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179기 황석영의 해병이야기 -
[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4. 땡볕 <198>
GI머니 바뀌면 기지촌은 졸지에 폐허로
나는 다낭에서 만났던 미국인, 베트남인,
그리고 한국인들의 여러 모습을 섞어
'무기의 그늘' 속의 등장 인물들을 만들어 냈다.
결국 내가 베트남에서 발견한 것은 내가 살아 왔고
겪어 오면서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남한에서의 삶과 아시아인의 정체성이었다.
다음주 토요일 정오 이후에는
미군도 PX에서 이전의 군표를 사용할 수 없게 되겠지.
혜정은 저 기지촌에서의 작은 소동을 떠올리고 있었다.
갑자기 술집과 기념품 가게와 사창가에서 미군들이 사라진다.
기지촌의 조용한 밤은 마치 폐광이 되어 버린
서부 시절의 금광마을처럼 적막하게 깊어간다.
울긋불긋한 간판과 조잡한 붉은 전구며
노랗게 물들인 매춘부의 머리카락 또는 손톱에 바른
빨강, 검정, 은회색, 갈색 따위의 매니큐어 같은
기지촌의 모든 색깔은 아메리카와의 연줄이 끊기자마자
일시에 퇴색하기 시작한다.
가짜 축제가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초콜릿과 드롭스의 포장지나
매끈하고 꿈 같은 냄새가 나는 비누,
그리고 알파벳과 점잖은 무늬며
색깔과 금박 은박으로 장식된 담배 또는 술병 따위의
모든 PX 물건은 그것을 사용하는 자들이 사라지자마자
그 환상적 위력을 잃고 고립된 사물로 전락한다.
기지촌의 아침은 그래서 언제나
백주에 드러난 무대장치처럼 황폐하다.
GI 머니가 바뀐다는 소문이 떠돌면
술집 주인, 세탁소 아저씨, 포주 엄마,
그리고 창녀, 구두닦이들은 모두 미쳐버린다.
온통 달러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GI들의 배신에 대하여 분개하고
마지막날이 되면 드디어 세계에서 가장 위력 있는
그림딱지를 의연하게 태워 버린다.
불 속에서 그 기름진 종이는 순식간에
검게 변하고 오그라들면서 사라진다.
창녀는 불을 들여다 보면서 울지 않는다.
누구는 얼마 날리고 누구는 미리 알고
물건을 사두었다는 둥 누구는 군표로
침대 머리맡을 도배했다는 둥 하는 소문이 떠돌다가
다시 미군이 외출을 나온다.
모든 기지촌 사람들은 불 속으로 사라진 돈에 대해서는
금방 잊어버리고 여기에서의 생활과 사물들이
미군의 매개로 다시 생명을 되찾게 된 것에 안도한다.
미군의 주둔은 이런 마취된 안도감과 굳게 연결되어 있다.
구두닦이 소년은 그의 더러운 손끝에서
파란 연기를 올리며 타고 있는 셀렘 담배 때문에
자신을 둘러싼 지겨운 삶의 조건들과 곧 화해한다.
양키가 머물 때에만 이 축제는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축제를 장식할 모든 물건은 끊임없이 새끼를 쳐
서로 그물망처럼 굳게 연결되어
밖으로 아무것도 새어 나가지 못하게 울타리를 쳐 놓는다.
저 피의 밭에 던진 달러, 가이사의 것,
그리고 무기의 그늘 아래서 번성한 핏빛 곰팡이꽃,
달러는 세계의 돈이며 지배의 도구다. 달러,
그것은 제국주의 질서의 선도자이며
조직가로서의 아메리카 신분증이다.
전 세계에 광범하게 펼쳐진 군대와 정치적 힘 보태기,
다국적 기업망의 그물로 거두어진 미국 자본의 기름진 영양 보태기,
지불과 신용과 예금의 중요한 국제적 매개체로 정착된 달러 보태기,
다국적 은행의 번창 등의 결합 위에 핏빛 꽃은 피어난다.
관례였던 일 년보다 좀 늦어진
일 년 육 개월 동안의 참전 기간을 마치고 돌아와 나는 제대했다.
그림=민정기
출처 : 중앙일보,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ctg=12&Total_ID=163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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