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將軍들의 전쟁] #11. “전투 중에 막후교섭은 이적 행위… ”
제1 연평해전 당시 해군 2함대사령관 비판…DJ 정권에서 중용된 김동신·조성태 등 공적 몰려
햇볕정책을 표방한 김대중(DJ)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것은 군사적 보수주의를 신봉하는 장성과 장교 등 직업군인들에게 새로운 적응을 필요로 했다. 햇볕정책의 기본 골격이 북한에 대한 화해와 협력이었기 때문이다. 북한이라는 적과 협력하는 정치 지도자를 군의 최고사령관으로 인정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모순에 어떤 식으로든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유달리 군에 대한 피해의식이 강했던 DJ는 군 출신을 정부 요직에 중용했다. 임동원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육사 13기), 이종찬 국정원장(육사 16기), 천용택 국방부장관(육사 16기) 등이 DJ 정권 초기 외교안보 진용에 합류했다. 그 뒤를 이어 조성태(육사 20기), 김동신(육사 21기) 등이 국방부장관직을 거쳐 갔다.
1999년 6월21일 임동원 통일부장관(왼쪽에서 두 번째) 등이 서울 세종로 청사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를 마친 후 장관실을 나서고 있다. 사진 맨 왼쪽은 조성태 국방부장관, 맨 오른쪽은 천용택 국정원장이다. ⓒ 연합뉴스
적과 협력한 배신자들이라는 낙인찍어
예비역 장성들을 중심으로 ‘육사 오적(五賊)’이란 말이 한때 유행한 게 사실이다. 필자는 지금도 육사 출신 예비역 장군들과의 대화에서, 그들이 특히 DJ 정권을 거쳐 간 육사 출신 고위 공직자 및 장성들에 대해 “동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의미에서 ‘육사 오적’이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는 모습을 자주 봤다. 특별한 잘못이 있었든 없었든 그건 중요치 않다. 적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직업 장교단 특유의 적개심 같은 것이 이들을 향해 작동한다. 여기에는 국가 유기체설을 신봉하는 어떤 완고함이 있어서 북한이라는 적을 최종적으로 굴복시키고 정복하지 않는 한 그 전에 손을 잡는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배신 행위라는 의미가 강하게 담겨 있다.
남북정상회담 준비로 분주한 2000년 5월. 김대중 대통령이 임동원 국정원장을 청와대로 호출했다. 그동안 국정원이 황장엽씨와 같은 북한 고위층 증언을 토대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 대한 신상 정보를 정리해 청와대에 올렸는데, 이를 본 DJ가 크게 실망했다. 모든 증언에서 “김정일은 음험하고 부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로서 “도저히 마주할 수 없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DJ가 임 원장에게 “아니 김정일이 ‘미친놈’이라는데, 내가 그런 사람과 정상회담을 어떻게 하느냐”며 “임 원장이 북한에 특사로 가서 김 위원장이 진짜 미친놈인지 알아보라”고 했다. “가급적 김정일과 오랜 시간을 이야기해보라”는 지침까지 덧붙였다.
그해 5월27일에 이어 6월3일 평양으로 간 임동원 특사는 김정일과 가급적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 총 5시간 정도 김 위원장과 직접 대면하면서 그는 김정일이 유머 감각이 풍부하고 말이 통하는 지도자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군 장성 출신인 임 원장이지만 그는 전략가·사상가로서의 면모를 지닌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육사 출신 예비역 장성들로부터 ‘육사 오적’의 대표적 인물로 공격받기도 하지만, 1971년 미국과 중국이 수교하는 데 막후 외교를 수행한 키신저 전 국무장관에 빗대서 ‘한국의 키신저’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이북 출신으로 육사를 나와 준장 시절인 1970년대 말에 한국군 자주국방의 장기 구상을 기획하는 육군본부의 ‘80위원회’ 간사장으로 활약했고, 이후 한국군에 비정규전 교리를 최초로 도입했던 군대 내에서 손꼽는 전략기획통이었다.
그랬던 그가 군복을 벗고 외교관을 역임한 데 이어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는 통일부 차관으로 남북 기본합의서 채택과 이산가족 상봉, 남북 고위급회담 등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국방부·안기부와 같은 냉전 세력의 반대쪽에 위치해 있었다. 이런 그를 1995년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DJ가 삼고초려해서 끌어들였고, 그는 DJ가 만든 아태평화재단 초대 사무총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한때는 자주국방의 설계자였던 그가 이제는 햇볕정책의 설계자가 되어 안보와 통일을 추구하는 사상의 궤적은 마치 긴 여정에 돌입한 혜성과 같이 긴 여운의 꼬리를 남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임 원장의 행적은 여전히 북한을 적으로 삼고 있는 장교단이나 예비역 사회의 시각에서 보면 배신자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다.
최근 번역된 헨리 키신저의 <회복된 세계(restored world)>를 보면, 외교란 상대방과 이익을 조정하고 타협하는 상대적 논리로 전개된다. 그러나 전쟁이란 이기지 않으면 지는 것이고, 죽이지 않으면 죽는 것이고, 지배하지 않으면 지배당하는 절대적 논리로 전개된다. 전쟁의 논리에는 그 중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DJ 정권은 비록 북한이 적이라고 해도 전쟁의 논리를 초월한 외교로 가야 한다고 봤다. 하지만 이런 생각 자체가 당시 장교 집단으로부터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냉전의 질서가 유지되는 한반도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전쟁론자’와 ‘외교론자’로 극심한 분열
남북정상회담이 있기 1년 전인 1999년 6월15일 서해 연평도 인근에서 남한과 북한 해군이 충돌하는 최초의 교전이 일어났다. 현장에서 전투원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청와대는 북한과의 막후교섭을 통해 위기를 진정시키고 더 큰 위기를 막고자 했다. 전쟁의 논리와 외교의 논리가 동시에 진행되던 당시 상황에서 국가의 정체성은 ‘전쟁론자’와 ‘외교론자’로 분열되었다.
제1 연평해전 당시 해군 2함대사령관으로 전투를 지휘했던 박정성 제독은 필자에게 전투가 임박한 상황에서도 북한과 막후교섭을 한 임동원 외교안보수석을 ‘살아 있는 간첩’, 즉 ‘생간(生間)’이라고 격렬히 비판했다. 전투가 임박한 상황에서 교섭이란 “간첩이나 하는 행위”라는 주장이다. 물론 여기에는 반론도 뒤따른다. 만일 그렇다면, 1962년 10월의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해 핵전쟁이 거의 임박했다고 믿어지는 순간에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이 도보르닌 미국 주재 소련 대사와 만나 흥정과 거래를 한 막후교섭도 동일한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반문이 그것이다. 적어도 이 문제만큼은 무엇이 옳은가를 떠나 국가가 숙명적으로 안아야 될 숙제인 것처럼 보인다.
2002년 10월4일 국방부에서 열린 국회 국정감사에서 한철용 5679부대장이 서해교전 직전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경고하는 정보보고서를 올렸다면서 비밀 문서를 공개하고 있다. 그러나 국감장에 있던 군 수뇌부의 제지로 곧 비공개로 진행됐다. ⓒ 연합뉴스
“김동신·남재준이 북한 도발 징후 누락”
정치권력과 군부의 매끄러운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안보 위기는 국가의 정체성을 분열시킨다. 이 같은 비난은 이후 DJ 정권 말기의 김동신 국방부장관에게도 가해졌다. 2002년 6월29일 아침 10시쯤. 집무실에 있던 김 장관은 인터폰으로 “방금 서해에서 교전이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러나 2함대의 최초 보고에는 ‘교전이 벌어져 적함이 불타고 있다’는 내용만 있어 우리 측이 일방적으로 승리한 것으로 인식되게끔 했다. 합참의 지휘통제실에서도 승전한 것으로 알고 제일 먼저 달려온 안기석 합참 작전처장을 비롯해 주요 실무자들이 박수까지 치며 환호했다. 이후 국방부장관·합참의장 등 주요 군사 지도자들이 국방회관으로 자리를 옮겨 장군 진급자들의 신고를 받은 데 이어 오찬까지 하는 동안 서해에서 우리 장병 6명이 사망하고 총 24명이 사상하는 끔찍한 피해가 발생한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 오후부터 우리 측이 선제공격을 당한 끔찍한 패전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리 국방은 그 정당성에서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된다.
서해에서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 당시에 국군 정보사령부 예하의 감청부대(일명 쓰리세븐부대) 지휘관이었던 한철용 소장(육사 26기)은 “정보수집 활동에 태만했다”는 책임을 추궁받고 징계를 받게 된다. 그러자 그는 “김동신 장관을 비롯한 군 수뇌부가 북한의 도발 징후를 고의적으로 누락한 당사자”라고 그해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폭로했다. 이후 군복을 벗은 그는 북한의 도발 정보를 은폐한 당사자로 당시 김동신 국방부장관과 남재준 한미연합사 부사령관(현 국정원장)을 지목하며 가혹하게 비난한다.
이에 대한 논란은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과연 북한의 도발 첩보를 햇볕정책을 의식한 군 수뇌부가 고의로 은폐해 장병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는가 하는 논쟁이 지금 이 순간에도 법정에서 벌어지고 있다. 한철용 전 사령관의 주장이 나오자, 당시 사망한 장병의 유족들이 군 수뇌부를 고소한 것이다. 그 대상자는 당시 김 장관과 이남신 합참의장, 이상희 작전본부장을 비롯해 14명에 이르고 있다.
북한을 대화의 장에 끌어들이는 데 막후 외교와 안보를 동시에 진행하는 DJ 정권에서 국가 정체성이 크게 흔들리고 지도층이 분열된 것은 이후에도 극심한 갈등으로 이어졌다. 그것이 2012년 대선에서 ‘NLL 논쟁’으로 또 재연되었다는 점에서 국방에서의 지도층 분열이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지는 긴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안타깝게도 이 문제가 국민 통합이 아닌 분열로 작동하는 메커니즘이 되고 있다.
이와 별도로 조성태 전 국방부장관 역시 또 다른 특별한 이유로 육사 출신 예비역들에게 ‘오적’의 한 명으로 비난받고 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국방부장관이었던 조성태는 임동원 국정원장과 함께 과거 중령 시절 ‘80위원회’에 소속된 우리 군의 빼어난 정책통 가운데 한 명이었다. 역대 정권에서 장기적 안목의 국가 전략을 기획하는 국방 사상사는 조성태를 빼고는 이야기를 전개할 수 없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그랬던 그가 예비역들에게 극렬한 비난을 받게 된 이유는 어처구니없게도 ‘군인연금법’을 잘못 개정했기 때문이다.
완벽을 지향하는 지략가가 조직의 리더가 되면 참모들은 피곤해진다. 조직의 리더는 때로는 참모들의 거짓 보고에도 어느 정도는 속아줄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여지가 바로 사람이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 장관에게는 그런 면이 없었다. 주된 부작용은 매일 아침 진행하는 국방부 간부들과의 조찬 회동에 있었다. 여기서 장관이 참모를 호되게 질책하다 보니 즐거워야 할 아침 식사는 소화불량으로 이어졌다.
마침 2000년의 그날도 남해일 국방부 인사복지국장이 군인연금법 개정 문제점을 말하기 시작한 데서 발단이 됐다. 조 장관이 짜증을 내며 “빨리 그 법을 개정해버리지 왜 우물쭈물하느냐”고 질책했다. 결국 법안 개정의 부작용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 채 이 문제가 그냥 넘어갔다. 당시 국방개혁위원회 부위원장 자격으로 조찬에 참석했던 조남진 예비역 장군(육사 26기)은 “중요한 군인연금법 개정이 조찬 회동에서 결정된 것이 문제”였다고 증언한다. 이렇게 참모들을 휘어잡는 조 장관은 ‘조 하사’라는 별칭으로 통했다.
1999년 연평해전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보여주는 해군 함정들. ⓒ 연합뉴스
‘조 하사’ 이후 국방장관 조찬 회동 사라져
이런 과정을 거쳐 2001년부터 새로 발효된 군인연금법 내용은 군인연금 지급액을 줄이기 위해 산출 기준이 전역 시 보수 월액에서 전역 전 3년 평균 보수 월액으로, 연금액 인상 기준이 재직자 봉급 인상률에서 소비자 물가 변동률로, 연금 지급 정지 대상이 국가 및 지방단체의 출자 기관에서 모든 근로소득으로 확대된 것 등이 그 골자였다. 당장 이상훈 전 재향군인회장(육사 11기)이 예비역에 대한 노골적인 푸대접이라며 공개 반발하고, 재향군인회가 조직적으로 국방부를 성토했다. 이후 정부 측과 대립하며 재개정 운동을 추진해온 권오강 영관장교연합회장은 이명박 정권 때인 지난 2010년 당시 김태영 국방부장관에게 보낸 공개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군인연금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성태 전 국방부장관님은 김대중 정권 때인 2000년도에 군인연금을 깎아내리는 군인연금법 개정에 동의 서명한 국방부장관으로서 군인연금 수급자에게는 만고의 역적이 되고 있습니다.”
‘만고의 역적’이라는 게 공식 서한에 등장한다는 사실 자체도 이채롭지만 이걸 또 언론에 그대로 발표할 만큼 예비역들의 반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전역 후의 삶과 연관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건드린 조 전 장관이 육사 오적의 반열에 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예비역의 거센 반발로 2010년에 군인연금법은 재개정돼 상당 부분 예비역들의 의견을 수렴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조성태 전 장관의 조찬 업무 수행 이후 최근까지 어떤 국방부장관이 부임하더라도 “조찬 모임은 없다”고 말하는 걸 장관이 국방부 간부를 배려하는 조치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또 한 명의 ‘조 하사’로 통하는 조영길 전 국방부장관(노무현 정권 때 첫 국방부장관)을 끝으로 국방부에서 조찬 간부회의는 없어졌다.
이렇게 군인, 특히 장교단에 상처를 준 육사 출신들이 DJ 정권 시기에 다수 발견된다는 점은 향후 정치권력이 대북 정책을 수행하면서 군에 대한 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예비역 장군들 500명 이상이 집단으로 16·17·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한나라당(이후 새누리당)에 입당해 각기 이회창·이명박·박근혜 후보 진영에 포진한 것은 아무래도 장교단의 집단정신과 명예를 고취하는 데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특정 정당으로 몰렸다는 것은 현역 군인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쳐 군이 정치 논리에 오염되는 현상을 부채질하고 군 내부에 파벌주의를 심화시키는 등 더 큰 부작용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애국심도 좋고 국가관도 좋지만, 자칫 그것이 지나쳐 정치 세력화를 지향하는 군사 집단이 형성된다면 민주주의가 뿌리째 흔들리기 때문이다.
[시사저널] 2014.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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