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초대사령관 신현준

신현준(申鉉俊):해병대 사령관,중장예편,

머린코341(mc341) 2014. 3. 18. 08:20

 

신현준(申鉉俊):해병대 사령관,중장예편,

(태극무공훈장 훈기번호 제73호)

 

 

 

 

 

 

1953년 10월 해병대 1여단장으로 취임한 申鉉俊 사령관이 李承晩 대통령으로부터 은성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고 있다.

신현준(申鉉俊):만주제국 육군군관학교졸(37년)

광복 후:광복 소식을 접한 후 시세에 편승하여 조선의용군 가입을 시도했으나 받아주질 않자 박정희와 함께 한국 광복군 베이징(北京)대대에 편입하여 집단 귀국 시도, 해경 인천·부산기지 사령관, 진해 통제부 참모장, 해병대 사령관, 해병1여단장·연참 정보부장·국방부 차관보, 해병 중장예편, 주모로코대사, 세계반공연 사무총장

상:금성태극무공훈장, 미은성훈장, 리베리아·모로코수교대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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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표 제 목 신현준 중장
작 성 자 전쟁기념관
감 수 자 전쟁기념관
발 행 일 2004/10/18
갱 신 일 2004/07/31
요 약 정 보

● 한문 : 申鉉俊
● 생몰연대 : 1915.10.23-
● 출신지역 : 경북 금릉
● 최종계급 : 해병 중장
● 상훈내용 : 태극무공훈장
● 참고문헌 :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상 세 설 명

※약력

*1915. 10 경북 금릉 출생
*1946. 6 조선해안경비대 입대(견습사관)
*1946. 11 인천기지사령관
*1946. 12 해군중이
*1947. 9 부산기지사령관
*1948. 5 진해특설기지 참모장
*1949. 2 해병대사령관(초대)
*1950. 9 해병 준장
*1952. 1 해병 소장
*1953. 10 해병 제 1여단장
*1955. 10 연합참모본부 제 3부장
*1956. 10 연합참모본부 제 2부장
*1957. 6 해병 중장
*1959. 1 해병 진해교육기지사령관
*1960. 7 국방부장관 특별보좌관
*1961. 4 국방차관보
*1961. 7 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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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일제 치하인 1915년 10월 23일 경북 금릉의 가난한 농가에서 외아들로 출생한 신현준(申鉉俊) 해병 중장은 3.1운동 발생 직전인 1919년 2월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 삼가자(三家子) 등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농사를 지었다. 1928년 하얼빈보통학교에서 소학교 과정을 마친 후 곧장 고등과에 진학하였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일본이 패망한 이후 그는 귀국을 위해 북경에 도착하여 해방 후의 광복군 활동을 전개, 제3지대 대대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제반 여건이 여의치 않아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던 그는 부대 해산식을 가진 후 1946년 4월 귀국길에 올라 5월 부산에 도착하였다.


1946년 6월 22일 진해에 있는 조선해안경비대 총사령부에 입대한 그는 견습사관의 신분으로 기관 제2분대에 소속되었다. 대한민국 해군의 모체이자 전신인 조선해안경비대는 7개월 전인 1945년 11월 11일 서울에서 창설되어 손원일 소령이 총사령관이었다. 7월초 ‘준.하사관 교육대’의 교육주임을 맡아 7월 11일부터 매기 약 40명 정도의 피교육생에게 3주간의 교육을 실시, 모두 6차례에 걸쳐 250명을 배출하였다.


8.15 해방 1주년기념 경축행사가 서울에서 열리게 되자 그는 총사령관 손원일 소령에 의해 행사에 참가할 제병지휘관으로 발탁되어 임시 중위계급을 부여받았다. 이후 12월 해군 중위(군번 80088)로 정식 임관하여 조선해안경비대 인천기지사령관에 전보된 데 이어 1947년 9월 1일 해병 소령으로 진급과 동시에 부산기지사령관이 되었다. 다음해 5월 진해특설기지 참모장에 임명되어 해병 중령으로 진급한 그는 10월 1일 여수와 순천지역에서 육군 제14연대의 반란사건이 발생하자 해군작전지휘관으로 진압임무를 부여받고 출동하였다.


해군함정 4척을 이끌고 출동하여 여수항 주변 일대를 점령한 후 해상으로부터 반란군을 진압하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작전이 종료된 뒤 해군지휘부는 상륙작전 수행을 위한 해병대 창설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49년 2월 1일부로 해병대사령관에 신현준 중령을 임명, 부대창설의 제반업무를 추진토록 하였다.


부대창설 업무에 착수한 그는 해군통제부 교육부장이던 김성은 중령을 합류시키고, 이어 김동하(金東河) 소령과 고길훈(高吉勳) 대위를 규합하였다. 아울러 신병교육 요원을 위한 하사관 모집은 해군 각 부서에서 2~3명씩을 강제 차출하는 방법을 통해 3월말까지 부대편성에 필요한 병력 380명을 선발.완료한 뒤 4월 15일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창설식을 거행하였다.


해병대사령관으로 봉직하고 있던 1949년 8월, 그는 해병대 창설 이후 최초의 지역경비임무를 하달하였다. 당시 진주지역은 제14연대 반란군 잔당들이 지리산을 근거지로 출몰하여 살인과 방화, 약탈을 자행하고 있어 김성은 중령이 지휘하는 1개 대대를 이동시켜 경비임무에 임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 부대는 제주도로 이동 배치될 때까지 4개월 동안 공비토벌 뿐만 아니라 민심수습과 선무공작 등을 수행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1949년 12월 28일 신현준 해병대사령관은 진해와 진주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전 병력을 제주도 각 요지에 분산배치를 완료하고 제주도 전역에 대한 경비임무에 임하던 중 6.25전쟁을 맞았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의 조인으로 전쟁이 일단락되자 그는 199710월 1일부로 해병대사령관직을 부사령관인 김석범 대령에게 인계하였다. 전쟁을 겪으면서 전방 제일선에 있는 전투부대를 강화해야할 필요성을 인식한 그는 해병여단 편성작업에 착수하여 1953년 10월 15일 해병대 유일의 전투부대인 해병 제1여단을 금촌에서 창설하였다. 이날 창설식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은 해병 제1여단장에 임명된 신현준 소장에게 은성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며 공로를 치하하고 친필 휘호도 함께 하사하였다.


1년여의 해병 제1여단장직을 후임 김대식 장군에게 인계하고 육군대학에 입교한 신현준 소장은 제3부장과 제2부장으로 근무하게 된 합동참모본부에 발령되었던 1955년 9월 1일까지 학업에 열중하였다. 합참 근무를 마친 그는 1958년 9월부터 4개월간 미국 캔사스 주의 미 육군참모대학에서 과정을 이수하고 귀국한 뒤, 1959년 1월 해병 진해교육기지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정예해병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훈련에 주력하였다.

 
1960년 6월 해군 중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이종찬 국방장관의 특별보좌관으로 발탁되어 활동하던 중 1961년 4월 1일 국방차관보로 임명되어 군 생활 중의 마지막 직책을 수행하게 되었다. ‘5.16 군사정변’이 발생한 지 약 2개월 뒤인 1961년 7월 4일 신현준 해병 중장은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군 생활을 마감하고 미국의 네바다 주립대학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1963년 1월 초대 주 모로코왕국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어 외교관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만 7년간의 재임기간을 별다른 대과없이 수행한 후 세계반공연맹 사무총장을 거쳐 1974년 2월 초대 주 바티칸 대사로 임명되어 1980년 12월 10일까지 외교활동에 전념하였다.


독실한 천주교인으로서 종교적 신념만큼이나 국가.민족 그리고 군에 대한 애정이 강렬했던 그는 군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했던 용기있는 군인 중의 한 분이었다. 또한 건국 초기 척박했던 국방환경 속에서 무적 해병의 기틀을 마련하고 이를 발전시키는데 각고의 노력을 경주한 개척자 정신이 충만했던 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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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적

1949년 4월 15일 해병대 창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동시에 초대 해병대사령관으로서 해병대 육성발전에 심혈을 경주하여 오던 신현준 해병 중장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파죽지세로 남한을 석권하려는 북한군을 군산, 남원, 함양, 진주 등지에서 예하부대로 하여금 포착.섬멸케 하는 한편 주력부대를 직접 지휘하여 인천상륙작전, 경인 및 원산.함흥지구작전에서 적을 격퇴하였다. 또한 1951년 6월 4일부터 6월 19일까지 전개된 도솔산전투와 8월 31일부터 3일간 펼쳐진 김일성고지공격전에서 경이적인 대전과를 획득하여 대한민국 해병의 용맹성을 만방에 떨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신현준 장군은 1952년 10월 26일 은성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73호)을 수여받는 등 대한민국 군인 중 유일하게 은성태극무공훈장을 두 차례나 수여받게 되었다.
전쟁발발과 동시에 제주지역계엄사령관에 임명된 신현준 대령이 모병활동을 전개하자 6월말까지 제주 각지에서 3,000여 명의 청년과 학생들이 지원하였다. 이들에 대한 교육훈련을 실시하는 동안 해병대 동원명령이 하달되어 7월 13일 고길훈 소령이 지휘하는 1개 대대를 군산지역으로, 8월 1일에는 김성은 중령이 지휘하는 1개 대대를 진주 인근의 진동으로 출전시켰다. 그리고 제주의 해병대사령부 및 잔여부대는 9월 1일 진해로 이동하였다.
해군참모총장으로부터 9월 8일까지 해병대를 부산으로 집결시키라는 명령을 완수한 신현준 사령관은 9월 12일 부산항의 미 해군 함내에서 열린 작전회의에 참석,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세부지시를 하달받았다. 1950년 9월 15일 17시경 3,000명의 대한민국 해병대는 미 해병 제1사단과 합동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였다.
아군의 강력한 함포사격에 이어 한국 해병대는 상륙 목표지점인 ‘청색해안(Blue Beach)'에 상륙하고, 16일부터 수도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진격을 계속하였다. 서울 외곽인 104고지와 연희고지에서 완강히 저항하는 적과 접전을 벌인 후 9월 26일 17시경 마침내 수도 서울을 탈환하였으며, 선두로 진격하던 제1대대 6중대의 박정모 소위가 지휘하는 소대원들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9월 28일 오전 10시 중앙청 광장에서 수도 탈환식을 마친 해병대는 오후부터 서울 동북방으로 진출하여 북한강 일대의 적 잔당에 대한 소탕임무에 돌입하였다. 국군이 38도선을 돌파함에 따라 한국 해병대는 원산으로 진출하여 함흥까지 진격한 후 함흥과 평양간의 통로 주변을 수비하고 경계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에 따라 포항으로 철수한 한국 해병대는 미 해병 제1사단에 배속되어 작전을 수행하였다. 이때 태백산맥을 통해 남하중인 적은 영월지역을 수비하고 있던 국군 제3사단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해병대는 적을 섬멸하고 아군을 구출하기 위해 야간행군을 감행, 2월 21일 새벽 5시를 기해 적 주력부대의 숙영지를 기습적으로 공격하고 이들을 격퇴하였다. 이후 해병대는 피아가 서로 대치중인 전선에 배치되어 김일성고지, 도솔산지구전투 등 치열한 전투를 수행한 후 휴전에 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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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2003
국방부, 자유민에게 전해다오 제1집, 1955
육군본부, 한국의 전쟁영웅들, 1992
이원복, 호국용사100선, 명성출판사, 1976
국방부, 호국의 별 제3집, 1979
포병학교, 포병의 발자취, 1963
병학사, 내 젊음 조국에, 1987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38도선 초기전투: 중동부전선 편, 1982
국방일보,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2002. 11. 9
국방부, 한국전쟁사 제8집, 1975
공군본부, 공군사 제1집
육탄 10용사 현충회, 육탄 10용사, 도서출판 法政, 1986
국방부, 호국의 별, 제6집, 국방부 정훈국, 1982
국방일보, 한국의 전쟁영웅들 (1) 육탄 10용사, 1992. 6. 4
국방부, 호국전몰용사공훈록 제3집,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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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鉉俊 초대 해병대 사령관 (1915~2007)




낙동강 방어선 구축한「무적 海兵」창설자
『전쟁포로·부역자 죽이지 말라』고 엄명



申鉉俊
1915년 경북 금릉 출생. 봉천군관학교 졸업. 1946년 귀국 후 조선해안경비대 입대해 인천기지사령관·진해특설기지 참모장 역임. 해병대 창설 초대 사령관(1949~1953), 해병 제1여단 창설(여단장·1953), 해병 중장으로 예편(1961). 駐모로코 대사, 세계반공연맹 사무총장, 駐바티칸 대사 역임.

孔正植 前 해병대사령관·성우회 부회장
1925년 경남 밀양 출생. 마산공립商高, 해군사관학교 1기 졸업. 미국 해병지휘참모대 졸업. 해군 경주함 함장, 해병대 제3 전투단장, 韓美 해병 연합상륙 여단장, 해병 제1여단장, 해병 제1사단장, 해병대사령부 참모장, 제6代 해병대 사령관, 제7代 공화당 국회의원, 성우회 부회장.



80만 해병 가족의 아버지


지난 10월15일 오전 3시15분, 해병대를 만든 申鉉俊(신현준) 초대 해병대 사령관이 미국 플로리다州 나이스빌市에서 별세했다. 享年(향년) 92세.

1949년 해병대 초대 사령관에 임명된 申사령관은 그해 4월15일 병력 380명을 모아 해병대를 창설했다. 그 해병대를 거쳐간 해병가족이 80만을 넘었다.

지난 10월18일 인천공항, 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고인의 유해가 빈소인 국군수도병원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나를 비롯해 해병전우회의 후배 해병들이 도열해 申鉉俊 사령관을 경건하게 맞이했다. 머나먼 이국에서 고국이 그립고 후배 해병들이 보고 싶어 어떻게 눈을 감으셨을까.

申鉉俊 사령관과 나의 인연은 60년 전인 19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조선해안경비대 진해특설기지의 참모장(중령)이었고, 나는 해군사관학교 훈육관(중위)이었다.

1949년 10월1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조선해안경비대가 해군으로 정식 발족됐다. 20일 만에 여수·순천지역에 주둔해 있던 육군 제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나는 300t급 302정장으로서 우리 영해를 침범하는 일본 어선 두 척을 나포해 여수세관에 인계하다 여순반란사건을 맞았다.

해군진해통제부 사령관 金一秉(김일병) 대령은 申鉉俊 진해특설기지 참모장에게 반란군 진압임무를 맡겼다. 내가 이끄는 302함도 申鉉俊 참모장 휘하에 들어갔다.

孫元一(손원일) 해군참모총장과 申鉉俊 참모장이 旗艦(기함)인 충무공함을 타고 여수로 달려왔다. 해상에서 경계임무를 수행하던 나는 孫元一 참모총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申鉉俊 참모장에게 브리핑을 했다.

『반란사건 당일부터 여수항을 순찰하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육군 5연대 1대대를 상륙시켰다. 하지만, 일본의 陸戰隊(육전대)나 미국의 해병대와 같은 부대가 있었다면 반란은 훨씬 더 빨리, 그리고 효과적으로 진압할 수 있었다』

孫元一 참모총장이 『원자폭탄에 의해 일본의 항복이 앞당겨지긴 했지만 美 해병대가 본토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서둘러 항복한 것』이라고 동의했다.

여순반란사건이 진압된 후, 나는 申鉉俊 참모장과 함께 해군의 상륙작전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 즉 「해병대」의 창설필요성을 附記(부기)한 「戰鬪詳報(전투상보)」를 제출했다.

孫元一 총장은 申鉉俊 참모장을 해병대 초대 사령관으로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에게 천거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해병, 申鉉俊

1953년 10월 해병대 1여단장으로 취임한 申鉉俊 사령관이 李承晩 대통령으로부터 은성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고 있다.

해병대 창설이란 중책을 맡게 된 申鉉俊 참모장은 즉시 해군 진해통제부 참모장직을 후임자인 金錫範(김석범) 중령에게 인계한 다음, 부대창설 작업을 시작했다. 우선 뜻을 같이하는 동지간부를 규합하러 나섰다.

申사령관은 먼저 준하사관 교육대에서 함께 일했던 金聖恩(김성은) 중령에게 도움을 청했다. 만주 하얼빈 農大(농대)를 졸업한 金聖恩 중령은 滿軍(만군)출신으로 판단력이 뛰어났다. 신설하는 해병대에 비전이 없어 보였는지 金聖恩 중령은 쉽게 수락하지 않았다. 申사령관은 부인 咸惠龍(함혜룡) 여사와 함께 三顧草廬(삼고초려) 끝에 金중령의 승낙을 받아 냈다. 「두 번째 해병」이 탄생한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