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봉 장군님 회고록 20 - 지뢰밭이 된 서울
“쿵“하고 무겁게 땅을 울리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린 후 흙덩이와 나뭇가지, 잡다한 것들이 뒤섞여 후두둑 땅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속에는 사람의 팔, 다리와 몸통이 섞여 떨어지고 더러는 나뭇가지 위에 걸려 있기도 한다.
잠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내 숨 가쁘게 위생병을 찾아대는 찢어지는 목소리가 우리 모두를 불안에 떨게 한다. 엄호용 아파치 헬기와 붉은 십자마크가 선명한 의무용 헬리콥터(MED-VAC)가 동시에 밀림 속을 파고 들어와 부상자와 사상자를 싣고 떠난다. 계급이 높은 자이건 낮은 자이건 살아남은 자에겐 이 무서운 불안과 떨림이 예외 없이 엄습한다.
아직 살아있다고 인식되는 순간부터 발끝에서 시작된 떨림이 다리와 몸통, 손끝과 팔을 거쳐 심장까지 전달되면 자신의 의지로는 전혀 통제가 되지 않는 상태로 불안과 공포에 쌓인 채 떨기만 한다. 살고 싶어하는 몸부림이다.
이젠 전혀 살 소망이 없다고 판단되어지면 그때부터 서서히 이러한 떨림이 점점 사라져가고 오히려 담담해진다.
나는 그것을 똑똑히 경험하였다. 월맹군의 진지 안에 갇혀보기도 하였고 월맹군의 기관총 공격과 계속해서 터지는 박격포 사정권 안에서 전투를 했던 경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처음으로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이런 전투장면이 아니라 한발자국도 마음대로 내 딛지 못하게 하는 지뢰밭과 부비트랩이었다. 이것이야 말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가장 크고 넓은 길이었다.
어디에 지뢰가 있고 부비트랩이 어디에 설치되어 있는지는 찾기도 알아내기도 힘들었지만 누군가가 죽거나 부상당하는 희생을 앞세울 때에만 위치가 파악되었다. 월맹군 진지 앞에서 작전 중이던 3소대 지역에서 지뢰와 부비트랩이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가 난 후의 상황을 너무도 잘 아는 우리에게는 정말로 소름끼치는 소리였다. 모든 동작을 정지한 채 떨리는 손으로 대검을 뽑아 땅을 더듬던 나는 뾰죽이 튀어 나온 지뢰꼭지를 보았다.
나의 삶이 순간적으로 정지된듯한 공포가 느껴졌다. 예리하게 깔아놓은 철침을 험악하게 곤두세우고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지하함정도 보았다.
그때 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갔던 무서운 전율이 왜 지금 이곳 서울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일까? 월남파병임무를 마친 후 1969년 2월 미국 수송선 GEIGER호에 몸을 싣고 포항으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나에게는 해병대 제2훈련단 단장 조성준장군의 전속 부관으로 명령이 났다. 나는 그분을 전혀 알지 못하였지만 가족이 있는 서울로 명령이 떨어졌다는 것이 무척 다행이었다.
나는 아주 행운아였다.
그 당시 제2훈련단은 서울 후암동 해병대 사령부 건물 위쪽 산비탈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해병대를 전역한 예비역 자원을 관리하고 훈련시켜 유사시 증원부대로 증편되는 부대였다. 부대본부는 아담하였으며 식구들도 많지 않아 한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부임하자마자 참모장으로 계시던 이원경 대령님께서 몇 가지 정보를 주셨다.
“전중위가 낙점 될 때까지 12명의 장교가 검토되었다네. 결국은 조장군님께서 복무기록에 붉은 기록(징계, 영창, 감옥 등을 갔다 오면 붉은색 잉크나 볼펜으로 기록함) 이 있는 전중위를 선택하셨네.”
직감적으로 조장군님은 평범하신 분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출근과 동시에 조성준장군님께 전속부관 부임 신고를 하였다.
그러나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180cm정도의 큰 키에 검은 테 안경을 쓰신 무척 인자하게 생긴 얼굴, 아무리 보아도 해병대 장군보다는 흡사 대학교 총장 같은 인상을 풍기셨다.
잠시 면담하는 동안 그분은 동, 서양사를 비롯한 다방면에 걸쳐 많은 책을 읽으신 학자풍의 장군이셨다. 가족이 있는 서울에서 근무하는 것도 감사한데 좋은 부대에서 좋은 지휘관을 만나는 행운이 겹쳐서 나에게 찾아왔다.
그런데 나에게 차츰 이상한 일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근무를 마치고 시내로 나가면 내가 걸어가는 아스팔트 길이 지뢰밭으로, 지하함정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 순간 나는 한 발작도 움직이지 못하고 마치 신발이 아스팔트에 붙어버린 사람같이 주춤거리고 서있는 것이다. 분명 여기는 그곳이 아닌데도 여러 가지 환상과 함께 생각을 바꾸려 해도 쉽게 전환이 되지 않는 것이다.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설 때 AK소총을 앞에 든 채 깜짝 놀라며 빤히 나를 쳐다보고 서있던 월맹군 병사를 또 만나기도 하였다.
물론 나 역시 움직이지 못하고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었다. 아무 두려움 없이 평안했던 나에게 왜 이런 놀라움과 두려움이 새삼스럽게 되살아나는 것일까?
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비치는 나의 모습이 더욱 초라해지는 것 같았지만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이것을 쉽게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지뢰밭으로 변해버린 서울을 이전의 서울로 변환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나는 거의 매일 술집을 전전했다. 무교동과 청진동, 지금의 롯데와 신세계백화점에 인접한 명동일대 술집을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갔다.
처음에는 지갑을 꺼내어 술값을 계산하려 하였으나 술집주인이 한사코 술값을 받지 않겠다며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문밖까지 따라 나와 나를 배웅하는 것이었다.
그 이유를 차츰 알게 되었다. 술을 마신 후 술집을 때려 부수지 않고 조용히 나가주기만 하면 주인에게는 그보다 더 좋은 술값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어느 술집을 가든 술값을 지불할 생각을 하지 않고 마시기만 하였다.
어떤 날은 출근 한 아침까지도 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럴때면 부관실의 전령과 ‘미쓰리’가 방화용 물 양동이를 들고 와 나의 책상 밑에 밀어 넣어주곤 하였다. 또 전과 같이 아무데나 토하지 말고 양동이를 사용하라는 뜻이었다.
조성준 장군님께서는 방안에 계셔도 밖의 상황을 눈으로 보는 듯 하였다. 전령을 부르는 벨과 부관을 부르는 벨이 구분되어 있지만 이런 날은 꼭 전령을 부른다. 전령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김해병. 빨리 부관을 기지 병원에 데려가 봐”
그렇지만 화를 내시거나 나를 불러 꾸짖거나 야단치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 그분은 6.25동란 때 황해도에서 월남하여 해병대 장교1기로 군생활을 시작하였고 소대장과 중대장을 하는 동안 숱한 격전을 치루시고 사선을 수없이 넘으신 분이었다.
다리와 팔에는 아직도 파편이 들어있어 궂은 날에는 불편함과 고통에 항상 시달리고 계셨고 그 분과 함께 사우나에 갈 때면 그분의 팔과 다리를 내가 주무르고 마사지를 하기도 하였다.
그분은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조국의 산야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셨던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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