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 전통·비화

해외 출전<1편> - 강구작전과 지덕칠 하사

머린코341(mc341) 2016. 10. 8. 23:10

해외 출전<1편> - 강구작전과 지덕칠 하사


  1967년 1월 31일부터 2월 3일까지 청룡부대는 '강구(江口)작전'이란 이름 하에 데사키강 입구에서 수로 측정작업을 하고 있는 미 해군 UDT의 활동을 보호하기 위한 작전을 전개했다. 그런데 2단계로 수행된 그 작전기간 중(2월 1일) 2중대와 3중대가 투입이 된 2단계 작전에서는 동수안 3부락 북방에 헬기로 투입되어 그 일대를 탐색하고 있던 2중대 3소대는 오후 3시경 그 마을 우측방의 대나무밭을 수색하고 있던 황보덕성 하사의 첨병분대가 그 숲속에 매복한 적 매복대의 공격을 받아 분대장을 포함한 7~8명의 대원이 졸지에 쓰러지는 변을 당한 것이 발단이 되어 아군을 포위한 적과 아군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데 첨병분대가 피격을 당했을 때 3소대에 파견되어 있던 위생병 지덕칠 하사는 빗발치는 탄우를 무릅쓰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 부상자들에게 달려가 압박붕대를 들이대다가 언덕 위에서 투척한 수류탄 파편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으나 잠시 후 의식을 회복, BAR사수 김수돌 일병의 필사적인 엄호 하에 하반신이 피투성이가 된 몰골로 소대본부까지 기어와선 소대장의 만류를 무릅쓰고 부상당한 대원들에게 놔 줄 모르핀을 챙기던 중 어느새 적의 포위망이 압축되자 소대장에게 안전지대로 철수하라는 말을 하기가 무섭게 엥글리코반의 미군 통신병이 소지하고 있는 Ml4소총을 빼앗아 들곤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는 적병들을 향해 총대를 휘둘러 순식간에 10여 명의 적을 쓰러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 그도 역시 한쪽 가슴에 총탄을 맞고 움찔하며 쓰러질듯 했으나 그 순간 무슨 힘이 그를 버티게 했는지 핏발 선 두 눈을 부릅뜬 채 쓰러질듯 하면서도 쓰리지지 않고 실탄이 떨어질 때까지 총대를 휘두르다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한편 그러는 사이에 현장에는 소대장의 거듭된 요청으로 증원병력을 실은 3대의 헬기가 비래했으나 1번기가 착륙을 시도할 때 집중사격이 가해지는 바람에 2번기와 3번기는 착륙을 단념하고 1번기는 1개 분대의 병력(3중대 2소대)만을 간신히 내려놓고 되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 속에 쓰러진 조기호 병상(사수)의 시체 옆에서 경기관총의 몸통을 들고 필사적으로 적의 선1:을 저지하고 있던 경기관총 반장 이상익 하사는 3명의 아군 부상병들이 5명의 적병들에게 붙들여 가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고 어차피 죽음을 면치 못할 전우들이라 생각하고 그들 모두를 사살하고 말았다. 그리고선 계속 기관총의 몸통을 휘두르다가 손과 손목을 다친데 이어 오른쪽 옆구리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지고 말았고, 쓰러진 그를 BAR사수 김기호 일병이 힘겹게 부축하여 소대본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후(날이 어두워진 뒤) 증원병력을 실은 헬기 한 대가 비래했으나 조종사가 착륙을 시도하지 못하자 여단본부에선 그 곳으로부터 약 2키로 떨어진 지점에서 숙영 중인 3중대로 하여금 1개 소대를 차출하여 고립되어 있는 2중대 3소대의 생잔병력을 구출하게 했다.


  그리하여 고무나무밭이 있는 공동묘지에서 애타게 구원을 기다리고 있던 그 3소대의 생잔병력은 그 날 밤12시경 3중대본부에 도착하게 되었고, 그 시각에 한 대의 매드백(구급용 헬기)이 날아와 부상자들을 싣고 갔는데, 그 매드백에 실려 후송이 된 이상익씨의 증언에 따르면 그 때까지 숨이 붙어 있던 지덕칠 하사가 그 매드백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한편 3중대본부에서 날을 밝힌 2중대 3소대장 박종길 소위는 3중대의 지원 하에 시체를 회수하기 위해 현장으로 떠났는데 대나무숲을 비롯한 마을 일대에서 발견한 36구의 시체들(2중대 3소대 대원들과 3중대 2소대 1분대 대원들)은 모두가 목이 잘린데다가 푹푹 썩어 있는 그 시체에 개미들이 새카맣게 붙어 있어 도무지 누구의 얼굴인지 그 형상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결국 미군들의 의낭속에 줏어 담겨진 그 시체들은 그 다음날 오후 미괄 헬기에 의해 다낭으로 공수되어 그곳에서 화장이 되었는데, 그 화장식에 전사자들의 명부를 가지고 입회했던 2중대 3소대의 향도하사 국중화 하사는 산더미 같이 쌓아 놓은 포탄박스 위에 시체가 담긴 의낭들을 올려 놓고 기름을 부어 화장한 시체가 재가 되자 두개골과 좌골 등 큼직한 뼈를 준비된 유골함에 나누어 담는 일을 거들었다.


  다음은 훈장에 관한 뒷얘기이다. 전투가 끝난 후 1대대본부에서는 2중대 3소대장이 작성한 공적 내신에 따라 소대장 박종길 소위는 을지무공훈장, 향도하사 국중화 하사와 BAR사수 김수돌 일병은 충무무공훈장 수장 대상자로 내신하여 훈장을 받게 했을 뿐 위생병 지덕칠 하사와 경기반장 이상익 하사에 대해서는 아무런 훈장 내신도 하지 않았으나 그 후 동아일보사의 박동환 특파원이 위생병의 신분으로 영웅적인 투혼을 빛낸 지덕칠 하사의 무용담을 취재하여 동아일보 지상에 대서특필한 것이 박 대통령을 감동시켜 고인의 공적을 재조사케 하여 최고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해군에서는 5r년 7월 박정희 대통령의 하사금으로 해군신병훈련소 입구에 고인의 동상을 건립, 고인의 빛나 투혼을 우러러 받들게 하고 있다.


  덧붙여 남겨 둘 한 토막 진중일화가 있다. 출동하던 날 아침 지덕칠 하사는 그가 수통카바 속에 넣어 기르고 있던 두 마리의 강아지 새끼들이 그의 군화를 물고 가버리는 바람에 다른 대원의 신발을 신고 갔었는데,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던 전우들은 그 강아지 새끼들이 고인의 죽음을 알고 그런 짓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들을 하며 그 강아지들에 대한 측은한 정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傳統과 秘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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