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해병대 3·4기를 아십니까
박재형. 前 백록초등학교장/동화작가
인천상륙작전 66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인천 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미군추방투쟁공대위(맥아더 동상 타도 특위)’의 어리석은 투쟁을 보며 분개한 적이 있다. 맥아더 장군이 분단을 유도하고 6·25전쟁을 유발했고, 8000만 겨레를 전멸시킬 수 있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는 제국 군대의 상징이라 주장했다.
이를 ‘활빈단’을 비롯한 애국진영 단체들의 노력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작년에는 ‘인천상륙작전’ 영화가 상영돼 장군의 업적을 잘 알 수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38선 전역에서 북괴군의 기습 남침으로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당하고 중앙청에 인공기가 휘날렸다. 인민군이 한강을 넘어 대전, 낙동강까지 밀려들자 국군은 최후의 보루라는 생각으로 낙동강을 지켰다. 우리나라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으나 다행히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켰고, 그 중심에 제주도 출신 해병대원 3000명이 있었다.
1950년 7월 초순, 제주에 주둔해 있던 해병대 사령부는 위급한 전쟁 상황을 도민에게 알리면서 제주청년들에게 입대를 호소했고, 이 소식을 들은 청년들이 자원입대했는데, 8월 5일에 해병대 3기로, 8월 30일에는 여성대원 126명(여교사 33명·여학생 93명)을 포함한 4기로 입대했다. 4기는 학생들이어서 학교에서 받은 훈련을 감안해 강도 높은 훈련을 받지 않았지만 3기는 지옥 훈련을 받아야 했다.
산남에서 지원한 지원병들은 제주시에서, 산북에서 지원한 병사들은 모슬포에서 훈련을 받았다. 제주농고(현 KT 제주지점)에서 훈련을 받은 지원병들은 불볕더위 아래서 자갈투성이인 남문통과 사라봉을 오르내리며 포복을 하고 제식훈련과 사격, 총검술을 익혔고, 지옥 같은 훈련을 견뎠다.
나라를 구하겠다는 신념으로 고된 훈련을 이겨낸 해병대 3·4기 대원 3000명은 9월 1일 산지항에서 군함을 타고 통영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달성하고 인천으로 향했다. 9월 15일, 유엔군의 선봉으로 해병대는 9월 28일 수도 서울을 수복해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 감격스러운 순간을 뒤로하고 동부전선으로 달려가 김일성 고지 전투, 도솔산 지구전투 등 조국의 산야를 누비며 가는 곳마다 목숨을 내놓고 전투를 한 결과 전승을 함으로써 무적 해병, 귀신 잡는 해병, 상승 해병의 빛나는 전통을 만들어낸 것이다.
또한 모슬포에는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연합국의 몰락 작전에 대항하는 결호 작전으로 창설된 일본 58군이 주둔했는데,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오무라 병영은 버려졌다가 광복을 맞은 이후 1946년 제9연대가 이곳에서 창설됐다.
1948년 6월 27일 대구광역시에서 제1훈련소가 설립됐으나 한국 전쟁이 발발한 같은 해 7월 대구광역시에서 창설된 제25교육연대가 1951년 1월 21일, 오무라 병영을 제1훈련소 본부로 삼으면서 이전되어 50만여 명의 육군이 훈련을 받고 전쟁터로 떠나갔다. 이들 중 다수의 제주청년들이 육군으로 전쟁터를 밟고 순국했다.
이제 6·25전쟁이 끝난 지 65년이 넘었다.
해병대 3·4기 대원들의 나이가 90세를 바라보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을 알아도 제주해병대원의 공을 모르는 제주도민이 많다. 돌아오지 못한 전사자들에 대한 예우와 살아 돌아온 대원들에게 더 나은 복지와 대우가 필요하겠지만 그보다 죽음을 각오하고 전쟁터로 달려갔던 해병대원들의 충정을 알아주는 일이 3·4기 해병대원들이 바라는 일이지 않을까.
대한민국 3·4기 제주해병의 역사는 길이 남을 것이다.
[제주일보] 2017.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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