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戰爭期 - 2명의 중공군을 사살한 정인설 중사
6.25 전쟁기간 중 제일 먼저 중공군을 사살한 수훈의 용사는 일본 관동군 출신으로 알려져 있던 정인설 중사였고 그가 소속된 부대는 권석기 중위가 지휘하고 있던 5대대 23중대 1소대(장, 조의정 소위)였다.
그 당시 함흥 방어전에 임하고 있던 5대대에서는 후위중대로 내정된 23중대로 하여금 1개 소대의 병력으로 수색대를 편성하여 함흥 서북방 약 10키로 지점에 있는 함주군 하조양면으로 출동시켜 적정을 탐색하게 했는데 그 날(50. 12. 8) 오후 각 소대에서 차출된 혼성 병력으로 편성된 1개 소대 규모의 수색대를 이끌고 하조양면 사무소를 거쳐 그 면사무소에 나와 있는 상추동리 리장(里長)을 앞세우고 상추동리로 향했던 정인설 중사는 학교 분교건물(공회당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과 야산 기슭에 있는 마을에 병력을 분산 배치하여 숙영을 하고 있던 중 그 이튿날 새벽 마을 뒷산 쪽으로 접근한 약 1개 중대 규모의 중공군과 교전을 하게 되었는데, 그 교전이 중공군과 치른 해병대의 첫 교전으로 치부되고 있다.
그런데 그 중공군과의 조우전은 뜻밖에도 그 지점에 나타난 중공군이 아군 보초병의 수하(誰何)에 암호를 대지 못한 것이 발단이 되어 벌어졌던 교전인데, 그 전투에서 아군 수색대는 영하 20도의 혹한 속에 경기관총 실탄이 약실에 달라붙어 발사가 되지 않는 바람에 경기반장을 비롯한 5~6명의 대원이 사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었으나 교전이 벌어지기 전 민가에서 별도로 숙영을 하고 있던 홍정숙 해병은 다발총을 든 중공군이 방문을 열고 들어설 때 벽 쪽에 누워 있다가 표범같이 그를 덮쳐 쓰러뜨림으로써 대원들의 위기를 구해 일계급 특진을 했다.
한편 동이 틀 무렵 얼어붙은 하천을 건너 야산지대로 철수하는 것을 목격한 정인설 중사는 민첩하게 기동하여 맨 후미 쪽에 처져 있는 2명의 중공군을 해치울 생각을 하고 대담한 배짱으로 그들에게로 다가가 일본 관동군에 있을 때 배운 중국말로 “여보게들 같이 가세~”하고 소리를 질러 그들을 돌아보게 한 다음 그들이 전우인줄 알고 뒤를 돌아보며 두리번거리는 순간 가차 없이 칼빈 M2를 휘둘러 사살을 하고 말았다.
그런 다음 수색대가 진출한 지점에서 약 2키로미터 거리에 있는 제1집결지로 헐레벌떡 돌아왔던 그는 이미 그 집결지를 철수한 대원들로 하여금 민간인 2명을 데려오게 하여 그들에게 하천 건너편 야산 밑에 죽어 있는 중공군들의 목을 도끼로 잘라 가마니에 담아오라는 지시를 하면서 “만약에 잘라오지 않으면 당신네들 가족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요”라고 하자 그 두 사람의 민간인들(40대)은 겁을 집어 먹고 그 지시에 따랐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 그들이 들고 온 그 피비린 가마니는 중대본부를 거쳐 5대대 본부로 운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전설적인 무용담을 남긴 정인설 상사(경남출신)는 휴전 후 진해지구에서 근무 하다가 전역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그가 그 전공으로 어떤 훈장을 탔는지, 그리고 몇 년도에 전역을 했는지 관련기관에 조회를 의뢰해 보기도 하고, 그와 절친했던 역전의 노병 이도조씨(예.준위. 진해거주)를 통해 추적을 해 보았으나 전혀 소식을 알 길이 없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2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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