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이안 전선의 전운(戰雲)(12)
평균 12개월을 전장에서 생과 사를 넘나들며 생존본능과 전우의 죽음 앞에 끝없는 적개심으로 스스로 적진에 뛰어들고 싶은
유혹으로 고민하며 전장의 야수 가되었던 청룡은 귀국을 한두 달
남겨두곤 소위 귀국을 준비하게 되고,
가능하면 부대에서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열외를 시켜주는것이 관례였다.
훗날 우리가 귀국했을 때 귀국 장병을
보는 사람들이 “자네 돈 좀 벌어왔나?” 묻는데 그 때마다 가슴에 응어리진 알 수 없는 분노가 폭발하여
참으로 많이들 싸운바 있지만, 몇몇
특과(?)부서의 보직을 받고 이(利)에 밝아 약삭빠른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그런 사람을 제외하곤 순수한
참전자들은 공식적으로 허용된 귀국BOX
조차도 채우지 못하고 돌아왔던 전우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1년을 치열한 전투현장에서 새까맣게 그을리며 박박 기다온 보병전우들은 더욱 그랬다. 우리 포병대대는 그나마 다행인 것이 포탄탄피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대대의 공식, 비공식 귀국준비물 1호였다.
장교들은 큰BOX(A형BOX) 1개와
중형BOX 소형BOX 몇 개 하는 식으로 귀국할 때 가져갈 수 있는 화물의 수량이 정해져
있었다.
우스운 일이 지만 자신의
규정량도 못 가져가면 자존심이 상해서 쓸데없는 허접 쓰레기 같은 것으로 BOX를 채워 숫자를 채우기도
했다.
그 무렵 우리 공병반에서는
귀국BOX제작하는 일이 중요한 일과가 되기도 했다. 나는 우선 공병반에 부탁해서 C형 BOX 2개를 주문하고,
7중대 포 분대장 동기생들에게 포탄
탄피작업을 부탁해 두었다.
“걱정
말라”는 동기생들의 대답을 듣고, 나도 포탄 탄피나 가져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C레이션 몇 BOX(이것은 대원들이 먹을 것
아껴서 준비해 주는 것이다.)
말이 쉽지 포탄 탄피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작업을 해야 했는데 탄피 밑동을 적당하게 자르고 윗부분은 납작하게 눌러서 C 레이션
BOX에 담아 꼭 레이션BOX처럼 만들어
담아야 한다.
나는 나 스스로 다른 사람은 잘 챙기면서
내 것은 잘 못 챙기는 좀 세상살이에 어두운 면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이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른다. 내 것을 만들었어도 먼저 귀국
하는 사람에게 내주고, 또 다시 만든다.
7중대 나의 동기생 포반의 대원들은 내 귀국준비를 위해 포탄
탄피 자르는 작업을 위해 또 수고를
해준다.
“기껏 해드렸는데 남을 주면 어떡합니까?”
하고 볼멘소릴 하지만 빈손으로 간다는
대원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사실
그들이 내게 큰소리 칠 수 있을 때는 그런 때뿐이다.
난 또 그들에게 아쉬운 소릴 해야
했고,
생일
전장의 병사에게 생일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 전장이 생사를 가늠하는 그래서 내일을
기약 할 수 없을 때 생일이 갖는 의미는 더욱 애착이 갈수가 있을 것이다. 그 전선에서 생일을 맞았다. 지난해(1967년) 내 생일은
10월1일이었다.
9월28일 배를
탔으니 배를 타고 삼일 후가 된다.
망망대해에서 죽음의 전선으로 가면서 맞는 생일날 아침 일찍
상갑판에 올라 어디가 동쪽인지도 모르지만
어제 해 뜨던 방향을 향해 큰절을 하며 “어머니, 아버지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겠습니다. 만약 돌아가지
못한다 해도 너무 슬퍼하지 마시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십시오.” 고 마음속으로 마지막 인사를 드렸었다.
외아들인 내가 전선으로 간다면 그분들이
받을 충격을 생각해서 집에는 알리지 않고
전장으로 떠나는 내 가슴은 찢어지고 있었다. 식당에 내려가 이 세상에서 처음 먹어보는 화려한(?) 식단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음식만 놓고 보면 최고의 생일이었다. 또
상갑판에서는 함께 가는 해병대 연예인단의
국군의 날 행사 공연도 있어서 내 생일을 축하해 주는 것 같았고 그로부터 벌써 일 년이지나 귀국을 두 달쯤 앞두고 생일을 맞은
것이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본부중대 포병하사관들을 PX로 집합 시켰다. 그 때쯤 나는 본부중대에서 주계장 문하사관(단기8차)을 제외하고
최고참 하사 관이였다.
전장에서 생일파티라니? 조금은 호사스런
일이였지만, 하늘같은 선배의 부름인데 누가 감히 거역 할 텐가?
주계장 문 하사관이 큰 쟁반에 육회를 만들어 보내주었고,
참모부서 하사관들이 맥주를 준비했다.
생일파티와 귀국축하연을 함께하며 유쾌하고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내일 우리 호이안 시내로 외출을
가자.”고 누군가 제안했다.
“좋지”
“나가서 사진도 좀 찍고, 정보선임하사관 추억도 만들자” 고 다른 또 누군가가 동의했다.
“그럼 본부중대 행정하사관은 외출증을
준비하고, 군수하사관은 트럭을 준비하도록,” 내가 지시했다.
다음날 우리, 나를 포함한 일곱 명이
의기투합해서 윗분들에게 보고하지도 않은 채 호이안 시내를 향해 출발하려는데, 저 쪽에서 뛰어 오면서 같이
가자고 소리치는 장교가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을 보니 츄라이 빈손 군청에서 '백만 불짜리 주먹'으로 잘 알려진 손 희태
중위였다.
“어! 오래만입니다.” 내가 인사를 하자
손 중위는
“이차 호이안 나가는 거지?” 인사를
받으며 묻는다.
“네 그렇습니다. 만”
“함께 가자”며 내 대답도 하기 전에
선임 승차 석에 오른다.
나도 그의 옆에 올라타고 출발했다. 그렇게 한참 가고 있는데 운전수가 뒤를 가리킨다.
언제부터인가 헌병 백차가
따라오면서 차 세우라는 신호를 보낸다.
“헌병이 차 세우라고 하는 대요?” 운전병이 내게
말했다.
“그래 길 가에 세워 봐. 무슨
일이지?”
우리 차 뒤에 백차가 서고, 헌병 하사가
내리더니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한 눈에
봐도 후배하사관 같았다.
“왜? 무슨 일인데?” 내가 물었다.
헌병은 내게 경례를 하더니 “수고
하십니다.” 나도 인사를 받으면서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인가?”
“아 네! 저 부탁 좀 드리려고요.”
“부탁? 부탁이라니?”
“시내 나가시는 길이면 차량을 좀 빌려 주십시오.”
“그럼 우린? 무얼 타고
가지?”
“이 백차로 가십시오.”
“이 차로 어떻게?”
“이 차로 두 번에 나눠 가시면 2 시간후에계신곳으로 차량을 보내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차량을 바꿔 타고 시내로 향해 나가다가, 공자묘라는
곳에 들어가 기년 사진을 찍기도 하면서,
호이안 시내로 들어갔다. 유흥업소가
밀집되어 있는 곳에 차를 세웠더니 반라의 미군들이 옷을 끌어안고
“오우! 까뗌 K.M.C M.P
떴다.” 소리치면서 냅다 도망치고 있었다.
“짜식 들 대한민국 해병 무서운 건 알아
가지고, O 빠지게 뛰어 이놈들아!”
호통을 치고 그들이 나온 집으로 으스대며
입성(?)했다. 손 중위는 다른 볼일
때문에 호이안 연락 반으로 갔고…….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얼마 남지 않은 전장을 떠나기
전에 추억 만들기를 하고 밖에 나와 보니
저녁때가 다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부대로
돌아가야 했는데, 차량이 없었다. 백차도, 보내준다던 우리 차도 보이지 않는다. 난감한 일이었다.
시내라고는 하지만 밤이면 아직도 VC가 출몰하는 곳인데, 우리의
무장이라야 M2칼빈 소총이 전부인데다
나는 무슨 멋 부린다고 권총을 휴대하고 있었다. 보통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연락반에가서 대대에 차량을 보내달라고
무전을 할 입장도 아니지 않는가?
출처 : 천자봉쉼터, 初心(홍윤기)님 http://www.rokmcmt.com/
'★해병대 부사관 글 > 해병하사 홍윤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이안 전선의 전운(戰雲)(에필로그) (0) | 2015.11.08 |
---|---|
호이안 전선의 전운(戰雲)(13) (0) | 2015.11.08 |
호이안 전선의 전운(戰雲)(11) (0) | 2015.11.08 |
호이안 전선의 전운(戰雲)(10) (0) | 2015.11.03 |
호이안 전선의 전운(戰雲)(9) (0) | 2015.1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