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將軍들의 전쟁] #3. 연평도 포격 맞은 MB, 청와대 ‘면접’ 후 국방장관 낙점
‘억세게 관운 좋은 사나이’ 김관진…“전쟁은 극단을 지향” 강경 분위기 주도
노태우 정권이 저물어가던 1992년 10월1일 오후 3시30분. 합참 전략본부 산하 군사전략과장을 맡고 있던 김관진 대령은 우리 군의 대변혁의 시작을 알리는 감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한국군의 작전권 환수에 비타협적으로 반대하던 리스카시 한미연합사령관이 청와대로 들어가 김종휘 외교안보수석과 담판 끝에 “1994년까지 평시작전통제권을 한국이 환수한다”고 합의해준 것이다.
그 당시 평시작전권 환수를 방해하려는 각 군 총장과 서완수 기무사령관 등 우리 군 내부의 방해 공작은 집요했다. 이들 방해 세력은 리스카시 사령관의 사주를 받아 평시작전권 환수 반대 논리를 개발해 노태우 대통령의 자주국방 의지를 흔들어댔다.
이에 굴하지 않고 청와대 김희상 국방비서관과 연계해 작전권 환수 논리를 개발한 ‘자주국방’ 장교들의 본산은 합참 전략본부였다. 당시 합참 전략본부는 노태우 대통령이 제시한 ‘민주화와 통일을 추구한다’는 국정 좌표 위에서 한국군에게 요구되는 장기적 안목의 군사 전략을 준비하는 전위대였다. 합참 전략본부장인 천용택 중장, 그 산하 미주전략과장인 권안도 대령과 함께 김관진 대령은 평시작전권 환수의 논리를 개발하는 군사전략과를 이끌고 있었다.
천용택·권안도·김관진 등 호남 출신 3인방의 계획은 명확했다. 1994년까지 평시작전권을 환수한 다음, 곧바로 전시작전권(전작권)까지 환수함으로써 민족자존과 통일의 시대를 준비하는 자주적 국방 태세를 정립하겠다는 것이었다.
2010년 12월4일 김관진 국방부장관이 연평도를 찾아 포격 피해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 연합뉴스
참여정부 시절 김관진, 전작권 전환에 몰두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2006년 11월. 김관진 대령은 어느새 네 번을 더 진급해 대장으로서 3군사령관을 역임하고 있었다. 그 시점에 김 대장이 뜻밖에 합참의장으로 부름을 받은 것은 전임 이상희 합참의장이 사사건건 노무현 대통령의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의지를 거스르다가 임기를 6개월이나 남겨놓고 낙마한 데서 비롯됐다.
김 대장이 합참의장으로 발탁되기 직전인 10월20일 윤광웅 국방부장관은 미국의 럼스펠드 장관과 ‘2012년에 전시작전통제권을 한국으로 전환한다’는 합의를 성사시켰다. 윤 장관은 이 합의를 끝으로 국방부장관에서 물러났고, 새로 부임한 김장수 국방부장관과 김관진 합참의장은 새로운 국방 수뇌부를 형성하는 ‘투톱’을 이루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김장수와 김관진 두 사람은 모두 호남 출신이다.
전임자들이 전작권 전환과 관련된 정치적 짐을 모두 지고 떠난 자리에서 새로운 수뇌부는 또다시 우리 군의 미래를 설계해야 할 중차대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한국군 내부적으로는 ‘국방개혁 2020’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밖으로는 한미동맹 조정을 통해 자주적 방위 태세를 구축한다는 전략적 목표에서 과거 노태우 정권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국군의 역사에서 ‘미래 기획’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호남 군맥’은 그 전위를 자부해왔다. 어쩌면 기득권 세력이었던 보수적인 영남 군맥과 숙명적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무렵 김관진 합참의장은 미래 전작권 전환을 준비하는 한국군 개혁의 청사진을 마련하는 데 골몰했다. 한반도 전시작전을 지휘할 합동군사령부 창설, 각 군 사관학교 통합과 군 구조 및 부대 구조 개편 등 거시적 개혁안을 차곡차곡 구상해나갔다. 더불어 미래 한국군의 단독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합동 전장의 운영 개념도 이 시기에 최초로 구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군의 근원적 변혁을 초래할 핵심 의제들이었다. 대령 시절 미완으로 끝난 군 개혁과 작전권 전환의 숙제를 대장이 되어 자신의 손으로 마무리 짓는 데 대해 김관진 합참의장은 역사적 소명을 느꼈다. 그는 작전권 전환이 “우리 군의 백년대계”라며 그 역사적 사명을 다할 것을 명확히 했다.
MB 정권에서 “전쟁 불사” 강경 발언 쏟아내
2010년 12월4일. 이명박 대통령은 김관진 예비역 대장을 국방부장관으로 발탁했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아수라장이 된 와중에 국방부장관으로 유력시되던 이희원 대통령 안보특보를 물리치고 난국을 헤쳐나갈 적임자로 김관진 예비역 대장을 낙점한 것이다. 정권 실세들이 밀었던 이희원 특보를 배제시킨 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영남 군맥, 특히 대통령을 에워싼 상주 출신 ‘이너서클’의 완패였다. 이 대통령은 김관진 국방부장관 내정을 결정하기에 앞서 그를 청와대로 불러 오랜 시간 면담했다. 청와대 안팎에서 “김관진에 대한 예비청문회는 이 대통령이 직접 했다”는 말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이 면담을 통해 이 대통령은 정권의 취약성이었던 위기관리와 안보 역량을 상당 부분 보완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았다.
제43대 국방부장관으로 취임한 김관진은 군심을 다잡으면서 안보 위기를 관리해야 할 중차대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 무렵부터 김 장관의 행보는 독일식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전쟁의 과학, 전쟁의 술(術)에 천착하는 모양으로 이어진다. 독일의 군사평론가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용기와 모험성, 담대함, 행운에 대한 믿음이라는 자유로운 정신, 즉 직관에 의해 전쟁을 주도하는 군사 지도자의 상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전쟁이란 피를 아끼지 않고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자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다. 그 점에서 전쟁은 일종의 폭력 행동이며 그 폭력의 운용에는 한계가 없는 셈이다. ‘전쟁은 극단을 지향한다’는 법칙을 제시한 클라우제비츠는 근대 독일군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고, 김 장관은 육사 생도 시절 독일 육사에 유학해 이런 사조를 일찍이 접했다.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한반도에 전쟁의 기운이 감돌던 2010년 말 김 장관은 부임하자마자 전쟁을 불사한다는 강경 발언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향후 북한이 연평도 사건과 같은 도발을 해오면 “전투기로 도발 원점을 타격하겠다”고 공언했다. 이전 김태영 국방부장관과는 판이하게 다른 접근법이었다. 전임 장관이 한반도 전쟁 수행의 특수한 측면, 즉 동맹인 미국과의 협의, 전면전으로 확전될 가능성에 대한 정치적 고려 등을 앞세웠다면, 김관진 장관은 이런 정치적 고려를 제거하고 순수한 전쟁술과 과학으로 복귀하는 군사 지도자였다.
이 발언 이후로도 김 장관이 국방부와 합참의 참모들에게 주문한 것이 있다. “왜 한반도 군사 정세는 북한이 주도하고 우리는 적응해야만 하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우리가 주도할 수 있는 방책을 만들어오라”는 것이다. 우리가 북한에 대해 방어적인 태도를 벗어나 공격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주도권을 잡고 우세를 이룰 수 있다는 클라우제비츠의 가르침 그대로였다.
이 주문이 있고 나서 이후 2년여간 “북한의 도발 시 도발 원점과 그 지원 세력 타격” “북 도발 시 정권 궤멸” “김일성·김정일 동상 파괴” “북 핵심 목표에 대한 정밀 타격” 등을 천명하는 김 장관의 발언이 연이어 나왔고, 정승조 합참의장으로 하여금 “북 도발 징후 시 선제 타격”이라는 방향도 제시되도록 했다. 이 기간 중 군의 대응은 극단적 상황을 신중하게 고려하는 정치적 고려가 완화되고 극단적 상황을 전제로 하는 군사적 조치가 강조됨으로써, 비로소 전쟁 전략은 탈정치화의 과정을 겪게 된다.
2013년 3월22일 청와대에서 국방부장관에 유임된 김관진 장관(오른쪽)과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김병관, ‘동양식 전쟁관’으로 김관진과 대립
그러나 동양의 사상은 정치와 군사의 경계를 엄격히 구별하는 서구 사상과는 다르다는 지적이 많다. 박근혜정부가 출범하면서 2013년 2월 김관진 장관 후임으로 김병관 예비역 대장이 내정됐다. 그러나 김병관 장관 후보자의 도덕성에 대한 시비가 불거지면서 국회 인사청문회 통과를 낙관할 수 없었던 그해 3월 필자는 전쟁기념관에서 그와 장시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김 후보자는 클라우제비츠 같은 서구식 전쟁 사상과 달리 ‘<손자병법>의 대가’라는 별명처럼 동양적이며 인간적인 군사 사상을 신봉하는 인물이다. 그는 “북한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하며 구석으로 모는 우리의 행위가 반드시 전쟁에서 유리함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며 “전쟁은 피를 흘리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손자의 부전승(不戰勝) 사상을 강조했다.
오늘날 전쟁의 개념에서 폭력의 사용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가급적 적게 죽이고 적게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군사 전략은 많이 죽이고 많이 죽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게 대량 소모전으로 전쟁을 이긴다 한들 과연 승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무렵 “북한이 서해 5개 도서를 점령할지 모른다”며 도서 방어를 위해 강력한 군사 조치가 필요하다는 말들이 나오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도 김병관 후보자는 “북한은 남한 공격을 목적으로 섬을 점령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며, “섬을 점령할 전술적 필요는 자신들의 방어 필요성에서 나올 수밖에 없지만 그럴 가능성도 희박하다”며 이에 대비하는 데 신중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수도권은 이제껏 전쟁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전쟁터다. 인류 역사상 전쟁터 한복판에 이렇게 높은 인구밀도가 있고 많은 인구가 거주한 적은 없었다. 이런 전쟁터가 어떻게 다른 전쟁과 비견될 수 있는가?”
서구의 전쟁 사상이 통하지 않는 아주 특별한 전장 환경의 한반도에서 억지와 봉쇄라는 외국 이론이 과연 통할 수 있을 것인가. 전투는 군대가 하지만 전쟁은 국민이 하는 것이다. 한순간의 폭력으로 엄청난 국민의 피해가 예상되는 한반도 전쟁을 고민할 수밖에 없는 당시의 분위기였다. 이런 맥락에서 김병관 후보자는 적게 희생하면서 승리하는 방향으로 국방 태세를 개혁해야 한다며 ‘인본주의 국방 개혁’을 주장했다. 김관진 장관과 뚜렷한 대립각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김병관은 그의 주장을 더는 지속할 수 없었다. 우선 청와대 김장수 안보실장과 청문회 준비 과정에서 만나 정책을 조율하지 못했다. 김장수 실장은 김병관 내정자와 상당히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였다. 국회 국방위 야당 측 간사인 민주당 안규백 의원은 김병관 청문회를 앞두고 김장수 실장에게 “도덕성 문제가 불거진 김병관을 청와대가 계속 지지할 것인지 입장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안 의원에 따르면, 김장수 실장으로부터 “안 의원 소신대로 하라”는 입장이 되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 김병관은 인사청문회에서의 거센 공격을 이기지 못한 채 낙마했다. 서양의 ‘무한 전쟁’과 동양의 ‘제한 전쟁’이 대립하던 박근혜정부 초기는 다시 김관진의 유임으로 이전의 기조를 이어나간다.
2013년 3월8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김병관 국방부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가 열리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MB 때 “국방 개혁”, 현 정부에서는 말 바꿔
노태우 정권과 노무현 정권 당시 작전권 환수를 앞장서 추진하면서 자주국방 태세를 지향하던 김관진 장관은 이명박(MB) 정권 시절에는 군 지휘 구조 개혁을 핵심으로 하는 국방 개혁에 몰입했다. MB 정권 시절 김 장관은 “국방 개혁에 직을 걸겠다”고 했다. 그런데 박근혜정부에서는 지난 정부의 국방 개혁에 대해 “의견 수렴이 미흡했다”며 스스로 이를 백지화했다.
전작권 전환도 그가 노무현 정권 시절 합참의장으로서 마련한 ‘전략적 이행 계획(STP)’을 무효화하고 연합사령부를 현재와 같이 존치하거나 한국군이 사령관을 맡는 형태로 개편을 추진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미국과 협의가 되지 않자 또 무효화되고, 이제는 작전권 전환을 추진할 건지, 말 건지조차 모호해졌다. 적어도 김 장관은 예전 정권에서 그가 직접 만든 전작권 전환 계획과 국방 개혁 계획을 모두 부정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이것으로 자신의 지도력과 철학을 스스로 잠식하면서도 장기간 장관직을 역임하는 특이한 경우다. 정권에 따라 말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평가가 이어진다.
군사 지도자로서 김 장관에게는 수시로 바뀌는 정치권력은 동반자이자 짐이었다. 자신이 적응하고 복종해야 하는 정치권력이지만 매번 정권 때마다 국방 개혁의 방향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것이 김 장관의 입으로 하여금 여러 말을 하게 한 일차적 배경이기도 하지만, 일견 타협하고 협력하는 그의 유연한 성격도 한 요인이 되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김 장관에게는 딸만 셋이 있다. 지난해 3월 장관직을 내놓을 무렵에는 퇴임 직후 미국에서 음악을 전공하는 딸의 연주회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 표까지 끊어놓은 상태였다. 그러다가 예기치 않게 다시 부름을 받고 국방부장관 자리에 머물렀다. 이미 공관에서 뺀 이삿짐이 다시 되돌아왔다. 이런 김 장관도 권력의 무상함을 느낀 적이 있었나 보다. 4월에 장관직 유임이 발표되자 그는 간부회의에서 참석자에게 “지난번 내가 장관에서 나간다니까 뭘 지시해도 수첩에 받아 적지 않더니 이제 유임되었다니까 열심히 받아 적네”라고 뼈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이 말에 국장급 간부들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한편으로 소탈하면서 부하를 챙기는 김 장관에게는 상반된 두 가지 부정적 평가가 있다. 하나는 “디테일에 약하다”는 것이다. 지난 정부에서 군 상부 구조 개혁을 추진할 당시에 청와대가 정한 방침이라고 덥석 개혁안을 수용하고 급격하게 추진하려다가 실패한 사례가 그것이다. 지휘 구조 개편이야 좋지만 그것이 초래할 다양하고 자세한 문제점들에 대한 고려가 왜 없었느냐는 지적이다.
두 번째는 또 “너무 디테일하다”는 것이다. 국방부장관이 군의 대비 태세에 일일이 간섭하고 챙기는 것은 본연의 임무를 넘어선 과도한 간섭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육군이 아닌 해군이 합참의장으로 부임한 상황에서 국방부장관이 합참의장 역할까지 다 수행하는 건 일견 당연하다는 반론도 있다. 이런저런 엇갈리는 평가 속에서도 일치된 하나의 의견은 분명하다. “김관진은 억세게 관운이 좋다”는 것이다.
[시사저널] 2014.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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