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주둔기-최초의 전투부대 마크
1949년 8월 26일 대구에서는 육군참모총장 이응준 소장과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대령과의 특별한 회담이 있었다. 육군참모총장의 요청으로 개최된 그 대구회담에서 이응준 총장은 육군에서 맡고 있던 진주지구의 경비를 해병대에서 맡아 달라는 요청을 했고, 신현준 사령관은 그 문제를 해군 참모총장(손원일 제독)에게 보고하여 그 요청을 수락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일이 곧 해병대의 진주 주둔기를 있게 한 배경이 되었다.
그 당시 진주에는 마산에 주둔하는 육군 16연대의 1개 대대병력이 배치되어 지리산을 근거지로 외곽지역의 촌락에 출몰하여 살인과 약탈 방화를 일삼는 공비들을 소탕하는 가운데 진주시의 안전을 도모하고 있었으며, 그 공비들은 여순사건을 일으킨 반란군의 잔당이었다.
부대 파견 결정이 내려지자 신현준 사령관은 7월 중순경에 신병교육대를 수료한 1기 신병들로 편성한 2개 중대(1중대와 5중대)와 8월초에 발족한 하사관교육대(약50명)로 파견부대를 편성하고 참모장 김성은 중령을 부대장으로 임명하였다.
한편 이러한 일들은 불과 이틀 동안에 진행되어 3일째 되던 날(29일)에 진주로 출동했는데, 이러한 일들이 이루어지는 동안 신현준 사령관은 임무 교대에 따르는 협의와 지형정찰 등을 위해 보급관 홍정표 소위와 하사관 교육대 소대장 강복구 상사 등을 진주로 보내 육군부대(16연대의1개 대대병력) 본부가 있는 진주사범학교와 진양군청을 방문하게하는 한편 그처럼 촉박한 일정 속에서도 남모르게 파견부대의 마크를 고안하여 참모들에게 선을 보였는데, 그 마크를 제일 먼저 본 사람으로 알려진 이판개씨(당시 사령부 통신관, 대령예편, 작고)가 남긴 증언에 따르면 서랍 속에서 만년필로 그려 놓은 그 마크를 꺼내 보이며 신현준 사령관은, "이 소위, 진주 파견부대의 마크를 고안한 것인데 어떤가?' 하며 말했다고 한다. 그 때까지 해병대는 해군의 상징마크인 엥카(닻)를 해병대의 상징마크로 여기고 있었을 뿐 독자적인 마크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던 그 시절에 신 사령관이 X자형으로 세워진 두 개의 총대와 총대가 교차된 부위 아래쪽에 엥카를 그려 넣어 해군의 육전부대를 상징케 하는 마크를 고안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후 신현준 사령관이 고안했던 그 육전부대 마크는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고 일부 장병들이 카바가 없는 그들의 철모 앞부분에 흰 페인트나 먹으로 그려 붙이고 다녔을 뿐 1951년 가을 지금의 해병대 마크가 제정될 떄까지 유야무야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해병대 사령부에서는 해병대 창설 15주년이 되던 1964년 덕산비행장 기지내의 동네산(△43)에 발상탑을 건립할 때 탑신꼭대기에 주조로 그 마크를 부착시켜 둠으로써 실재했던 그 마크의 역사성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傳統과 秘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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