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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戰爭期 - 아버지의 한시에 훈장으로 보답한 장한 아들 양동익 해병

머린코341(mc341) 2015. 12. 9. 07:55

6.25戰爭期 - 아버지의 한시에 훈장으로 보답한 장한 아들 양동익 해병

 
1950년 8월 30일 학도의 신분으로 용약 군문에 입대(해병4기)하여 구국 전선으로 달려갔던 양동익 해병, 해병대가 전전한 혈전장에서 세운 혁혁한 전공으로 미국 동성훈장과 을지·충무·화랑 등 4개의 훈장을 탔던 그는 출정하는 날(50. 9. 1) 아들의 무훈을 빌기 위해 지은 한시를 태극기에 손수 붓으로 써서 어깨에 걸어 주며 말없이 당부한 그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용감히 싸워 그처럼 빛나는 훈장들을 가슴에 달고 개선함으로써 나라에 충성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치성(致誠)을 다해 무운을 빌어 준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에 보답한 제주 양씨 가문의 자랑스러운 자손이다(양동익 해병은 군복무기간 중 해병대사령관의 공로표창도 받았다).

 
大韓興隆在此行(대한흥륭재차행)

使吾歡聞凱歌聲(사오환문개가성)

 
위에 적은 한시가 곧 그 태극기에 쓰여 있는 한시인데, 문장구성에 구애됨이 없이 알기 쉽게 그 뜻을 풀이하면, “(오늘의) 이 출정이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우는 길이니 (당부컨대 용감하게 나가 싸워) 나로 하여금 기쁜 마음으로 개선의 노래 소리를 듣게 해 다오”라는 뜻이다. 이러한 시를 남긴 양동익 해병의 부친은 그 때 이미 남제주군 군수를 역임한 분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출정할 때 학생복 차림으로 찍은 아래의 사진 가운데 교모(제주농업중학교)에 두른 흰 띠는 4.3사건(48년) 후(49.1) 제주도에 주둔한 육군2연대에서 학도호국대에 가입한 200명의 학생들(제주농중. 오현중학 등)을 선발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할 때 모표 위에 두른 학도호국대의 표지(標識)이며, 6.25전쟁이 발발한 직후(7월 말경) 육군2연대에서는 군사훈련을 받은 그 학생들 중에서 130명의 돌격대원을 선발하여 8월 2일부터 합숙훈련을 실시해 오던 중 그들 중의 일원이었던 양동익씨를 비롯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해병4기로 지원입대 했다고 한다.

 
한편 이와 같은 입대 배경을 지닌 양동익 해병은 입대와 동시 제1대대 제1중대 제3소대의 BAR사수의 직책을 부여받아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과 수도 탈환작전 및 북진 시의 고성·간성지구전투와 1.4후퇴 후에 수행된 영덕 영월지구 전투와 가리산 화천지구 전투를 거쳐 도솔산지구 탈환작전과 924고지 탈환작전에 참가했는데, 특히 양동익 해병은 도솔산지구 4목표 탈환작전에서 수립한 혁혁한 전공으로 미국정부에서 수여하는 동성훈장을 타게 되었고, 924고지 탈환작전 때 세운 뛰어난 전투공적으로 을지훈장을 타는 영예를 누렸다.

 
도솔산지구 탈환작전 때 24개의 공격목표 중 (양동익 해병이 소속된) 1대대가 담담했던 공격목표는 1·2·4·7·23 목표였으며, 이 가운데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목표는 2 목표였고, 주저항선상의 공격목표인 4목표는 비록 난공의 목표였지만 적의 허를 찌른 야간 기습공격으로 가장 적은 희생을 치르고도 가장 혁혁한 전과를 거둔 전투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4목표에 대한 야간 기습전에서 양동익 해병은 발군의 전투공적으로 동성훈장을 타게 된 것이었다.

 
6월 11일 02시를 기해 감행한 그 4목표 공격에 투입이 된 주공부대는 1중대(장, 이서근 중위)였고, 1·2·3소대에서 차출한 약 30명의 인원으로 편성한 돌격대는 1·2·3소대장이 죄다 그 2목표 공격전에서 전사를 하거나 부상을 당해 후송되는 바람에 화기소대장 최경림 소위가 지휘했다.

 
그런데 쥐 죽은 듯이 고요한 꼭두새벽(6.11)에 소대장의 입에서 “돌격앞으로−!”라는 구령이 떨어지자 돌격대원들은 비호와 같이 허를 찔린 적진으로 뛰어들어 닥치는대로 적병들을 도륙했는데, 학창시절 제주농중에서 학도호국대훈련 뿐 아니라 돌격대훈련까지 받다가 해병4기로 입대했던 1중대 3소대의 BAR사수 양동익 해병은 그 돌격대의 선봉에서 그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적을 무찌름으로써 동성훈장을 받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던 것이며, 그에게 수여된 그 미국정부의 동성훈장은 양동익 해병이 924고지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진해 해군병원으로 후송되어 병상에 누워 있을 때(51년 9월경) 사령부 고급부관(이영호 중위)과 함께 병상을 방문한 정복차림의 미 해병대 고문관(계급미상)이 미 합중국대통령의 명의로 된 훈장 증서와 함께 본인에게 직접 전달했다고 한다.

 
도솔산지구 탈환작전에서 수훈을 장식했던 양동익 해병은 924고지 탈환작전에서도 용명을 떨쳤다.


양동익 해병이 924고지 탈환작전에서 수훈을 장식했던 날짜는 9월 1일이었고, 목표고지 100미터 전방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10중대와 임무를 교대하게 된 1중대는 공격력이 약화된 우일선의 11중대와 연계한 상태에서 일몰시를 기해 돌격을 감행, 20시 30분경 마침내 목표고지를 점령했는데, 그 돌격전에서 그 어느 누구 보다도 용감하게 앞장섰던 양동익 해병은 고지를 점령하는 순간 하퇴부에 중상을 입고 쓰러졌을 뿐 아니라 적의 강력한 역습으로 1중대가 그 고지에서 철수를 하게 되었는데도 그의 뛰어난 용감성을 높이 평가한 1중대 선임장교 김경홍 소위에 의해 을지훈장이 내신되어 수장(受章)을 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경우도 드문 일일 것이다.

 
한편 원주 육군야전병원과 대구 27육군병원(삼덕분원)을 거쳐 진해 해군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미국 동성훈장을 받게 된 양동익 해병은 그로부터 약 10개월 후인 52년 6월 퇴원과 동시 상병의 계급으로 명예제대를 했다. 그리고 양동익씨는 자신이 탄 동성, 을지훈장 외의 충무와 화랑훈장을 어느 전투에서 세운 전공으로 탄 것인지 알 수가 없다고 말하면서 특히 북진 시 간성(杆城)지구의 건봉령에서 최초의 동상자가 발생하여 모닥불을 피웠던 일과 화천지구 전투 때(51.4) 작전상의 도강(북한강)일(4.22) 보다 5일 전에 자신이 소속된 3소대가 정찰임무를 띠고 도보로 강을 건너 601고지를 점령했던 일, 그리고 4월 23일 이른 아침 화기소대장 최경림 소위가 지휘하는 1개 분대의 수색대가 교전 끝에 생포한 부상당한 2명의 중공군을 중국말을 할 줄 아는 홍도식 분대장이 심문을 했던 일들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제대 후 30년 간에 걸쳐 충북 보은전매서장, 제주전매서장, 한국담배인삼공사 제주지점장 등을 역임하고 정년퇴직했던 양동익씨는 공직에서 근무하는 동안 국무총리의 표창을 받았으며 공직에서 물러난 후 재단법인 삼성(三姓 -高·梁·夫)祠 총무이사 및 양씨 종회 총본부 부회장을 역임했다.

 
끝으로 본서에 을지훈장을 탄 11명의 제주 출신 수훈자들 중 생존이 확인된 장용희 양동익씨 등 가슴에 4개의 훈장이 빛나는 전쟁영웅들을 소개하게 된 것을 필자로서는 매우 기쁘게 생각하며 이 두 분의 발굴을 위해 협조해 주신 문창해씨에게 깊은 사의를 표한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2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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