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역대 해병대사령관

수협중앙회 회장 역임한 제15대사령관 박희재 장군

머린코341(mc341) 2014. 7. 27. 09:25

수협중앙회 회장 역임한 제15대사령관 박희재 장군 

 

15대 사령관 중장 박희재

  • 역임기간  1982.12.28 ∼ 1984.9.4
  • 생년월일  1932년 10월 30일
  • 출 생 지  경북 금릉
학 력
1955  해군사관학교 졸업(9기)
1956  미 해병학교 기초반 수료
1961  미 해군 A.T.U과정 수료
1973  미 육군 참모대학 수료
경 력
1955  해병소위 임관
1960  1사단 2대대 중대장
1968  5여단 1연대 2대대장
1976  1사단 2연대장
1980  2여단장
1981  2사단장
1982  해군 2참모차장
1982  15대 해병대 사령관
1984  해병중장 예편
상 훈
1960  국방부장관 표창(′72)
1962  4등 보국훈장
1970  화랑 무공훈장
1971  충무 무공훈장
1971  미 공로훈장
1975  대통령 표창
1979  보국훈장 천수장
1983  보국훈장 국선장

 

주월 청룡부대 작전참모로 근무할 때 월남군 1군단사령부에서 개최된 월남군과 주월 연합군의 작전회의에서 정확한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여 주목을 끌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박희재(朴熺宰) 장군. 여단장 이동용 장군으로부터 그러한 어학 능력과 완벽을 추구하는 철저하고 성실한 복무 태도를 인정받게 됨으로써 10개월 간 복무기간이 영장되는 가운데 정보작전참모를 거쳐 대대장 근무까지 한 그는 그러한 근무기록이 반영이 되었기 때문인지 월남에서 대대장 근무를 한 해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들 중에서 유일하게 사령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고, 또한 예편 후엔 11대 사령관 이동용 장군의 뒤를 이어 해병대 출신 장성으로서는 두 번째로 수협중앙회 회장을 역임하는 이력을 쌓았다.

 

경북 김천 출신(1932년생)으로 김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9기)에 입교(51.9)하여 졸업과 동시 22명의 동료장교들과 해병과로 전과했던 박희재 장군은 소대장 근무를 마친 후 도미유학을 거쳐 교육단에서 교관 근무를 했고, 대위 때 사단장 김동하 장군의 전속부관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그 전속부관 근무가 인영이 되어 그는 후일 천복(天福)과도 같은 재복(財福)을 누리게 되는 화제를 남겼다.

 

그런데 69년 8월부터 71년 6월까지 1년 10개월 간 주월 청룡부대에서 근무했던 박희재 장군은 그 후(귀국 후) 해군본부 기획관리차장, 1사단 작전참모 5해역사 부사령관, 연합사 처장, 2여단장, 2사단장을 거쳐 해분본부 제2참모차장을 역임하고 84년 9월 3일 중장의 계급으로 예편했는데, 다음에 언급되는 이야기들은 원칙주의자, 또는 완벽주의자라는 평을 들어 왔던 박희재 장군의 성격과 언동 및 행적과 관련된 증언들이다.

 

월남의 캐손 산악지대(800고지)에서 추위에 떨며 털잠바를 사입고 근무한 적이 있는 왕년의 2대대 작전장교 A모(某)씨는 필자에게 이런 증언을 했다. 즉 여단본부 상황실로부터 무전호출이 있을 때마다 직접 그 호출에 응답하며 철저히 근무를 했더니 그 노고를 잊지 않고 있던 당시의 여단본부 작전참모 박희재 중령이 대대장 근무를 마치고 여단장(이동룡 준장)에게 귀국신고를 할 때 해병대 간부후보생 출신인 자기를 잠시라도 편한 부서에서 근무하다 귀국할 수 있도록 여단장에게 건의하여 경비중대에 발령이 나도록 배려해 준 일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고 했고, 또한 월남전 참전용사 중의 한 사람인 K모씨는 박 장군이 청룡부대 정보참모로 있을 때는 정보참모에게 지급되는 특별수당을 과장들에게 나누어 주고 대대장으로 있을 때는 대대장 몫의 C레이숀을 하사관들에게 나누어 주며 사기를 고무시킨 것과 청렴한 사람같이 여겨지더라는 증언도 남겼다.

 

한편 수도권의 대간첩작전상의 요지인 김포 강화지구에서 박 장군이 2여단장 또는 초대 2사단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긴장감 속에서 하루 세 끼니의 식사를 같이 하며 얼마나 업무와 관련된 질문 공세에 시달렸던지 체중이 3키로나 줄었었다고 말한 모(某)씨의 증언에 따르면 자기를 보좌하는 참모장을 비롯한 일반 특별참모들에게 부대의 안전관리를 위해 모든 업무적인 상황을 숙지시켜 능동적으로 대처케 하기 위해 그처럼 집요한 질문공세를 퍼부은 여단장이나 사단장은 일찍이 없었을 것이라고 했고, 그 결과 박 장군의 여단장, 또는 사단장 재임기간 중에는 그 작전지역에서 별다른 사고가 발생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부하 장병들이 사고를 내어 입건이 될 경우 일벌 백계로 엄히 다스리는 지휘관도 있지만 박 장군의 경우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이면서도 혼쭐은 내되 행정상으로 피해를 입지 않도록 각별히 배려하는 그런 휴머니즘을 느끼게 했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철저한 부대관리로 2사단장 직무를 무사히 완수하고 82년 12월 28일 부로 중장으로 승진하여 해군본부 제2참모차장으로 취임했던 박희재 장군은 불운하게도 그 제2참모차장 임기 말경인 84년 7월 26일 김포지구에서 발생한 간첩 침투사건으로 인해 비록 지휘권이 없는 직위이긴 했지마는 위로는 자신이 제2참모차장으로서 보좌한 오경환 참모총장과 아래로는 사단장, 연대장, 대대장 등과 함께 연대책임을 지고 해임을 당하는 변을 겪었다.

 

그렇게 하여 그 해 9월 3일 부로 중장의 계급으로 예편했던 박희재 장군은 86년 7월 12일 제13대 수협중앙회 회장으로 취임하여 90년 4월 18일까지 수협중앙회의 발전을 위해 성념을 다해 이바지함으로써 예편 후의 공직생활을 마감했는데, 공직에서 물러난 뒤 박 장군은 자신이 대위 때 전속부관으로서 모신적이 있던 김동하 장군의 부인께서 강남지역에 개발붐이 일기 시작했을 때 ‘자고로 가진 돈으로 땅을 사두면 언젠가는 그것이 복덩어리가 될 날이 있을 것’이라고 하기에 도미유학을 가서 쓰다 남은 돈 등 근검절약을 해서 모은 돈으로 지금의 교대 부근에 두 조각(필지)의 개덩더리 같은 나대지를 사둔 것이 말 그대로 복덩어리가 되는 바람에 하늘이 내린 복덩어리 같은 그 나대지를 처분하여 빌딩을 건립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 2 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