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戰爭期 - 라이스 상사와 김태익 중사
미 해병제5연대와 7연대 및 아 해병제1연대가 북한강을 건너갔던 바로 그 날(51.4.22.) 밤에 감행된 중공군의 대공세(제1차 춘계공세)로 미 해병연대의 좌측으로 연계된 한국군 6사단(미 9군단 배속)의 주저항선(화천군 사내면 사창리)이 돌파를 당함으로써 한·미 해병연대는 연쇄적인 철수를 강요당하고 말았는데, 그러한 와중에 유독 좌우 인접부대의 상황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채 고립이 돼 있던 1대대(장, 공정식 소령)는 그 이튿날(4.23) 오후에 이르러서야 예비대인 3대대의 엄호 하에 좌인접부대인 미 해병연대 지역으로 철수했는데, 그 때 최전방으로 전개하여 1대대의 철수를 직접 엄호했던 10중대의 역할도 물론 컸지만(중공군에 생포를 당했다가 구출된 10중대장 이동성 중위에 관한 이야기는 본서의 제1권에 수록되어 있음) 급박해진 상황 속에 10중대의 철수를 엄호했던 11중대의 분전은 혼전 속에 치러진 10중대의 상황과는 달리 화력전과 백병전으로 시종한 처절한 공방전이었다.
명령에 따라 10중대의 철수를 엄호하게 된 11중대는 10중대와 11중대 어간의 중간 능선에 증강된 1개 전초분대를 배치해 놓고 있었는데, 그 날 오후 2시경 그 전초진지에 충격이 가해지기 시작하자 중대본부에선 즉각 그 전초분대를 철수시킨 다음 쇄도해 오는 적을 요격했다. 전방에 배치된 소총소대와 그 뒤쪽에 배치된 화기중대 진지에선 일제히 화력을 퍼부어 일단 적의 예봉을 꺾었으나 우세한 병력으로 적이 계속 파상적인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마침내 아군 진지 일각에선 처절한 백병전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그러한 와중에 부상당한 중대장 박건섭 준위가 후송을 당하자 선임장교 육동욱 소위는 유무선이 단절된 절박한 상황 속에 중대본부에 나와 있는 미 해병사단 포병 관측하사관 라이스 상사에게 우군포의 지원사격을 강력히 요청한 끝에 간신히 이동 중인 105밀리포 대신 155밀리포의 지원을 얻게 되어 휘황한 조명탄을 계속 띄워 올리는 가운데 VT탄으로 적을 공격 섬멸했다.
그리고 지원 포격이 끝난 후 라이스 상사는 경기관총의 방아쇠를 당기고 있던 사수가 쓰러지자 그 사수를 대신해서 계속 불을 뿜었고, 또한 중대 선임하사관 김태익 중사는 아군의 조명탄 불빛 아래서 저격을 받아 전사한 중기관총 사수의 시체 위에 걸터앉은 채 정신없이 기관포의 몸통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화기소대장 강길영 소위는 빠츄카포로 떠지어 육박해 오는 적을 공격하여 한꺼번에 여러 명을 해치우는 등 전원이 필사적인 용전으로 적과 맞서고 있었다.
적군이 격퇴를 당한 시각은 그 이튿날(24) 새벽 동이 틀 무렵이었고, 혈전이 벌어졌던 아군의 진전과 진중, 그리고 그 일대의 낭떠러지에는 중공군의 시체가 즐비했다. 전투가 끝난 후 특히 10여 명의 11중대 수훈자들에게는 을지, 은성(미국) 충무 등 푸짐한 훈장이 수여되었는데, 언젠가 왕년의 11중대 선임장교 육동욱씨(작고)는 필자에게 그 때 미 해병사단의 155밀리포의 지원을 받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적탄에 쓰러진 경기관총 사수를 대신해서 계속 총신을 휘둘러 대고 있던 그 라이스 상사와 기관포의 손잡이를 붙들고 정신없이 불을 뿜어 대고 있다가 중상을 당해 후송된 그 중대 선임하사관의 용맹스러운 모습들이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2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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