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 명인·기인

6·25전쟁기(‘53년) - 전쟁재능을 타고난 유동욱 대령

머린코341(mc341) 2015. 12. 9. 07:49

6·25전쟁기(‘53년) - 전쟁재능을 타고난 유동욱 대령


사람들은 다 제각기 타고 난 재능이 있다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 소개하려는 예비역 대령 유동욱씨는 특이한 재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전쟁의 재능을 타고난 전쟁터의 신동(神童)과도 같고 악동(惡童)과도 같은 특이한 인물이다.

 
47년 1월 해군5기로 입대한 뒤 3조(하사)의 계급으로 해군항해학교 교관(담당과목 해상충돌방법예방지법)으로 근무하며 명성을 떨쳤던 그는 그 후(51년 6월) 1조(중사)의 계급으로 해병대로 전입, 석도에 주둔하는 독립41중대에 배치되어 이동호 중대장의 명령으로 현지에서 모집한 45명의 반공청년들을 특별히 훈련시켜(9기 신병으로 현지 입대시킬 계획 하에) 제1유격대를 편성, 8월 12일 월사리반도의 적진에 대한 기습전을 벌여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는데, 그날 밤의 기습전에서 유동욱 중사는 1개 소대의 적이 배치된 그 적 진지를 포위하고 4면에서 예광탄을 발사하여 취침 중인 적의 넋을 빼앗아 일거에 섬멸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유동욱 중사가 해간8기로 임관했던 것은 52년 4월이었으며, 중공군의 2차 추기공세 때 전투단의 수색소대장으로 활약했던 그는, 그 2차 추기공세가 끝난 후 다음과 같은 화제를 남겼다. 즉 155고지(전투단OP) 전방에 구축된 중공군 전초진지에 대한 기습명령을 부여받았던 그는 초생달이 진 직후 10여 명의 대원을 지휘하여 적 진지 깊숙이 침투해 가는 도중 한 대원이 지뢰를 터뜨려 쥐죽은듯이 고요했던 적진지가 발칵 뒤집히는 가운데 4명의 대원이 부상을 당하자 시시각각 적의 포위망이 좁혀지고 있는 진퇴양난의 절박한 상황 속에 대담하게도 판문점으로 긴급피난을 할 결심을 했고, 결심을 굳혔던 그는 통신병으로 하여금 무전기의 스위치를 켜게 하여 상황실에 “판문점으로 향함”이란 말을 남기고 그 길로 써치라이트의 푸른 불빛이 허공에 치솟아 있는 휴전회담장 방향으로 탈출을 결행한 끝에 약 3시간 후(새벽 4시경) 미군 경비지역 근처에 도착, “헤이 유 KMC?"하며 속삭이는 미군의 안내를 받아 대기 중인 4분지 3톤 구급차에 승차하여 무사히 그 지역을 빠져 나올 수가 있었는데, 천만 다행히도 그 일은 전투단 미 해병고문단의 협조로 무사히 해결이 되었지만 중립지역인 판문점의 정치적 군사적인 성격상 하마터면 큰 문제가 될 뻔한 일이었다.

 
그 해(52) 연말경 전투단 정보참모 박재옥 소령은 수색소대장 유동욱 소위에게 중공군의 1차 추기공세 때 빼앗긴 67고지 후면에 나타난 새로운 진지 하나를 발견하고 그 진지를 수색해 보라는 지시를 했는데 지시를 받은 유 소위는 남이 상상도 할 수 없는, 흡사 전쟁놀이와도 같은 백주의 정찰극을 연출하여 적병들을 기만하고 우롱했다.

 
즉 그 날 정오경 전령과 통신병 둘만 데리고 대성동 서남쪽으로 해서 67고지 오른쪽을 거쳐 사천강으로 흘러드는 개울가를 따라 마치 귀순을 하려는 사람들처럼 태연하게 개울 안쪽 뚝 밑으로 걸어가다가 천천히 뚝 위로 올라가 한참 동안 담배를 피워 물고 앉았던 그들은 다시 일어나 그 의문시되는 지점이 환히 바라다 보이는 곳까지 걸어간 다음 다시 담배 한 대씩을 피워 물고 앉았는데, 그 사이에 쌍안경을 들고 확인한 것을 상황도에 기재한 유 소위가 무전기로 “상황끝”을 보고하기가 무섭게 그들은 전원 후다닥 개울 안쪽으로 몸을 날려 제방뚝을 방패 삼아 필사적인 탈주를 감행했고, 시종 의아스런 눈치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적진에선 일제히 화력을 집중시켰으나 그들을 사살하지는 못했다.

 
한편 그런 일들이 있은 후 유명세를 타고 있던 유동욱 소위는 2대대장 서정남 소령에게 스카웃 되다시피 하여 2대대로 전속되어 다음과 같은 어려운 임무를 부여받았다. 즉 바로 그 무렵 2대대에서는 30고지에 대한 기습전에서 실종이 된 2명의 5중대 대원이 전사를 했는지 포로가 되었는지 알아내기 위해 5중대로 하여금 세 차례에 걸쳐 시체 확인 및 회수작전을 벌이게 했으나 허사가 되자 대대장이 애써 영입한 유동욱 소위에게 자신(대대장)이 편성해 놓은 기습 특공대를 지휘하게 하여 그 임무를 수행토록 한 것인데, 그 임무를 행함에 있어 유 소위는 3일 간의 여유를 얻어 자신이 세운 복안에 따라 빈틈없는 모의훈련을 실시함으로써 그 작전을 성공시켰다.

 
그는 4개 분대 중 1개 분대는 해안쪽 50고지로 우회시켜 30고지 배후로 진출시키고 1개 분대에는 30고지의 정면, 1개 분대에겐 시체 수색 및 운반에 대한 임무를 부여하고 1개 분대엔 폭파 및 경계임무를 부여한 가운데 D데이의 02시를 기해 자신의 휘하에 둔 경기관총 사수의 점사(点射) 신호에 따라 후방을 제외한 3면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여 적병들을 혼비백산케 하는 가운데 3발의 엠원소총 예광탄을 공중으로 발사하여 각 분대로 하여금 주어진 임무를 수행케 함으로써 시체 회수를 맡은 분대에선 마침내 철조망 아랫쪽과 인삼밭에서 2구의 시체를 찾아 운구해 오는 데 성공했고, 임무를 완수했던 유 소위는 무전기를 통해 “지금부터 30고지를 폭파하니 관망바람”이라는 메시지를 남김과 동시에 폭파분대로 하여금 다이나마이트의 도화선에 불을 당기게 하여 적병들이 빠져나갔거나 사살을 당한 그 목표고지를 산산조각이 나게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시체 회수작전을 성공시켰던 유동욱 소위는 연천(連川)지구 전투 때 이런 화제를 남겼다.

 
즉 미 해병1사단과 함께 미 1군단의 예비대로 있던 해병제1전투단이 약 10일 간 육군1사단 11연대의 진지를 인수하여 방어하고 있을 때 유 소위는 주저항선에 배치되어 있는 2대대의 탄약 보충을 위해 탄약작업소대원들을 이끌고 1사단의 탄약보급소를 습격하여 출고지시가 없이는 절대로 내 줄 수가 없다며 완강히 거부하는 육군 책임장교에게 권총을 들이대며 “나중에야 산수갑산에 가게 될망정 도리가 없소이다.

 
뒷 책임은 본인이 다질테니 그렇게 아시오. 신세는 꼭 승리로써 갚겠소.”하곤 막무가내로 트럭에 잔뜩 싣고 왔는데, 그 책임장교로부터 보고를 받은 1사단본부에선 용서할 수 없는 일이긴 했으나 해병대로부터 지원을 받는 입장이었던 만큼 불문에 붙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의 1사단장은 김동빈(金東斌) 준장이었다.

 
68년 월남전에도 참가했던 유동욱 대령은 한․미해병대의 여단급 합동상륙전인 베리아반도 상륙작전에서 2대대 상륙단을 지휘하여 용명을 떨쳤다. 군복무기간 중 마산대학(현 경남대학교)과 국방대학원을 수료했고, 2개의 충무무공훈장과 3개의 화랑훈장을 탔던 그는 79년 대령의 계급으로 예편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1券" 중에서

         본 내용의 저작권은 정채호 대선배님께 있습니다. 저작권관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