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海兵의 回顧錄 - 4. 해병대 창설과 초창기
(2) 준·하사관 교육대를 맡다
내가 조선해안경비대에 입대한 지 불과 엿새 만인 1946년 6월 27일, 진해에서는 이른바 6·27 사태라고 부르는 하극상(下剋上)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의 내용은 비교적 단순한 것으로서, 부대안에 아직 위계질서(位階秩序)나 군기(軍紀)가 확립되어 있지 못한 상태에서 하급자가 상급자에 대한 불만을 즘 과격하게 표시하여 벌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내가 보기에는 크게 염려할 정도의 사태는 아니었으며, 실제로 비교적 쉽게 일이 수습되었다.
6·27 사태가 수습된 뒤인 7월 초, 손원일 총사령관이 나를 불렀다. 손 사령관은 인사를 마친 내게 말하기를, "지금 우리 해안경비대에서는 준사관(准士官)과 하사관(下士官) 교육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문제가 많다네. 그러니 귀관이 이들에 대한 교육을 책임지고 실시해 주었으면 하네."라고 요청하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이를 쾌히 수락하고 물러난 뒤, 장차 맡게 될 교육대 업무에 대한 구상과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만주군 시절의 후배 몇 사람이 나를 찾아 왔다. 그 가운데 대표자 격인 한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형님, 어쩌자고 그런 엄청난 일을 쉽게 수락하셨습니까. 형님을 호락호락한 분으로 보지는 않습니다만, 교육대를 맡는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형님의 허리뼈가 아직 성한 것이 다행이오만, 이번에는 아무래도 큰 실수를 하신 듯합니다."라며 만류하였다.
그들은 6·27 사태가 수습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때에 어려운 임무를 말게 된 내가 걱정스럽기도 하고, 준·하사관 교육대의 일이 만만치 않은 것임을 사전에 경고도 해 줄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나는 후배들의 그런 염려와 경고를 고맙게 받아들이긴 하겠으나, 그렇다고 일단 임무를 맡기로 한 이상 이제 와서 취소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설명해 준 뒤에 그들을 돌려 보냈다.
당시 교육대의 간부진은 다음과 같았다.
교육 주임 申鉉俊 견습사관
교 관 金廷柱 소위
교 관 金聖思 소위
교 관 崔龍男 소위
교 관 崔二鉉 견습 사관
조선해안경비대 안에 처음으로 설치된 이 준·하사관 교육대는, 1946년 7월 11일부터 매기(每期) 약 40명 정도의 피교육생들에게 3주 간에 걸친 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11월 15일까지는 모두 6차에 걸쳐 250명을 배출시켰다.
이 기간에 있었던 갖가지 일화(逸話)들이 많으나, 특히 잊을 수 없는 것은 당시 교관이었던 최이현 견습 사관의 월북(越北) 사건이다.
교육대의 간부 요원 가운데서도 최이현 견습 사관은 매우 착실한 사람으로서, 평소의 근무 태도나 성적이 모두 양호하여 신망(信望)이 높았다. 이 최이현이 무슨 까닭인지 한창 교육을 실시하고 있던 도중에 행방을 감추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38도선을 넘어 이북으로 넘어갔다는 것이었다.
뜻밖의 이 사건에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놀라며 그 사연에 대해 궁금하게 여겼는데, 아직까지도 나는 그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다.
출처 : 예비역 해병중장 신현준 초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老海兵의 回顧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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