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역대 해병대사령관

해본2차장때 문제를 제기했던 제16대사령관 성병문 장군

머린코341(mc341) 2014. 7. 27. 09:26

해본2차장때 문제를 제기했던 제16대사령관 성병문 장군

 

16대 사령관 중장 성병문

  • 역임기간  1984.9.4 ∼ 1986.9.3
  • 생년월일  1930년 7월 4일
  • 출 생 지  경남 창녕
학 력
1957  해군사관학교 졸업(11기)
1960  미 해병학교 기초반 수료
1969  미 해병상륙전학교 고등군사반 수료
1977  국방대학원 수료
경 력
1957  해병소위 임관
1965  1사단 2연대 3대대 9중대장
1973  2여단 3연대 3대대장
1978  연평부대장
1982  1사단장
1984  해군 2참모차장
1984  16 해병대 사령관
1986  해병중장 예편
상 훈
1966  화랑 무공훈장
1978  보국훈장 삼일장
1982  부국훈장 천수장
1983  충무 무공훈장
1983  대통령 표창
1985  보국훈장 국선장

성실함의 표상 같은 인물로 알려져 있는 제16대 사령관 성병문(成炳文) 장군. 청룡2호작전(휴손평야의 추수보호작전) 기간 중인 66년 1월 31일 새벽 9중대 진지를 기습 공격한 약 1개 대대의 베트콩 정규군과 3시간 여에 걸친 사투를 벌인 끝에 전사상(戰史上) 투이호아 최대의 접전(接戰)으로 기록되고 있는 그 전투에서 승전을 거둔 왕년의 그 3대대 9중대장 성병문 장군은 해군제2참모차장 재임기간 중 모군 사령부의 재창설을 위해 필사즉생(必死卽生, 말하자면 군복을 벗을 각오를 하고 문제를 제기한, 그리하여 그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그러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사단장 재임 시에는 철통같은 해안선 방어로 고무적인 전과를 거둔 대간첩작전의 지장(智將)이다.

 

경남 창원 출신(1930년생)으로 57년 4월 해사11기 해병과 장교로 임관하여 서해도서부대에서 소대장 근무를 마쳤던 성 장군은 사단 정보, 작전참모실과 해병학교 교관, 진해기지 미 고문단 연락장교 근무 등을 거쳐 65년 9월 청룡부대 3대대 9중대장으로 임명되어 월남으로 출정했다.

 

앞에서 언급한 그 전투 때(66.1.31) 새벽녘에 기습을 받은 3대대 9중대는 3소대의 일각이 돌파를 당해 처절한 백병전이 벌어지는 상황에 직면했으나 중대기지(사주방어진지) 서북방(3소대)에 투입된 적 주공부대를 제2방어선에서 집중 운용한 6문의 3.5인치 로켓포로 요격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가함으로써 비록 4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20여 구의 적 시체를 확인하고 3정의 체코식 기관총을 포함한 여러 정의 무기와 100여 발의 불발 수류탄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는데, 뻘밭 속에서 사투를 벌였던 그 날 새벽녘 전투을 돌이켜 보며 특히 6.25전쟁 참전용사인 중대 선임하사관 손승문 상사(해병1기)가 그 날 밤 예감이 이상하다면서 각 소대에 2문씩 배속시켜 놓은 6문의 3.5인치 로켓포를 중대본부로 이동시켜 집중 운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기에 선뜻 그 건의를 받아 들였던 것이 주효(奏效)했다고 말하는 성병문 장군은 60밀리와 81밀리 박격포 사수들이 포반장 박정수 소위의 지휘하에 접전 거리가 너무 가까워 장약을 떼고 사격을 했던 일과 혈전이 끝난 후 사상자들을 메드백에 실어 보낼 때 두개골이 깨어진 한 대원이 “중대장님 빨리 치료를 받고 귀대하겠습니다”라고 했던 그 말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80년 9명의 해사11기 출신 장교들 중에서 제일 먼저 준장으로 승진하여 2훈련단장, 2사관학교장 등 직책을 거쳐 사단장으로 임명이 되었던 성병문 장군은 부대의 전투력 강화에 주력하는 한편 간첩들의 침투가 예상되는 특정경비지역(해안선)에 대한 경계를 철통 같이 강화함으로써 83년 8월 5일 01시 아군 방어선으로 침투 중인 5명의 무장간첩을 조기에 발견한 끝에 1명은 사살하고 부상당한 1명과 나머지 3명은 달아난 자선(子船)에 복귀하지 못하고 전원 자폭하는 결과를 초래했었다.

 

성병문 장군이 사단장의 임기를 마치고 해군제2참모차장으로 임명된 날짜는 84년 9월 4일이었다.

 

그런데 지휘권 없는 그 자리에 앉게 된 성 장군이 모군 사령부의 재창설을 바라며 군복을 벗을 각오를 하고 제기한 그 문제점(7가지)이란 지면 관계로 일일이 다 언급할 수가 없지만 해군 해병대의 통합이 초래한 혼성편성으로 인한 비능률, 지휘계통(해병)의 축소로 말미암아 초대되는 진급 확률의 극소화로 인한 자질의 저하와 저능력의 심화, 기술군(해군)과 체력군(해병)의 구분으로 인한 교육 훈련의 약화 현상, 전통과 사명감의 상실과 사기의 저하, 진급 심사 등 인사관리 상의 문제점 등을 지적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문서를 작성했던 성 장군은 해병참모부 기획처장 김기홍 대령에게 건네주며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지겠으니 극비리에 10부를 인쇄해 오라고 했고, 지시를 받은 김 처장은 마치 역적이 된 것 같은 두려운 마음으로 해군본부 인쇄소에 근무하는 5명의 해병출신 인쇄공들에게 은밀히 당부하여 10부를 인쇄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하여 10부 중 1부를 김 처장에게 주며 후일 역사의 증인이 돼 줄 것을 당부했던 성 장군은 나머지 문서를 가지고 불편한 관계인 해군의 동의 없이 여러 단계를 거치지 않고서는 결코 접근하기가 어려운 군부의 여러 실세들, 이를테면 당시의 보안사령관, 합참의장, 군방부장관 등 군부요인을 보안 유지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가운데 오랜 시일에 걸쳐 끈덕지게 배방하여 브리핑을 통해 설득력 있게 설명을 한 끝에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자신의 제2참모차장 임기를 1개월 앞둔 86년 8월 전두환 대통령과 육사 11기 동기인 이기백(李基白) 국방장관이 전 대통령으로부터 해병대사령부를 재창설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 하는데, 당시의 국방부장관 이기백 장군(예. 대장)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합참의장으로 있을 때 여러 차례 합참을 방문한 성병문 장군으로부터 그 문제와 관련된 브리핑을 듣고 공감을 했던 나머지 장관으로 취임한 후 각군의 균형발전과 전투력의 극대화를 위해 대통령에게 해병대사령부의 재창설을 건의하되 그 시기가 노태우 장군의 출마가 기정사실화 되고 있던 6.29민주화선언 후였기에 해병대사령부가 재창설되면 대선(87.12) 때 해병대의 현역과 예비역을 합해서 100만 표는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농담 삼아 곁들였다고 했고, 그러한 시기에 전두환 대통령이 그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자신의 임기 중에 전투역량을 최대한 강화하여 전쟁공포로부터 국민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본격적으로 추진이 된 그 모군 가령부의 재창설 계획은 이기백 장관의 뒤를 이은 정호용 장관 취임 109일 만인 87년 11월 1일에 이르러(8대 제2참모차장 박구일 중장 임기 중) 결실을 보게 되었다(그 뒷이야기는 박구일 장군 편에 언급이 된다).

 

86년 9월 1일 해군제2참모 차장(7대)의 임기를 마치고 예편했던 성병문 장군(제16대사령관)은 예편 후 480여 업체가 회원으로 가입해 있는 건설협회의 상근부회장으로 취업하여 1회(임기 3년) 연임을 하는 가운데 건설협회의 발전을 위해 보국(報國)하는 마음으로 성념을 다해 봉직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 2 券" 중에서