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기(‘53년) - 부하를 구하려다 순직한 박문오 중위
53년 봄철이었다. 석도부대에서는 휴전이 목전에 다가오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 채 고지 후사면에 작전도로를 개설하기 위해 과거 동키부대(미 8군 직할 민간인 유격대)에서 매설해 놓은 대인지뢰를 제거하기 위해 박문오 중위(해간 3기)가 지휘하는 1개 분대의 공병을 동원하여 지뢰 제거작업을 실시했었다.
그런데 풀밭에 불을 질러 지뢰의 뾰족한 뇌관의 윗부분과 인계철선을 드러나게 한 다음 얼기설기 얽혀 있는 인계철선과 지뢰를 대검과 가위로 하나 하나 제거하는 제거작업은 점심시간까지는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으나 점심식사를 먼저 마친 부지런한 한 대원이 휴식도 하지 않고 작업을 계속하다가 거미줄 같은 인계철선에 발목이 걸려 위험에 직면한 것을 목격했던 소대장 박 중위는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 대원을 구해 내려고 했으나 아차하는 찰나에 3~4개의 M2지뢰가 잇달아 폭발하는 바람에 그 두 사람 뿐 아니라 그 부근에서 쉬고 있던 5~6명의 대원들까지 몰살을 당하고 말았다.
미제 M2지뢰는 폭발할 경우 6미트 상공으로 치솟았다가 우산형으로 퍼져 내리는 무서운 성능을 지닌 지뢰로 알려져 있다.
부대에서는 순직자들에 대한 영결식을 화장으로 치렀는데 목재가 전혀 없어 박 중위의 시신은 목재로 된 2개의 화랑담배 상자를 뜯어서 만든 관(棺)에 넣고 대원들의 시신은 그들이 사용하던 모포침낭에 넣어 기름을 뿌려 화장한 다음 그 뼛가루를 간이묘역에 안장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영결식장에는 부대장 김낙천 소령을 비롯한 부대본부 참모들이 참석하여 고인들의 명복을 빌었는데 추도사를 통해 김낙천 부대장은 고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편 특히 부하 대원을 구하려다 참변을 당한 박 중위의 살신성인의 정신을 높이 찬양했다고 한다. 6. 25동란 때 지휘관이 위험에 처한 부하대원을 구하려다 목숨을 바친 예는 극히 드물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간이묘지에 대한 후일담인데 휴전이 된 직후 이 섬에서 철수할 때 석도부대에서는 간이묘역에 있는 약 30기의 무덤이 혹 북괴군에 의해 파해쳐지는 일이 있어선 안 되겠다는 염려에서 묘패를 제거하고 봉분을 없애는 작업을 하는 한편 석도부대 정훈관 윤양중 소위는 후일 고인들의 유족들에게 그 위치를 알려 주기 위해 수첩에 묘지의 견취도(見取圖)를 그려 두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1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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