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22대사령관 전도봉

전도봉 장군님 회고록 19 - 영현 봉송의 길

머린코341(mc341) 2017. 8. 17. 09:26

전도봉 장군님 회고록 19 - 영현 봉송의 길 


적 앞에 두려움 없이 나섰다. 위험한 지역에선 첨병을 자원하며 소대를 이끌기도 했다. 정찰병 역할도 했다. 첨병으로 앞서 나아가 살피면 적이 어디에 있는지, 지형과 지세에 따라 적의 진지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소대원들은 나를 귀신같다고 했다.


적들 역시 내가 배운 전술대로, 자기들이 유리하다고 여겨지는 지형과 지세에 따라 진지를 구축하고 병력을 배치했다. 어찌 보면 전투는 크고 작든 적 지휘관과 나와의 지식과 두뇌와 전술과 담대함의 싸움이다. 대원들은 그에 따라 죽기도 하고 죽지 않고 승리하기도 한다.


나는 전장을 날듯이 다녔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자유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살아서는 갈 수 없는 목숨인데, 이미 포기하였는데 두렵거나 거칠 것이 없었다. 13개월 동안 나와 함께 하였던 부하들은 한 명도 죽지 않았다.


68년 그 지긋지긋했던 구정공세를 지나고 어느 정도 평정이 되어가는 때였다. 상급부대 첩보에 의하여 월맹군 주보급로에 대한 매복 작전이 지시되었다. 소대는 계획된 진입로를 따라 적 지역에 침투해 들어갔다. 저녁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때 쯤 이었다.


이번 매복은 준비과정에서 좀 지체되었다. 어둡기 전에 진지를 점령하고 적을 기다려야 하는데 시기를 놓쳤다. 벌써 적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였다. 나는 서둘러 소대를 끌고 계획된 지점에 다 달았다. 요행히도 지형이 괜찮은 편이었다.


시계가 좋고 오솔길 좌측에 조그만 숲이 있어 우리가 몸을 숨기기에도 괜찮은 지형이었다. 1, 3분대를 전면에 배치하고, 2분대와 함께 능선 움푹 패 인 곳에 소대 C P를 정하였다. 크레모아를 우선적으로 설치했다.


적이 오는 방향으로 눈에 띄지 않게 6개를 설치했다. 그리고 개인호를 팠다. 파낸 흙이 보이지 않도록 숲 속에 숨기거나 풀과 나뭇가지로 덮었다. 나는 오솔길이 시작되는 좌측 숲의 출구를 계속 살폈다. 적이 이동을 한다면 그 숲 속에서 머리를 내밀고 나와 이 오솔길을 통과하여 소대 우측으로 기동해야 하는 지형이었다.


갑자기 소대원 동작이 중지되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 숲의 출구를 바라보았다. 아군일가? 어쩌면 저렇게 태연하게 걸어올 수 있을까? 총을 어깨에 매고, 짐을 등에 지고, 1개분대쯤 되어 보였다. 갯벌속으로 파고드는 바닷가의 게처럼 우리 대원들은 소리없이 개인호 속으로 벌써 스며들었다. 나는 크레모아를 쥐고 있는 박상권 분대쪽으로 파고들었다. 기다리라는 시늉을 했다.


바짝 코앞에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신호였다. 그들도 어둡기 전에 가야할 길이 멀었나보다. 제법 빠른 걸음이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아무 두려움이 없는 듯 보였고 총총히 걷기만 했다. 적의 선두가 전방의 중앙을 넘어섰을 때 첫번째 굉음이 들렸다. 무서운 위력이었다. 연이어 크레모아가 폭발하고 소총사격이 시작되었다. 완전한 승리였다.


적은 총 한방도 제대로 쏘아보지 못했다. 대대와 중대에서 조명 지원이 이어졌다. 대대에서는 이미 우리 소대의 계획된 매복지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크레모아 폭발음이 들리고 교전이 시작된 것이 일종의 상황 보고였다.
 
나는 중대에 보고할 여유와 틈조차 없었다. 적의 후속부대가 몰려 올 경우 우리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이미 진지가 노출되어 있고, 크레모아 등 유리한 무기를 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급히 중대장에게 중대기지로 철수할 것을 건의하는 것이 첫 번째 상황 보고였다. 그 곳에 머무는 것이 두려웠다. 적의 화기와 철제 BOX를 노획했다. 나는 그것들을 들쳐 매고 철수를 명했다.


숨을 헐떡거리며 우리 모두 예외 없이 땀에 흠뻑 젖은 채, 두 눈을 어둠 속에 뻔쩍거리며 중대기지로 돌아왔다.
 
다들 야단들이었다. 1소대가 또 잡았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번번히 적을 잡았다.


후에 상급부대에서 알려준 바에 의하면 매복대에서 우리소대에게 목숨을 잃었던 월맹군들은 군인 봉급을 전달하던 경리장교 일행이었다.


그 철제 BOX 속에는 1개대대분의 봉급이 들어있었다. 상급부대에서 훈장상신 지시가 또 내려왔다. 나는 예전같이 나의 분대장과 대원들에게 모든 공로를 돌렸다. 그래서 충무 무공훈장, 화랑 무공훈장, 인헌 무공훈장 등이 부하들에게 수여되었다.
 
주월군사령부에서 검열단이 중대본부에 도착했다. 지난 번 있었던 매복 작전에서의 전과를 치하하고, 현장을 확인하는 요원들이었다. 제법 높은 분들이었다. 중대의 작전현황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지난 번 작전의 수훈자는 소대장인데 왜 소대장은 아무런 포상이 없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모든 공로가 소대장의 공로가 아니고 내 부하들의 공로였다고 우겼다. 그러나 나의 항변은 받아드려지지 않았다. 주월사령부에 도착한 그들은 즉시 청룡부대 본부를 통하여 나에게 화랑무공훈장을 주었다. 청룡부대에서 상신하지 않은 훈장이 상급부대에서 일방적으로 내려진 경우였다. 그래서 나는 그 해 6월에 원하지 않은 훈장 하나를 받았다.


나에게 훈장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하였다. 살아 돌아가지 못할 바엔 모든 것이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이라 여겼다.


조국을 위하는 것도, 공산주의를 물리치는 것도, 나에겐 의미가 없었다. 다만 내가 해병대의 일원이고, 나에게 부하가 주어졌고, 그들과 함께 나에게 맡겨진 일이기에 하는 것 뿐 이었다.
 
8월초, 나는 여단 본부로부터 예기치 않았던 기쁜 소식을 받았다. 주월한국군을 대표하여 본국으로 영현을 봉송할 책임 장교로 임명되었다는 것이다. 즉시, 소대를 인계하고 한국군 후송병원이 있는 퀴논으로 헬리콥터를 타고 갔다. 모든 사람들이 한가롭고, 총성도 들리지 않는 전쟁터와는 정반대되는 곳이었다.


지옥과 천국을 오고 가는 기분이었다. 퀴논 후송병원에서는 대우도 아주 좋았다. 뭣이든지 원하는 대로 다해주었다. 김치하고 한국식 음식도 실컷 먹었다. 살아서 서울에 갈 수 있다는 것이 꿈같은 현실이 차츰차츰 실감이 났다.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영현 봉송은 전공이 뛰어난 장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예우이며 보상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알았다. 청룡, 백마, 맹호부대 등 월남에 파병되어 일정기간 동안 전사한 장병들을 수집하여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하기 위한 것이다. 퀴논 비행장에는 영현 봉송을 위한 전세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영현위에 태극기가 덮여지고 정중하게 비행기의 화물칸에 적재되었다. 장병들이 도열하여 거수경례로 그들을 환송했다. 그리고 수십 명의 다른 장병들도 그 비행기에 합승하여 서울을 향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고 여겼던 고국에 간다. 어떤 자는 산자로, 어떤 자는 죽은 자로 정반대의 사람들이 되어 함께 가고 있다. 나는 멍하니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김포공항에 내렸다. 입국 심사대에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렸다. 나에겐 검사받아야 할 것이라곤 홀홀단신 죽지않고 살아남은 몸둥이 하나뿐인데 입국심사장을 통과하는데 무척 오래 걸렸다. 나는 서 있던 줄에서 비껴나 앞으로 가 보았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늘어선 끝에는 세관원들이 군인이 들고 온 짐 보따리를 풀어놓고 하나하나를 뒤적이며 검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울컥 알 수 없는 분노가 속에서 솟구쳐 올라왔다.


심사대 위의 짐들을 있는 힘을 다해 앞으로 밀고 갔다. 입구에 있던 짐부터 밀려서 하나하나 심사대 밖으로 떨어졌다. 세관원이 나를 뚫어지게 보았다. 그리고 이내 풀이 죽었다. 나는 그 것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아무 말이 없었다. 서있던 군인들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각기 짐 보따리를 주워 들고 그대로 입국장을 나왔다. 고국에 다시 돌아와 통과하는 첫 번째 관문이었다.


국립묘지에서 환영 나온 장교들의 안내를 받아 곧장 비행기의 화물 하역장으로 갔다. 호송할 헌병들과 영현을 봉송할 차량들이 줄서 있었다. 경건하고 정중하게 영현들이 옮겨졌다. 그런데 태극기를 덮은 영현들은 내가 처음 퀴논비행장에서 인계받은 것 보다 훨씬 많아 보였다. 이상하다. 자꾸만 태극기를 덮은 영혼들이 줄을 이어 옮겨졌다.


나는 묵묵히 지켜봤다. 그리고 동작동 국립묘지 영현안치소로 향했다. 차량들이 헌병의 호송을 받으며 불을 번쩍이며 줄지어 이동해갔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동작동에 도착한 차량대열은 두 갈래로 나누어져 들어갔다. 태극기를 덮은 것이 모두 영현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차량에서 내리자마자 안내장교에게 저쪽 차량에 실은 영현들은 왜 이곳에 함께 오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느냐고 다그쳐 물었다. 몹시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다른 짐이라고만 짧게 말하고 자리를 피했다. 나는 알지 말아야 할 것을 또 하나 더 알게 되었다. 조국을 위해 몸 바쳐 죽은 영혼을 가장한 짐 더미였다.


고향에 돌아가 어머니와 형제들을 만났다. 내가 월남전에 파병된 이후 어머니는 수없이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가 소원한 것이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셨다.


나를 제외한 온 가족이 열병에 걸렸다. 약도 없고 치료를 제대로 받을 수 있는 의술도 시설도 없을 때였다. 모두가 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났지만 아버지는 결국 그 병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는 이름난 소리꾼이었다.

흥부전, 심청전을 소리 내어 읽어내려 가면 우리 집 마당 멍석위에 모여 앉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훔치며 듣고 있던 모습이 지금도 내 기억에 생생하다.


어머니 생각에는 늙으막에 낳은 막내아들을 잘 돌보아 주지도 못하고 일찍 세상을 하직한게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당신이 이 자식에게 해준 것이 뭐하나 변변한게 있나, 이제 지난 것은 다 묻지 않겠다. 어떻게 해서든지 전쟁터에 간 우리 막내자식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오게나 해라.“


그런 소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매일 아침 장독대위에다 흰 그릇에 정한수를 떠다놓고 천지신명께 빌었다고 했다.

지금 어머니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1965년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 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병대에 가야겠다고 어머니께 말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어머니는 즉시 반대했다. 한반도의 남쪽 바다위에 떠있는 이 조그만 섬에 살았던 어머니께서 해병대를 어떻게 알았을까?


“야야 해병대는 군대도 아니라 카더라. 개병대라 카더라. 그기가면 술만 먹고 좋은 자식 모두  못된 자식 되어 나온다 카더라. 그건 군대도 아니라 카던데 니가 왜 그런데 갈라 카노?”


나 역시 해병대에 대한 평판은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잘 알지는 못했다. 대학 졸업반 때였다.


나에게는 일곱 명의 친한 형제 같은 친구들이 있었다. 강기○, 김욱, ○영용, 윤한○, 송동근, 박정식 그리고 나였다. 항상 일곱 명이 몰려다녔다.
 
그때는 종로2가에 신신백화점이 있었다. 그 앞을 막 지나려 하는데 생전에 보지 못한 모습의 군인이 지나갔다.


왠지 내 눈을 끌었다. 지금까지 본 군인들 모습하곤 다른 모습이었다. 땅도 보지 않고, 옆도 보지 않고 오직 앞만 보고 곳곳 하게 기계처럼 꼭 귀신처럼 걸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어릴 때 우리 집 앞 바닷가에서 귀신을 본적이 있다. 그곳은 크고 작은 바위가 바다에 연결된 곳 이였다. 한사람이 등불을 든 채 지팡이를 들고 신사 모자를 쓰고 그 바위위로 곳곳하게 평지 위를 걸어가듯 걸어가고 있었다.


그 당시 우리에겐 영국신사들이 썼던 그 모자며 양복이며 밤중에 바위위를 평지처럼 걷는 사람, 그건 귀신이 아니고는 그런 모습으로 그런 걸음으로 걸어 갈수 없었다. 


혼비백산한 나는 “야! 귀신이다” 하고 소리치며 집으로 뛰어온 적이 있다. 함께 가던 친구에게 물었다.


“야 저 걸어가는 군인 좀 봐라. 너무 멋있지 않냐?” 

“야 임마, 저 사람은 해병대 장교야”


김욱 그에게는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


그의 쌍둥이 형이 해병대 출신이라고 했다. 나는 태어 난지 24년 만에 해병대를 처음 보았다. 나에겐 매력이 있어 보이는 군대였다. 내가 많이 보았던 군대하고는 달랐다. 어쩌면 그래서 내가 해병대를 지원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머니를 설득했다. 군대는 갔다와야하는데 2학년때 한일회담 반대데모에 참가했었고, 신촌역 앞 깡패를 소탕하느라 서대문구치소에 갇혀 군사혁명재판에 회부되었던 적이 있어 ROTC는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어쩔 수 없이 졸업을 하고 가는 수밖에 없는데 육군장교 후보생은 5년을 복무해야하고 해ㆍ공군은 4년, 해병대장교만 3년이었다.


나는 가장 짧게 군대생활을 마쳐야겠다고 설명하고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병대를 선택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6.25 전쟁이 났다. 나는 인민군을 만난적도 본적도 없다. 그러나 우리 동네 학교 운동장에 가득한 함경도 피난민들로 인하여 6.25를 알았다.


그리고 4학년을 마치고 부산에 있는 둘째형님 집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을 서울로 갔다. 해병대에 지원 할 때까지 10년이 넘게 어머니 곁을 떠나 살았다. 어머니가 나를 42살에 낳았다고 했다.


해병대 사관후보생으로 진해 경화동에서 그 모진 훈련을 받고 있을 때였다. 구대장이 훈련 중 느닷없이 나를 불렀다. 그리고 “뒤로 돌아 서”라고 명령했다. 뒤로 돌아섰다. 전방을 똑바로 바라보라고 했다. 나는 똑바로 바라보았다.


경화동을 연하여 둘러쳐진 철조망이 보였다.


“뭐가 보이나!”

“철조망이 보입니다.”

“다시! 똑바로 봐!”


나는 그제서야 철조망 밖에 흰옷을 입은 채 흰 수건을 머리에 쓰고 서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모습이 틀림없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여기까지 어떻게 알고 어떻게 찾아왔을까? 여기까지 왜 왔을까? 멀리서 바라보기만 한 채 나는 한마디도 물어보지 못하고 어머니와 그렇게 헤어졌다.


지금 계산해보니 그때 어머니 연세가 예순을 넘어 일흔이 가까이 되었을 때였다. 그 먼 길을 노구를 이끌고 물어물어 찾아왔을 것이다. 일체의 면회와 접촉이 금지된 곳인데 어떻게 해서 그런 식의 만남이라도 이뤄냈을까.


얼마나 졸라댔을까. 어머니도 그렇게 똑바로 바라보라고 소리치던 구대장도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야박하게 소리치던 그 구대장은 나보다 먼저 전쟁터로 갔고 그리고 전사했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동작동 국립묘지 영현안장식도 끝났다. 그리고 어머니와 형제들도 만나보았다.

또 다시 전쟁터로 돌아 가야하기에 부산에서 내 아내와 함께 열차를 탔다. 서울로 가는 길이었다.


나의 복장은 청룡부대에서 입고 있던 개구리 무늬가 있는 낡은 얼룩복장이었다. 피와 눈물과 땀에 젖었던 옷이었다.


8월이라 한국도 월남만큼이나 더웠다. 삶은 달걀이 먹고 싶었다. 웃옷을 벗어 벽에 걸어놓고 달걀 파는 곳을 찾아갔다.


그리고 내 몫과 아내 몫까지 4개를 사서 양손에 2개씩 들고 내 자리로 돌아가던 중이였다.

한 객차에 들어서니 안이 소란하였다. 민간인과 열차승무원과 군인이 서로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좌석이 지정되어있는 열차였다. 그런데 좌석은 하나인데 표를 가진 사람은 민간인과 군인 두 사람이었다.

서로 자기가 가진 표가 진짜 표라고 우겨 됐다. 쉽게 해결될 것 같지는 않았다. 열차표에도 진짜표와 가짜표가 섞여있는 모양이었다. 열차승무원이 군인이 자리를 양보해 주어야겠다고 먼저 말을 꺼냈다.
 
얌전하고 수줍은 듯한 군인이 돌변하여 자기표가 진짜 표라고 양보 할 수 없다고 고집했다. 순간 나는 왠지 군인 편을 들고 싶었다. 가짜 표일 것이라는 뉘앙스를 민간인보다는 군인편에 더 많이 두는듯한 열차 승무원의 말하는 투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승무원 아저씨 민간인이 좀 서서 가고 군인 좀 앉아서 가면 안 돼나요?”


내가 끼어드는 바람에 상황은 더욱 복잡하게 됐다. 건장하고 험상궂게 생긴 공안원이 열차 승무원 편을 들었다. 그는 나에게 참견하지 말고 자기자리로 가라고 윽박질렀다.


그리고 나의 허리춤을 움켜쥐고 몇 번이고 들었다 놓았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대롱대롱 공중에 매달려 있는 듯 했다. 놓아달라고 했다. 양손에 쥔 달걀이 아까워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는 나를 놓아주었다.


아무 말 없이 내 자리로 돌아와 달걀을 내 아내에게 건네주고 웃옷을 입었다. 그리고 허리띠를 다시 단단히 메고 출전할 준비를 했다. 내가 그 열차 객차에 갔을 때 나를 본 공안원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한 것 같았다.


황급히 문을 열고 앞 객차로 도망쳤다. 그가 알아차린 것이다. 내 동작이 더욱 빨라졌다. 다음 객차에도 그는 없었다. 승객이 앉아 있는 틈새도 살펴보았다. 내가 그를 발견한 것은 식당 칸이 있는 바로 앞 마지막 객차였다. 그 이상 더 도망갈 곳이 없는 듯 했다.
 
나는 몸을 날려 양발로 그를 걷어찼다. 내 몸은 그를 향해 7, 8m되는 거리를 총알처럼 날라 가는 듯 했다.

객차바닥에 넘어진 그를 얼마나 두들겨 팼는지 모른다. 전쟁터에서 내 부하를 죽인 적에게 보다 더 격렬한 분노가 솟아올랐다.


그가 완전히 늘어졌을 때 다음에는 그 열차 승무원을 찾았다.


식당 칸에 숨어있는 그를 찾았다. 얼마나 두들겨 팼는지 모른다. 그리고 식당 칸의 식기며 접시, 컵, 그곳에 있는 것은 모두 부셔버렸다. 그리고 열차의 창문까지도 하나 남김없이 다 부셨다.
 
육군 장교복을 입은 군인 2명이 나에게로 오더니 나즈막히 말한다.


“장교님, 이번일은 우리가 처음부터 다 지켜보았습니다.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아무 일없이 조용히만 가시면 우리들이 장교님을 도와 주겠습니다”


열차가 대전역에 도착할 때 플렛폼에 2열횡대로 쭉 늘어선 육군헌병들을 보고나서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다.


그리고 열차는 출발할 줄을 몰랐다. 나는 의자에 앉은 채 창밖을 보았다.

그 육군 장교 2명이 그쪽 요원들과 계속 협상을 벌이고 있는 듯하였다.


한참을 지체하다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도에 늘어선 헌병들은 그대로 서서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육군 장교 2명이 다시 나에게로 왔다. 자기들은 서울 수도경비사령부의 헌병장교라고 소개했다.


나도 청룡부대에서 소총소대장을 하다가 주월군사령부에서 영현봉송 명령을 받고 며칠 전 국립묘지 안장을 마치고 부모 형제를 만나고 돌아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이미 나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듯 했다.

지금도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고맙고 좋은 군인들이었다.
 
서울역에 도착하자 그들은 나를 호송하여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태워 보내며 나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그 뒤로 열을 서서 무리를 지어있는 헌병들이 보였다.


전혀 살아서는 돌아 올수 없다고 여기던 자가 살아남아 죽은 자와 함께 같은 비행기를 타고 서울을 향했을 때 나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저 멍하기만 했다. 멍청하기만 했다.


김포공항 입국 심사대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며 군용빽과 짐 보따리를 하나하나 풀어헤치고 검사하던 세관원들 모습, 영현봉송 전용기 속에 태극기를 덮고 숨겨져 들어오던 짐 더미. 나는 차츰 의식을 회복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