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초대사령관 신현준

老海兵의 回顧錄 - 4. 해병대 창설과 초창기 (3) 가족 상봉의 기쁨

머린코341(mc341) 2014. 7. 2. 17:24

老海兵의 回顧錄 - 4. 해병대 창설과 초창기

 

(3) 가족 상봉의 기쁨

 

  조선해안경비대의 준·하사관 교육이 시작된 지 사흘째 되던 1946년 7월 3일의 일이었다. 이 날은 토요일이었지만 교육이 시작된 첫 주(週)인 까닭에, 오후에도 쉬지 않고 계속 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교육을 총책임지고 있던 나는, 오후 훈련을 지도하기 위해서 훈련장에 나가 있었다.

 

  그런데 오후 3시 30분경 훈련장 옆 큰길 건너편에서 병사 한 명이 다가오더니, "어떤 여자분이 어린 아이 하나를 데리고 와서 교육 주임님을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길 건너편 나무그늘 밑에서 기다리시라고 말씀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 순간, 나는 '아! 아내가 옹목이를 데리고 여기까지 왔구나!'하는 예감이 퍼뜩 떠올랐다. 나는 즉시 당시 선임 교관(先任敎官)이었던 김정구 소위에게 훈련의 뒷마무리를 맡기고, 그 병사의 안내를 받아 갔다.

 

  과연 길 건너편 나무 그늘 밑에는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아내와 아들이 초조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아! 천만 다행스럽게도 그동안 무사히 살아 있었구나!'하는 생각에 하늘을 우러러 감사드렸다.

 

  1944년 7월, 북만주 하얼삔의 고향둔(顧鄕屯)에서 헤어진 이래 실로 만 2년 만에 이루어진 처자와의 상봉이었던 것이다. 아내 혜룡도 오랫만에 남편을 만나보게 된 감격에 가슴이 벅찬지, 한참동안이나 아무 말도 못한 채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때 장남인 옹목이가 가만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나더니 하는 말이, "이 사람은 우리 아버지가 아니야!"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머리가 아찔해지면서 가승이 아파왔다.

 

  어린 아들이 제 아비를 못 알아본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다. 헤어질 때 불과 세 살밖엔 안되었던 옹목이가 아비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할 리 없었고, 아마도 기억에 남아 있는 인상은 아비가 군복 차림에 군도(軍刀)를 차고 있는 모습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태 만에 다시 보게 된 아비의 모습이란, 아무렇게나 입은 작업복 겸 훈련복에 잘 맞지도 않는 전투모(戰鬪帽)를 쓴 초라한 꼴이었으니, 제가 기억하고 있던 아비의 인상과는 너무도 달랐을 것이었다.

 

  나는 전투모를 벗고 땅에 앉았다. 그리고 옹목이의 두손을 마주 잡고서 "옹목아, 아버지의 얼굴을 좀 자세히 보아라."하고 말했다. 옹목이는 내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더니, 그제서야 "아버지!"하고 소리쳐 부르면서 내 목을 껴안았다. 나는 갑자기 솟구치는 설움에 못 이겨 옹목이를 껴안은 채 함께 울었고, 부자의 상봉 모습을 말없이 지켜 보고만 있던 아내 혜룡도 돌아선 채 흐느껴 울었다.

 

  우리는 한참 그렇게 울고 있다가 정신을 차렸는데, 그 사이에 나를 안내했던 병사는 보기에 안됐던지 자리를 피해 주었다.

 

  나는 서로 생사도 알지 못한 채 이태나 헤어져 있다가 이렇게 처자식과 상봉하고 보니, 그 반가움과 고마움이란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켰다. 그런데 당시에 나는 집은 물론 가진 돈도 없는 어려운 처지였으므로, 과연 처자식을 어디로 데려가야 할는지 몰라 막막하기만 하였다. 아내 혜룡도 이러한 형편을 눈치채었는지 잠자코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한동안 고심하다가, 문득 진해 역전에 있는 태화여관(泰和旅館)이 머리에 떠올랐다. 나는 일단 처자를 그곳에 데려가기로 작정하고, 옹목이의 손을 잡고 앞장섰다.

 

  나는 여관에 들어선 뒤에야 비로소 그동안 지내온 이야기들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1946년 6월 24일, 아내 혜룡이 아이를 데리고 내 고향인 금릉(金陵)에 도착한 뒤, 다시 20일 만에 진해에 있는 나를 찾아오기까지의 경위는 다음과 같았다.

 

  아내는 금릉에 도착한 뒤에도 여러 사람에게 물어서 겨우 어머님이 살고 있는 집을 찾아갈 수 있었다. 당시 어머님은 이미 단신으로 귀국하여 고향에 와 계셨다.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시댁을 찾아온 며느리와 손자를 맞이한 어머님의 반응은 뜻밖에도 냉정한 것이었다. 어머님은 아내에게 "너는 무엇을 하러 여길 찾아왔느냐. 내 아들은 여기서 경상도 여자와 결혼시키기로 되어 있으니, 그렇게 알고 너는 이북에 가서 결혼을 하든지 말든지 네 마음대로 하여라."라고 잘라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이때 아내는 너무나도 기막혀 말도 안 나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결혼할 때부터 며느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분이셨다지만, 갖은 고생 끝에 삼팔선을 넘어 찾아온 며느리를 이렇게까지 박대하실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에 서러운 마음조차 들었다.

 

  그러나 집안의 다른 어른들은 이런 어머님의 처사에 대해 모두 그르다 여기고 걱정들을 하였다. "아무리 며느리가 못마땅하더라도 그렇지, 머나먼 길을 고생하면서 손자까지 데리고 온 며느리를 그렇게 대해서야 쓰느냐."고 아내의 편을 들어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에 일가 가운데 어느 한 분이 아내에게 이르시기를, "자네, 여기서 더 이상 머물고 있다간 시어머니한테 무슨 말씀을 듣게 될지 모르는 일이네. 내가 듣기로는 자네 남편이 지금 해안경비대에 입대하기 위해 진해에 가 있다고 하니, 어서 그리로 찾아가 보게나. 자네 시어머니한테는 아무 말 하지 말고, 그 양반이 집을 비운 틈을 타서 애를 데리고 떠나게나. 여기서 대신역(大新驛)까지는 얼마 멀지 않으니, 대신역까지 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여 화물차라도 얻어 타고 진해까지 가도록 하게."하고 권유하셨던 것이다. 아울러 그 분은 "요즈음은 호열자(虎列刺:콜레라)가 유행하고 있는 터이니, 기차를 타기가 매우 어렵고 힘이 들것이네,"라고 주의 사항을 일러 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아내 혜룡은 다시 금릉을 떠나서 진해에 있는 나를 찾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처자를 태화여관에서 머물도록 한 다음, 일단 부대로 돌아와서 인사국장 김대식 소위에게 이 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였다. 김 소위는 사정 이야기를 듣자, "형님 가족이 여관에 묵으신다면 아무래도 경비가 많이 들 터인데, 형님 형편에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여관에는 오늘 하루만 머물도록 하시고 내일부터는 제(弟)가 방 하나를 마련해 드릴 터이니, 즘 불편하시더라도 별도로 거처하실 집이 마련될 때까지는 저와 함께 지내도록 하시지요."하고 제의하였다.

 

  나는 그의 친절한 제의에 감사하면서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한 뒤, 다시 여관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김 소위는 다음날 우리 가족의 여관비까지 지불해 주는 등 호의를 베플어 주었다. 우리는 그밖에도 여러 가지로 신세를 진 바 있어서 지금까지도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처 : 예비역 해병중장 신현준 초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老海兵의 回顧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