또 창설될 예정이다.


이렇게 국방부 산하 직할 기능 조직이 많으면서도 이와 중복되게 육·해·공군 본부의 조직과 기능 역시 팽창했다. 과거 노태우 대통령 지시로 개혁안 구상을 책임진 818위원회는 불필요한 상급 기관을 없애고, 군령과 군정의 기능을 재조정해 중첩되거나 필요 없는 기능은 과감히 없애기로 했다. 이럴 경우 육·해·공군 본부 인력은 40%가 감축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 당시 이종구 육군총장은 818위원회 보고 내용을 대부분 왜곡했다. 실제 본부 감축 인력은 2~3%에 그쳤다. 예하 부대 구조개편에서도 경기갑사단 창설을 주도했다.


전차와 항공은 군단급 이상 제대로 전환하고 사단은 경쾌한 전투 조직으로 전환한다는 818위원회 결정을 뒤집은 것이다. 공군으로 전군 조치하기로 되어 있던 방공포대조차 증편하는 것으로 했고, 수색대대를 기계화대대로 증편하며, 3각 편제로 개편하기로 한 보병연대는 수색중대를 추가해 4각 편제로 증편하겠다는 등 육군 조직과 기능을 오히려 확장하는 것으로 개혁을 왜곡했다.


당시 이상훈 국방부장관이 대통령의 질책을 두려워한 나머지 본부 인력을 20% 감축하는 것으로 수정해 1989년 8월24일 각군 총장과 함께 대통령 보고를 진행했다. 이를 본 노태우 대통령이 진노하며 “개혁을 추진하라고 총장에 보임시켜놨는데, 의지가 없다면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핀잔을 주었다.


818 계획은 철저히 왜곡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경악스러운 부분은 인력 구조의 왜곡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1992년 7월10일 국방부에서 올라온 ‘군 정원 조정안’에 서명했다. 이 서명으로 이제까지 군에서 정원을 초과해 운영하던 영관급 장교와 준장 등을 모두 정원으로 인정하는 조치가 이루어졌다. 중·대령 이상의 고급 장교 정원이 1000명 이상 늘어났다. 정원 조정은 818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 향후 보병을 줄이고 항공·기갑·정보·통신과 같은 미래전력 병과 위주로 정원을 늘린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그해 11월 육군은 진급 심사에 임하면서 늘어난 정원 대부분을 보병에 할당했다. 결국 보병은 급격하게 팽창했고, 기갑은 약간 증가, 그 밖의 병과는 정체된 형태로 1993년부터 한국군 장교의 인력 구조가 정착되었다. 여기에다 군 인사법을 개정해 영관급 장교의 정년을 53~56세까지 연장했다. 이는 이후 한국군의 모든 개혁 시도를 좌절시키는 단초를 제공하는 계기가 됐다. 인력 구조가 보병 위주로 되어 있으니 보병 부대를 감축하고 기계화 부대를 늘릴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군이 싸우는 방법을 혁신하려고 해도 보병 작전 위주의 장교단 인력 구조가 딱 버티고 앉아 그것을 가로막는 주범으로 작동하고 있다. 어떤 군사 기동이 포위냐, 돌파냐, 공격이냐 같은 용어를 두고 밤새도록 논쟁하는 형식주의에 기울어진 점도 없지 않다. 여기에다 진급 적체로 군내 유휴 인력이 급증하면서 한국군 전체가 부실화되었다. 믿을 수 없이 느린 행정과 진급 경쟁에 골몰하고 줄 서는 장교단 문화, 더 이상의 혁신을 거부하는 정체된 관료주의 폐단 등 전형적인 ‘관리형 군대’로의 추락이었다. 


국방부가 3월6일, 2022년까지 병력 11만명을 감축하는 등 ‘국방 개혁안’을 발표했다. 사진은 지난해 10월1일 건군 제65주년 국군의 날 기념 시가행진. ⓒ 연합뉴스


조성태의 ‘21세기 위원회’ 비운으로 끝나

그러나 이런 한국군의 정체에 대해 분연히 맞선 인물이 있었다. 조성태 육군 중장은 1군단장으로 부임한 지 불과 10개월 만인 1993년 10월 권영해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국방부 정책실장 임명 통보를 받았다. 권 장관이 김영삼(YS) 정권의 첫 국방부장관으로 취임해 의욕적으로 군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차관 재임 시 정책국장으로 근무했던 조 장군을 눈여겨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돌연 12월에 국방부 조달본부에서 포탄 도입 사기 사건이 터지면서 그 책임을 지고 권 장관이 물러났다. 후임으로 임명된 하나회 출신 이병태 국방부장관은 전임 장관이 만든 국방개혁위원회를 해체하는 대신 “각 군별로 개혁안을 만들어 보고하는 것으로 대체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조 장군이 이병태 장관실로 들어가 “국방개혁위원회에는 육·해·공군의 최정예 자원이 모여 있으니 이들로 하여금 우리 군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존치해 저에게 그 운용을 위임해달라”고 건의했다. 이 장관의 승낙을 받아 조 장군이 위원회 명칭을 ‘21세기 국방연구위원회’로 바꾸고 위원회의 미래 기획 기능을 더욱 보강했다.


미완의 818 계획을 완결 짓고 “21세기 통일 대비 ‘신국방태세’를 정비한다”는 목적으로 전군의 대령급 최정예 18명으로 구성된 ‘국방개혁위원회’는 모두 3명의 위원장이 거쳐갔는데, 그중에서도 3기 위원장이 훗날 김대중(DJ) 정권에서 국방부장관이 된 조성태 장군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7년에 육군은 ‘전력증강연구위원회’, 일명 ‘80위원회’를 운영한 적이 있었는데 위원회 간사장으로 임동원(DJ 정권 때 국정원장·통일부장관 역임) 준장이 업무를 총괄할 당시 중령으로 기획 업무를 담당하던 인물이 조성태였다. 80위원회 시절부터 구상해왔던 우리 국방의 백년대계를 이번에는 반드시 완결 짓고 싶었던 그는 이 위원회에 온 힘을 쏟아부었다.


당시 조 장군이 위원회를 통해 구현하고자 한 것은 통일 이후까지 내다본 한국군의 ‘군축’과 ‘감군’ 규모를 기획하는 것이다. 조성태는 훗날 17대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자신의 기록을 구술로 남긴 적이 있다.


“북한의 김일성은 걸핏하면 ‘남북한 군을 10만으로 감축하자. 만일 그것이 어려우면 1단계 30만, 2단계 10만으로 감축하자’고 공세적인 제의를 해온 반면, 북한의 적화 야욕과 전략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우리 군은 으레 ‘북한의 대남 적화 전략 포기가 선행되지 않는 한 감군은 있을 수 없다’며 거부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참으로 궁색한 논리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고 특히 명분에서 밀리는 형국이었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문제의 ‘군축’에 관한 우리의 대안을 도출해야 했다. 각종 비효율이 만연된 우리 군을 그대로 방치할 수만은 없는 형국이었다.”

문제는 국방 재원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군 구조였다.


1989년 당시에는 국방비 중 경직성 경비라 할 수 있는 운영유지비가 61.9%였는데 그 후 계속 늘어나 1995년에는 70.1%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전력투자비는 같은 기간에 38.1%에서 29.1%로 감소해 국방 예산의 태반이 인건비를 비롯한 운영유지비 위주로 짜였다. 전력투자비 중에서도 신규 사업 비율이 1989년 9.2%에서 1995년 1.0%로 줄어들었다. 국방이 미래를 설계하는 장기 기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병력과 장비 유지에 급급한 상황으로 추락하고 만 것이다. 연구위원회는 이와 같은 구조가 지속된다면 미군이 철수할 경우 대체 전력 확보가 곤란하고 자주국방 태세는 지연될 수밖에 없음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있다.


합참의장과 참모총장 지휘 동시에 받아


전력을 제대로 증강하려면 병력을 줄이고 군 구조를 바꿔야 했다. 이는 너무나도 당연하고 핵심적인 진리이지만 가장 외면당하는 진리이기도 하다. 연구위원회는 2002년까지 병력을 50만명으로 10만명 줄이는 목표를 제시했다. 그러면서 국방 조직과 기능을 과학화하고 정보·지식화한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그런데 문제는 줄이는 방법에 따라 효과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국방 예산 절감 효과는 순수하게 사병만 10만명 감축할 경우 1070억원, 사병과 간부를 군 비율에 따라 함께 감축하면 5528억원 정도 되는 것으로 평가됐다. 군 구조를 그대로 놓아둔 채 병력만 감축한다고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병력 감축에 상응해 부대까지 감축할 경우 2조9968억원이 절감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부대가 감축되면 부대 장비와 물자, 시설 같은 각종 운영 비용이 절감되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조성태 전 장관의 구술 내용이다.


“21세기 위원회의 가장 큰 업적은 장차 남북 간에 병력 감축을 합의했을 때를 대비해 우리의 ‘50만 감축안’을 기획한 일이었다. 이는 수적으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해·공군 병력은 그대로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육군을 56만에서 35만으로 감축·정예화해야 하는 안이었고, 이를 다시 구체적으로 기획해보면 육군의 상비 사단을 12개로 절반 가까이 줄여야 하는 어마어마한 개혁안이었다.


이 기획안이 있었기에 후에 노무현 정권에서 ‘국방 개혁 2020’이 나왔다. 기획안이 갖는 의미로는 ‘비로소 우리도 북한의 상투적인 군축 공세에 실질적 대안을 갖고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전력 보강 및 증강 과정에서 부대 위치 조정, 건물 신축, 신형 장비 교체 등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분야에서 장차 남북 간 군비 축소 또는 통일 이후에도 유지·보유하게 될 부대·전력 위주로 투자의 우선순위를 획정할 수 있게 해주는 가이드라인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예산 낭비 방지와 효율적 집행을 가능케 해주는 지침서 역할도 가능했다.”


YS 정권 3년 차인 1995년 3월 조성태 중장이 대장으로 진급해 2군사령관으로 부임하기까지 18개월 동안 군 구조 개편의 골격은 거의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특히 위원회의 주축인 육군은 818 계획에서 완결 짓지 못한 육·해·공군의 실질적 통합, 즉 단일군 체제를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위원장을 지낸 예상호 장군을 비롯해 이재달 장군, 장세용 장군, 임형규 대령, 김국헌 대령 등이 통합군제 관철을 위한 활동을 수시로 전개했다.


작전은 합참의장, 군정은 각 군 참모총장으로 역할 분담이 이원화되어 있는 기존의 조직은 ‘지휘 통일의 원칙(unity of command)’에 위배된다고 보고 각 군의 예하 부대가 상부 지휘권의 이원화로 혼선과 부담이 가중되고 있는 국방 현실을 격렬히 비판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818 계획 이후 각 군의 예하 작전부대들은 참모총장과 합참의장의 지휘를 동시에 받는, 말하자면 머리가 둘 달린 격이었다. 따라서 합참 기능을 통합군 체제로 전환해 3군에 대한 지휘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군 상부 구조를 바꾸고자 했다. 이와 더불어 각 군 본부는 총사령부 체제로 전환하고자 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1995년 3월29일 청와대에서 해군참모총장으로 승진 임명된 안병태 해군대장의 진급 및 보직신고를 받은 후 삼정도에 수치를 달아주고 있다. 오른쪽은 2군사령관에 임명된 조성태 장군. ⓒ 연합뉴스


통합군파와 합동군파의 격돌


그러나 조성태 장군이 야전으로 가고 난 이후 통합군 체제에 대해 해·공군이 격렬히 반발하면서 보고서를 채택조차 못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결국 1995년, 21세기 국방연구위원회는 흐지부지 연구를 종결한 채 해체되고 말았다. 말로는 21세기 통일 한국의 위상을 지향하는 국방 정책과 전략을 기획한다고 했지만, 각 군 간의 갈등으로 제대로 된 연구가 진행될 수 없었고, 청와대나 국방부도 표류하는 위원회를 방치했다.


연구가 종결된 이후 위원회의 해·공군 장교들이 배제된 채 육군 단독으로 국방부장관에게 비밀리에 연구 결과를 보고하는 전횡과 독선이 나타난 것도 연구위원회의 순수성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결국 연구위원회는 국방의 대의를 세우는 조직이 아니라 각 군 간의 기득권이 치열하게 충돌하는 전쟁터였으며, 이로 인해 아무런 성과도 남기지 못했다.


얼핏 보면 군의 시스템을 현대화하면서 싸우는 방법을 혁신하고 효율성을 달성하는 것이 국방 개혁의 취지인 것 같지만, 사실 국방 개혁은 또 다른 권력 관계를 둘러싼 양보 없는 전쟁이기도 했다. 통합군, 또는 단일군으로의 전환에 대해선 육군의 패권을 강화해 군 운영의 민주성·합리성을 왜곡한다는 해·공군의 우려가 있고, 반면 육·해·공군의 병립 구조는 중복과 비효율의 극치라고 주장하는 육군의 통합군론자들이 격돌하는 방향으로 국방 개혁이 왜곡되었다.


그러는 순간 개혁은 마치 유산 상속을 앞둔 형제들처럼 이제껏 서로 협력하던 조직들 사이에 갈등과 분쟁이 전면화하는 양상으로 변질되는 상황이 이후에도 계속 벌어졌다. 국방 개혁을 방치한 YS 정권의 유산을 물려받은 DJ 정권이 직면한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다.


[시사저널] 2014.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